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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62)화 (162/282)

<162화>

달빛이 내려앉은 밤.

루시엘은 창가에 걸터앉아서 부엉이 벨을 기다렸다. 초저녁에 나간 벨은 사냥을 길게 떠난 것인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요즘은 편지를 보낼 일이 없어서 긴 비행을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저 멀리서 부엉,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 고개를 빼고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정적만이 흐를 뿐.

언제나 곁에 있던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몹시 허전했다.

‘그 녀석, 고민이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낮에 들은 공작의 말이 마음에 툭 걸렸다.

‘키제프…….’

그러고 보니 요즘엔 키제프에게 작은 쪽지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바로 전할 수는 없지만 루시엘은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었다.

꾹꾹 눌러 쓴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가지고 키제프의 방으로 올라갔다.

휴일이 되면 올 테니까 편지를 읽을 수 있게.

‘아니면 어딘가 숨겨 둘까?’

루시엘이 웃으며 조용히 그의 책상을 둘러보았다. 책꽂이에는 원래 자리했던 수많은 마법서들 대신에 두툼한 검술서가 있었다.

책상 한구석에는 상자가 두 개나 놓여 있었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예쁜 상자가.

‘저건 뭘까. 혹시 누군가에게 줄 선물인가?’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루시엘은 호기심에 동그래진 눈으로 상자를 살짝 열어 보았다.

안에는 익숙한 글씨의 편지들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루시엘이 테드의 이름으로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루시엘은 입가의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내가 준 편지들을 예쁘게 보관하고 있었구나.’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그 안에 자신의 편지를 넣어 두었다. 그러곤 빠져나와 제 방에 돌아왔다.

오지 않은 벨 때문에 창문을 계속 열어 놓아서인지 방 안이 서늘했다.

뽀르르 마차 침대로 들어간 루시엘은 캐노피 덮개를 완전히 내려 추위를 막고 이불까지 푹 뒤집어썼다.

포근한 온기가 전해지자 루시엘은 금방 곤하게 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든 루시엘의 방에 키제프가 살며시 들어왔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벨을 새장에 넣어 준 다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꼭꼭 닫고 커튼도 내려 주었다.

침대의 덮개까지 내리고 잔 걸 보니 어지간히 추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부엉이를 위해 창문도 열어 두고…….

키제프의 입가에 미소가 잠시 번졌다. 그냥 나가긴 아쉬워 침대가 있는 곳을 바라본 채 오도카니 섰다.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기사단 근처까지 날아든 부엉이를 만난 순간, 거짓말처럼 이끌리듯 와 버렸다.

‘네가 보고 싶었어…….’

몰래 오긴 왔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스승인 쿠란티엘의 매몰찬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한참 멀었습니다. 나약하십니다. 고작 그 정도 마음가짐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선택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곁에 남아 줄지, 힘을 키워 미래를 지켜 줄지.’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내 힘으로는 아직 부족해. 루시엘을 지키기 위해서는.’

황성에서 황자를 제압할 때에도, 막시무스에게 혼쭐을 내줄 때에도 레이븐의 힘을 빌린 게 사실이었으니까.

순수하게 제힘으로 루시엘을 지켜야만 한다.

‘그저 칭찬받는 마법 영재 정도로는 안 돼.’

단순히 마법이나, 검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누군가를 해칠 용기가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말로는 그들을 죽이겠다며 몇 번이고 마음을 되새기면서도 막상 그들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을 자신 같은 건 없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루시엘이 이름을 적어 놓은 그 인물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두려움 먼저 죽여야 했다.

카빌 후작가와 황자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뒤에는 발루크라는 알 수없는 적까지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자가 될 것이다.

한 나라의 군주마저 쉬이 대할 수 없는 그런 강한 자가.

제 아버지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으로. 아니,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로.

그리고 쿠란티엘은 그 방법을 알려 주었다.

‘드래곤의 땅 드락카로 가서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고 그 검법을 익히는 겁니다. 경계로 밀려드는 마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전쟁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겁니다.’

키제프가 주먹을 꾹 쥐었다.

레이븐을 통해 루시엘의 과거를 낱낱이 들여다보았다.

‘네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준 자에게는 반드시 복수하겠어.’

황자는 수도원행이 결정 났고 발루크도 종적을 감춘 지금은 아직 시간이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성장할 시간이…….

키제프는 루시엘이 덮어 놓은 침대 캐노피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잠결에 이불을 걷어 낸 루시엘의 뽀얀 얼굴이 보였다.

‘보고 있는데도 이렇게 아쉬운데.’

떨어져 있을 생각에 가슴이 벌써 답답하고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루시엘을 지키기 위해, 루시엘을 떠나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우스워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전부 제가 나약한 탓이었다.

