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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45)화 (145/282)

<145화>

“그 마차에 타려고 했는데 뭔가 강한 힘에 튕겨 나왔어. 정신을 차려 보니 마차는 이미 사라졌고. 페넬로페를 찾아가 보려고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그것도 안 되네. 그 여잔 도대체 정체가 뭘까…….”

레이븐의 말에 루시엘과 키제프도 얼굴을 같이 굳혔다.

“……너를 튕겨 내다니, 그 후작 부인도 내 스승님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건가?”

둘의 대화를 들으며 루시엘은 생각 중이었다.

발루크의 이름은 익숙했다. 벨슈타인의 유리 공예품을 독점해 망하게 일조했던 그 상단이었으니까.

그때,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다.”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에 레이븐이 스스스, 검은 연기가 되어 종적을 감췄다.

루시엘이 얼른 문을 열어 주자 공작과 엘링턴이 함께 서 있었다.

“엘링턴. 돌아왔네요.”

“예. 아가 마님께서 말씀하셨던 사일런트 아일랜드를 매수하려고 사무소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근데 제가 누굴 마주쳤는지 아십니까?”

“누군데요?”

엘링턴은 조금 전 만난 빌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에 있는 상처도 그렇고 과거 고리대금업 때문에 만난 적이 있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카빌 후작의 수하요. 최근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을 텐데, 섬을 매수하려고 했나 봅니다.”

“그, 그럼 어떻게 되었어요?”

엘링턴이 섬을 구입한 토지 증서를 보여 주었다.

“매수는 마쳤습니다.”

“와, 정말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그자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때 엘링턴의 통신구에 연락이 왔다.

“호크아이입니다, 각하.”

곧이어 공작은 엘링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도 함께 들어도 좋다는 표시였다.

통신을 시작하자 호크아이의 정보 조직원이 고한 것은 레이븐이 알려 준 소식 그대로였다.

―발루크에서 카빌에게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무려 5억 틸링에 달하는 자금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발루크의 목적이 뭐지? 다른 움직임은 추적이 가능한가?”

―발루크는 워낙 정보원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정보도 카빌가에서 나온 것입니다.

“……호크아이 입에서 어렵다 소리가 나오나.”

―죄송합니다.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만 조금 더 시일이 걸릴 겁니다.

“그 정도 능력도 없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통신이 끝나자 공작이 자못 인상을 찌푸렸다.

발루크는 예전부터 그의 심기를 살살 긁어 오는 행각을 보여 왔고,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피해는 계속 끼쳐 왔다.

그동안은 발루크의 본거지가 워낙 벨슈타인과 먼 거리에 있어 딱히 건드리지 않았는데.

“발루크 상단의 그간 더러운 행보를 보자니 카빌을 도와주었다는 게 영 찝찝하군.”

발루크가 손을 대는 건 유리공예뿐만 아니었다.

리카르도 영지의 와인 재배지를 소유해, 제국 각지에 와인을 납품하고 있으며, 가구업, 광산업까지 광범위하게 손을 대고 있었다.

발루크 후작령은 동남부 지역인 이스턴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후작저는 늘 비어 있어 유령 저택이란 소문마저 돌았다.

카빌가에게 선뜻 큰 규모의 돈을 빌려줄 정도의 자본력을 지녔음에도 세간에 드러난 정보는 거의 없으니. 벨슈타인 이상으로 폐쇄적인 가문이랄까.

“만약 발루크와 카빌이 손을 잡는다면 이건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아요…….”

“알고 있다, 루시엘. 기분 나쁜 것들을 한 번에 싹쓸이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군.”

“……혹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겁니까?”

공작이 살기에 가까운 마력을 내뿜었고, 키제프도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두 부자의 인간 같지 않은 살기에 섬찟해진 엘링턴이 말했다.

