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유모?’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거란다. 차를 마시고, 그다음 밥을 먹어라.’
‘주인님의 배려로 노동도 하지 않는 너희를 먹여 주고 입혀 주는 거란다. 늘 감사히 여기도록 해.’
‘혹시 도망치려고 했니? 네가 사라지면 네 언니가 대신 벌을 받을 거다.’
어린 루시엘이 도망칠까 감시하고 학대를 일삼던 오르비아 백작가의 유모, 힐다 볼라디.
말을 듣지 않으면 과한 처벌을 내리곤 했던 백작의 끄나풀.
힐다 볼라디와 꼭 닮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루시엘은 놀란 심장을 내리누르며, 머리를 굴렸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자.
‘만일 정말 힐다 볼라디라면, 이 여자가 왜 여기 있지? 그것도 발루크 후작 부인이란 신분으로?’
아니면 자신이 다른 사람을 착각하는 걸까?
머리 색도, 차림도, 분위기도 달라지긴 했지만 분명히 볼라디 부인과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그때 공작이 루시엘의 조그만 손을 꼬옥 붙잡으며 눈빛을 보냈다.
‘아빠도 무언가 알고 계시는 모양이야.’
“드디어 베일에 싸인 발루크 후작가의 일원을 처음 보게 되는군요. 우선은 잠시 쉬었다가 살롱을 마저 진행하기로 할까요.”
황후의 말에 사람들이 일어나 자유롭게 쉬며 웅성거렸다. 스산함 마저 감돌던 분위기가 차츰 풀렸다. 하지만 발루크 후작 부인이 있는 자리 쪽은 아니었다.
모두 일어나 자연스럽게 움직이는데도, 발루크 후작 부인과 곁에 앉은 페넬로페, 레이놀드 황자 세 사람만은 마치 영혼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그대로 굳은 채였다.
사람이 없는 정원의 외딴곳으로 살짝 이동한 공작이 엘링턴에게 자그맣게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르가가 처리했던 일이 잘못된 건가? 확인하도록 해.”
“예, 각하.”
엘링턴도 심각한 얼굴로 통신구를 사용하기 위해, 더 먼 장소로 이동했다.
엘링턴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공작이 루시엘을 안아 들며 말했다.
“루시엘, 잠시 주변을 좀 걸을까.”
“네, 좋아요.”
루시엘은 공작이 제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루시엘을 안은 채 주변을 도는 척 걷더니 한순간에 이동포탈을 타고 벨슈타인의 타운하우스로 이동한 다음 입을 열었다.
엘링턴도 그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루시엘, 네게 미리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다. 오르비아 백작가에서 일하던 힐다 볼라디라는 여자를 알고 있느냐?”
“네, 물론이에요. 저를 감시했던 여자였어요.”
“사실 그 여자는 죽었다.”
자초지종은 길었지만, 오르비아 백작이 지금 공작가의 감옥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은 루시엘이 조금 더 자라면 알려 줄 생각이었다.
“오르비아 백작이 그간 한 짓을 밝히려고 그 여자를 잡아들였다가, 풀어주었는데 황자의 부관인 팔로스를 만나더구나.”
“……네? 오르비아 백작은 그럼 어디에 있어요?”
루시엘이 분노에 차 물었다.
“그놈이 수를 쓸 수 없게 잘 조치해 두었다. 걱정 말아라.”
공작은 심심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오르비아 백작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최근 바싹 마른 백작은 이제 말을 잃은 듯했다.
공작의 토닥임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아무튼 힐다 볼라디가 네가 크리스털 페어리였다는 정보를 황자 쪽에 넘기려 했다. 그걸 막기 위해 그 여자를 처리했지.”
“아빠가 막아 주셔서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였구나. 감사해요.”
루시엘의 인사에 공작이 아이의 어깨를 살짝 포옹하며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일이지 않나. 당연하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살아 있었다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실 정도면 제가 잘못 본 게 아닌가 봐요.”
잠시 후 엘링턴이 다가와 고했다.
“각하께 직접 보고드리겠답니다.”
이내 공작의 통신구에서 빛이 났다. 자르가인 걸 확인한 공작이 얼른 받았다.
―각하, 자르가입니다. 힐다 볼라디는 제 손으로 직접 처리했고 시체까지 확인했습니다.
공작이 잠시 루시엘의 귀를 가리키며 신호를 주자 엘링턴이 루시엘의 귀를 손으로 막아 주려고 했다.
“아가 마님의 정신 건강을 위해 귀를 잠시 막겠습…….”
그러나 루시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알 건 다 알아요.”
루시엘이 회귀한 사실을 두 사람도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하하, 예. 그래도 좋은 것만 보여 주고,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실 겁니다.”
이내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르가에게 은밀히 물었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나?”
―돌을 매달아 강에 던졌습니다. 처리는 확실했습니다.
“알았다.”
공작이 자르가와의 통신을 마친 다음, 다시 루시엘과 엘링턴에게로 돌아왔다.
공작이 입매를 틀며 말했다.
“일이 재밌어지겠군.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까. 루시엘, 브로치는 잘 가지고 있지?”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머니 속 물건을 다시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네, 휴식 시간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서 페넬로페를 만날게요.”