키제프는 오래도록 루시엘의 하얀 얼굴을 눈에 담았다.

‘너를 지키기 위해 괴물이 된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그러니까 꼭 강해져서 올게. 안녕.’

심장 안쪽이 욱신거렸다. 불필요하게 번지는 감정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아 내야 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은 그가 루시엘의 보드라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문득 루시엘의 자그만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서로에게 이동할 수 있는 결혼반지였다. 드락카의 땅으로 가면, 이 반지는 효력이 없다.

그곳은 다른 영역의 땅이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네가 보고 싶은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반지로 이동을 시도하겠지.’

어쩌면 루시엘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럴 바에는 아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결혼반지를 빼려다가 또 그만두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이것마저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아.’

키제프는 반지를 낀 손가락에 입술을 가만 댔다.

난생처음 선택한 이별이 너무 어려워 어쩔 줄을 모르던 그가 겨우, 기사단으로 향하기 위한 이동 마법진을 생성했을 때였다.

파아아.

초록빛의 빛나는 이동진으로 발을 떼려는데 뒤에서 뽀르르 안겨 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키제프가 멈칫 몸을 굳혔다.

“……바보야. 그냥 이대로 가면 어떡해?”

“……루시엘.”

키제프가 뒤돌아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하려고 애써 미소지었다.

“나 때문에 깼구나. 미안.”

잠긴 목소리, 무겁게 가라앉은 눈.

루시엘은 곧 그에게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음을 직감하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야?”

루시엘의 맑은 눈망울이 빤히 올려다보자, 키제프는 아무 말도 못 하며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키제프!”

“…….”

키제프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루시엘이 왼쪽으로 뽀르르 다가가서 그의 손을 흔들었다.

“답답해. 나 좀 봐 봐.”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가 느릿하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고민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 거야?”

키제프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어렵게 입술을 혀로 축였다.

“……루시엘, 나 드락카로 떠나기로 했어.”

“……뭐라고? 갑자기? 왜?”

키제프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루시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스승님 말씀대로 난 너무 어리고 나약해.”

그리 말한 키제프의 시선이 루시엘에게로 닿았다.

‘너를 지키기 위해 가는 거야. 더 강해지기 위해서.’

“그럴 리가. 난…… 키제프가 약하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어. 아니, 오히려 너무 강하잖아.”

속으로는 떨고 있는데도 어쩐지 말이 가볍게 튀어나왔다. 그런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기억해 주면 좋겠군. 드락카에 가서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을 거야.”

“얼마나 오래……?”

“모르겠어. 몇 년이 될지.”

“……그렇구나.”

루시엘도 갑작스러운 이별에 생각이 많아졌다.

“가족들에게는 이야기했어?”

“응. 내일 식사 시간에 하려고.”

“떠나는 건 언제인데?”

“……최대한 빨리 가려고.”

어느덧 담담해진 말투에 루시엘은 어쩐지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키제프의 성장을 막을 권리는 없었다.

루시엘 역시 바쁘게 일정을 보내고 있었고, 둘은 계약 부부일 뿐이니까.

‘키제프가 드락카로 가서 몇 년을 보내면, 계약 결혼의 기간은 더 짧아지겠구나.’

막연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긴 계약이라고 해 놓고서 그동안은 꽤 가깝게 지냈었다.

이제야 그가 원래 제안했던 계약 결혼에 걸맞은 관계가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이 서운함으로 가득 차오르는 한편, 먹먹해졌다.

루시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키제프는 스스로 더 강해지려는 거잖아. 서운해하지 말고, 응원해 주자.’

“……진로가 고민이라더니 어느새 다 정해 두었던 거였구나. 너무 잘 됐다. 가서도 잘하도록 응원할게.”

루시엘이 밝게 웃어 주었지만, 정작 키제프는 돌연 기운이 빠진 얼굴이었다.

“응원이라……. 그래. 고마워, 잘자.”

낮게 중얼거린 키제프가 상처받은 얼굴로 돌아섰다.

며칠 동안 고민 끝에 어렵게 털어놓은 그 말에 루시엘은 조금의 서운한 기색도 없다니…….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에 무언가가 콱 들어찬 듯 답답하고 목이 매었다.

키제프는 그대로 루시엘의 방을 나갔다. 그러나 삼 초도 안 돼서 다시 돌아왔다.

아무리 참고 이해하려고 해 봐도 납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키제프가 새빨개진 얼굴로 휘적휘적 다시 루시엘 앞으로 다가왔다.

“……루시엘, 남편이 멀리 간다잖아. 그 반응이 전부야? 진심으로?”

“……키제프,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 줄래?”

침대에 누워 있던 루시엘이 푹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내리며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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