“각하, 도련님. 두 분 진정하십시오. 드러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진정하셔야 해요. 아빤 발루크 후작 부인을 만난 적이 있으셨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 발루크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적이 없었으니. 아마 이번 문학 살롱에도 참석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요? 하지만 이번에는 카빌 후작가의 페넬로페 영애를 문학 살롱에 데리고 나온다던걸요.”

“……그 맹랑한 아이 말인가? 잘하면 그 아이를 역이용해서 발루크의 정보를 가져올 수 있겠군.”

“페넬로페를요?”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늘한 미소를 품었다.

* * *

다음 날 오후.

루시엘이 욕조 안에 몸을 누인 채 피로를 풀고 나오자, 시녀들이 다가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로즈가 드레스를 잔뜩 가져와서 말했다.

“아가 마님, 1차로 골라 둔 열 두벌 중에서 최종 드레스를 선택할 시간이 왔어요. 중간에 갈아입으실 것까지 두 벌을 가져갈 거예요. 우선 만찬용 한 벌, 문학 살롱 발표용 한 벌을 골라 보세요.”

“하루에 드레스를 세 번 갈아입어?”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자, 로즈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최소한이에요.”

“왠지 결혼식 할 때보다 복잡한걸.”

“황성에선 누구나 가장 근사해 보이고 싶은 법이니까요.”

로즈가 양손을 모은 채 꿈꾸는 소녀처럼 말했으나 루시엘은 그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저건 괴물이나 다름없어…….’

‘눈을 마주치지 마. 저주를 걸지도 몰라.’

황성은 루시엘에게는 화려하지만 가장 잔혹했던 곳이었으니까.

루시엘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평소대로 밝게 기운을 차렸다.

“응, 문학 살롱 드레스는 이미 마음을 정했는걸. 이 드레스로.”

루시엘은 꽃을 형상화한 살구색 드레스를 가리켰다. 층층이 겹쳐진 레이스 스커트가 돋보이는 베아트리체 의상실의 드레스였다.

“역시 우리 아가 마님. 꽃처럼 예쁘실 거예요. 다른 드레스도 고르고 계세요. 저희는 짐을 마저 정리하고 있을게요.”

“응.”

루시엘이 나머지 드레스를 고르는 동안, 로즈와 시녀들도 다른 짐을 챙기러 방을 나갔다.

황후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말고도 황성에 간다는 것은 루시엘에게 의미가 깊었다.

과거 착취당했던 보석 노예 신분이 아니라, 북부의 최고 강자 벨슈타인의 공자비 신분으로 황성에 처음 가는 것이니까.

‘황성에 가서 내가 누구인지 보여 주고 올 거야.’

더는 아무도 무시하고 천대할 수 없게.

그렇게 강하게 마음먹는 순간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파아앗!

또롱.

이내 강한 자신감에 차오른 루시엘이 핑크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다. 그 영롱한 보석을 잘 챙겨 놓으면서 루시엘은 과거 레이놀드 황자가 상처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보석을 만들지 못하면 네 가치는 없다. 넌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니까.’

‘레이놀드, 당신이 틀렸어. 내 존재 가치를 너 따위가 정할 수는 없어. 이번에는 두려움 없이 당신을 똑똑히 마주할 거야.’

앵두 같은 입술을 사리물며 루시엘이 마음 깊이 새겼다.

루시엘은 이벨린 할머니가 주신 드래곤 마나 부적을 목에 걸고, 옷 안쪽으로 숨겼다.

곧이어 로즈와 시녀들 여러 명이 들어와 루시엘의 단장을 도왔다.

이내 네 가족이 모두 단장을 마쳤다. 네 사람은 똑같이 검은색 의상 일색이었다.

사실 처음엔 다른 드레스를 골랐지만, 가족들의 의상을 본 루시엘도 검은색으로 다시 골라 입었다.

벨슈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기도 하니까.

솔리아페와 루시엘은 검은색 실크 드레스 위로 우아한 진주 목걸이를 착용해서 정말 모녀처럼 보였다.