“네게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만일을 위해 나와 키제프도 주시하고 있을 테니 안심하고.”
“네. 괜찮아요, 페넬로페는 분명 저에게 먼저 접근할 거예요. 그때 이걸 흘릴게요. 보석이니 분명 탐낼 거고요.”
루시엘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다시 드레스 허리춤에 달린 작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살롱이 열리는 야외 정원으로 다시 돌아간 루시엘은 혼자서 인공 폭포를 지나 나비들이 꽃 위로 노니는 모습을 구경하며 서 있었다.
곳곳에서 가족들이 루시엘을 주시했고, 이미 온갖 실드 마법이 그녀를 수호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황성. 공격 마법의 사용을 막아 둔 곳이었다. 황성에서 허락 없이 공격 마법을 썼다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고, 재수 없으면 반역죄로도 엮일 수 있는 큰 죄목이었다.
나비를 기다리는 꽃처럼 루시엘은 새초롬히 주변을 구경하며, 페넬로페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다른 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던 페넬로페는 곧 루시엘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어머, 공자비를 드디어 뵙네요.”
“안녕하세요, 카빌 영애. 안 그래도 기다렸어요. 못 오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고요.”
루시엘의 말에 페넬로페는 잠시 분노에 차올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제법 차분하게 말했다.
“……발루크 후작 부인께서 저를 후견해 주시는 덕에 이렇게 오게 되었지요. 베아트리체에서 최고로 비싼 드레스도 사 주셨어요.”
허영심 가득한 말을 해 대는 걸 보니 평소의 페넬로페인 모양이었다. 아까는 인형처럼 가만히 있어서 분위기가 좀 달랐었는데.
그나저나 페넬로페의 말은 틀렸다.
“제가 산 다음으로 비싼 드레스인가 보네요. 그날 어머님께서 진열대 하나를 통으로 구입해 주신 거 봤잖아요.”
‘언제까지 유치한 대화로 장단을 맞춰 줘야 하지?’
루시엘이 속으로 따분해하면서도 페넬로페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을 살폈다.
“발루크 후작저는 어땠나요?”
그제야 페넬로페가 신이 나서 자랑을 해 댔다.
“아주 아주 훌륭한 곳이었어요. 달콤하고 향긋한 음식이 끊임없이 나오고 호화로운 곳이었어요. 저는 그야말로 공주 대접을 받았고요. 가능하면 후작 부인께 대모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려고요. 저를 어지간히 귀여워하시거든요.”
“다른 가족들은 없던가요?”
계보도를 살핀 기억으로는 발루크 후작 부인에게는 후작과 외동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못 본 것 같네요. 배를 타고 멀리 가셨다던가. 아, 그리고 외동딸은 잃어버리셨대요. 가여워라. 덕분에 그 저택엔 여자아이 물건이 엄청 많았어요.”
“여자아이 물건?”
“그래요. 머리 장식이라든가. 인형이라든가. 신발이라든가. 전부 새것이더라고요.”
페넬로페의 이야기를 듣던 루시엘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딸을 그리워해서 남겨 둔 물건이 아니라, 새것이라고?’
“문학 살롱이 끝나면 그럼 다시 카빌가로 돌아가나요?”
“아뇨! 당분간은 발루크 후작저에서 머물 건데, 왜요?”
페넬로페가 툭 쏘아붙이자 루시엘이 말했다.
“아뇨, 발루크 후작저에서 머문다니 영애에겐 잘된 일이네요.”
다행이었다. 페넬로페가 살롱이 끝나도 카빌 후작가로 가지 않고 발루크 후작가로 가는지 확인이 필요했던 터였다.
그건 꽤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이아몬드 브로치로, 발루크 후작 부인이 진짜 머무는 곳이 어딘지 그 위치를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당연하죠. 후작 부인께서 절 예뻐하시니까요. 그나저나 공자비도 발표한다지요? 기대할게요. 나를 이길 순 없을 테지만요.”
페넬로페가 초록 눈을 빛냈다.
슬슬 황후가 살롱을 재개하기 위해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루시엘은 브로치를 꺼내 드레스 자락 뒤로 숨겼다가, 슬쩍 발밑으로 흘렸다.
묵직한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작은 소릴 내며 풀숲 위로 떨어졌고, 루시엘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 다음 페넬로페를 보며 말했다.
“영애도 준비할 시간이 있었던가요?”
“흥, 깜짝 놀랄걸요?!”
페넬로페가 루시엘에게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나 이미 다이아몬드 브로치로 온갖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총총, 루시엘이 웃으며 자리를 먼저 떴다.
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본 페넬로페는 이미 눈이 뒤집혀 루시엘이 떠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남자 얼른 제 드레스 자락으로 감춘 다음, 냉큼 주워 들었다.
‘……이게 웬 횡재야? 다, 다, 다이아몬드잖아?’
카빌 후작 부인도 아주 자그마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랗고 반짝반짝 화려한 물건이었다.
‘분명히 방금 공자비 계집애가 흘린 물건이야. 벨슈타인이 부자라더니만. 흥,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이건 내 물건이지.’
헤죽헤죽 웃던 페넬로페는 그 브로치를 옷 깊숙한 곳으로 감춰 놓았다.
거기에 어떤 마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