검은 슈트 위로 붉은색 셔츠를 차려입은 공작과 하얀 셔츠가 정갈한 키제프도 검은색 착장이 다른 느낌으로 무척 잘 어울렸다.

저 찬란한 금발과 붉은 눈이 한몫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몹시 화려한 외모니까 검은색을 입었을 때 가장 외모가 빛을 발했다.

“이제 가지.”

네 가족이 단란하게 황성에서 보내 준 마차에 올랐다. 공예품도 단단히 실어 두었고, 엘링턴이 직접 지키기로 했다.

벨슈타인의 호위와 시녀들이 탄 말과 마차가 길게 뒤따랐다.

시내는 거리마다 문학 살롱을 기념하는 연극과 음유시인들의 연주가 들려왔다.

다각다각.

아르테의 광장과 거리를 지나 마차가 한참 내달린 끝에 드디어 황성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성문을 통과하자 일곱 개 가문의 깃발과 황성의 깃발이 곳곳마다 나란히 걸렸다.

황성의 너른 정원은 문학 살롱에는 초청받지 못해도 연회라도 참석하기 위한 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마차는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는 대접견실로 곧장 향했다.

벨슈타인 가문의 휘장이 확인되니 곧바로 통과가 가능했다.

“벨슈타인 공작 가문 도착했습니다.”

이어 벨슈타인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황실 시종이 목청을 돋워 외치자, 이내 황금색 월계수가 새겨진 접견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장내의 정적에 루시엘도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심호흡했다.

저만치 대리석 계단 위로 금색 카펫이 깔려 있고 황좌가 보였다.

황제와 황후, 그 옆에는 황자와 황녀가 자리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눈부신 황금빛이 아른거렸던 터였다.

가장 먼저 앞장서서 공작과 솔리아페가 발을 가볍게 내디뎠고, 그 뒤를 키제프와 루시엘이 따라 걸었다.

“제국에 무한한 광영이 있기를. 벨슈타인가에서 인사드립니다.”

“오, 벨슈타인 공작! 얼굴 한번 보기 어렵군. 와 주어서 고맙소, 어서 오시오.”

공작의 인사에 노이슈반 황제가 자리를 들썩이면서까지 반가움을 표했다. 이사벨 황후는 미소를 머금으며 점잖게 말했다.

“벨슈타인 가문에서 이렇게 단란한 네 가족이 참석하는 일은 처음이로군요, 고맙습니다.”

“뜻깊은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기쁩니다, 황후 폐하.”

이번에는 솔리아페가 우아하게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과거 황태자비 경연에서 한차례 인연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도리어 아직 옛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솔리아페를 보고 눈이 커진 노이슈반 황제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벨슈타인 공작 부인께서는 어찌 세월도 비껴가…… 아, 아니 오랜만이오.”

“예, 폐하.”

말이 불필요하게 길어지자 서슬 퍼런 공작의 눈빛을 일순 느낀 모양인지 황제는 말을 얼른 바꾸었다.

“귀한 자리에 초청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이어서 키제프, 루시엘도 예법에 맞게 인사하자 황후의 눈빛이 사뭇 부드러워졌다.

“공자와 공자비로구나. 듣던 대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황후가 그리 말하면서 너그러운 미소를 보내자, 잠자코 있던 클로디아 황녀도 반가움에 방긋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른 루시엘에게 달려와 인사를 하고 싶지만 꾹 눌러 참는 것이 보였다.

“……정말 귀여운 부부가 아닌지요.”

클로디아의 칭찬에 황제와 황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도 수줍은 듯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드디어 클로디아 황녀님을 다시 만났어. 곧 만나요.’

이내 황자가 뚫어지듯 루시엘을 바라보자 키제프가 불편한 표정으로 몸을 살짝 틀어 그 시선을 슥 차단해 버렸다.

루시엘은 곁에 있는 키제프의 행동에 안심하면서도 스스로를 다잡았다.

‘드디어 황성이야. 정신 바짝 차리자, 루시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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