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그 계집애, 레시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하던데…….”
“차라리 방을 뒤져 보는 게 낫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마나 영양제의 레시피라니……. 발모제 따위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약이지.”
“일이 잘되면 황성 약제사쯤은 따 놓은 당상이지? 그럼 그 다른 약 개발한 거는 나 줄 거지?”
“그래. 일단 레시피부터 구해 오고 이야기하지?”
“쳇, 알았어. 걔 룸메이트부터 꼬셔 볼게.”
숙소로 돌아오던 시클라인은 복도에서 들려온 대화에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응시자와 피터의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시클라인은 입술을 사리물고는 복도의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아가 마님 말이 맞았어. 레시피를 도둑맞지 않게 조심해야 해.’
역시 아까 그가 접근해 왔던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
다행히 방 안과 실기 연구실에는 적어 놓은 레시피도, 약초도 모두 치워 놔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제 룸메이트까지 포섭한다면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레시피를 훔쳐 가려 한다고 고발할 수도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린킨스 자작 가문은 이쪽에서는 입김이 세니, 피터는 징계를 받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우선은 레시피를 지켜야만 해.’
시클라인은 가방을 움켜쥐고 연구실로 달려갔다. 체온을 일시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마이토린 약을 먹고 의사에게 가서 열병 소견서를 받았다.
최근 전염 중인 열병 환자가 많아서 의사도 곤란을 겪고 있는 터라 별 확인 없이 소견서를 발급해 주었다.
시클라인은 그 즉시 응시자 기숙사 관리소를 찾아갔다.
“……응시자 34번, 시클라인 레니트입니다. 기숙사 방을 단독 사용하고 싶습니다.”
“자네만 단독 사용을 허락해 줄 수는 없네.”
“제가 유행하는 열병에 걸려서……. 어찌나 독한지 약으로도 안 되더라고요.”
시클라인이 다 비운 약병을 짤랑짤랑 흔들고 소견서를 내밀자, 소장이 찌푸리면서 코와 입을 헝겊으로 가리면서 1인실을 내어주었다.
* * *
“아버지, 어머니! 저 좀 제발 내보내 주세요. 황성 살롱에 가야 한단 말이에요!”
쾅쾅!
쾅쾅쾅!
페넬로페가 문을 두드리며 외쳤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여기서 나가야 일이 될 것 같은데. 페넬로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공자비 계집애에게 문학 살롱에 꼭 가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겁쟁이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어떡하면 좋지?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해.”
페넬로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닐즈 외숙모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아버지의 마음까지 완전히 돌아섰다.
황성으로 가는 길이 이대로 영영 막히게 되는 걸까?
“안 돼!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페넬로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왜인지 온통 붉은색 천으로 단장한 마차가 저택 앞에 서 있었다.
거기서 검은색 베일을 쓴 귀부인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호위는 물론, 카빌 후작가의 모든 시종마저 그녀를 경애하듯 납작 엎드렸다.
깊은 늪처럼 짙은 암녹색 머리카락, 고혹적인 붉은 입술을 가진 여자가 고개를 들어 페넬로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기묘한 신비로움을 가진 여자였다.
꼭 책에 나오는 마녀처럼.
페넬로페는 심장이 조여서 그만 아래로 몸을 푹 수그렸다.
저 여자라면 왠지 자신을 여기에서 내보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쾅쾅!
“누구 없어?”
페넬로페는 다시 문으로 달려가서 두드렸다. 보다 못한 시녀가 달려와 말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절대로 열어 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죄송해요.”
“알았으니까, 방금 도착한 그 여자 누구야?”
“……잠시만요. 알아보고 올게요.”
페넬로페가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시녀가 답을 가져왔다.
“발루크 후작 부인이라고 합니다.”
“……발루크?”
“예, 아주 규모가 큰 상단을 이끄는 가문이라고 하는데요. 잘은 모르지만 주인님의 새로운 사업 파트너가 아닐까요. 그럼 이만…….”
페넬로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 벨슈타인 공작 부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혼쭐이 났기에 방에 갇혀서 강제로 귀족의 계보도를 공부 중이었다.
타이라 제국에 공작은 둘뿐이지만 후작은 수십 명에 달해서 다 외울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짚어 발루크 후작가를 찾아보던 페넬로페가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만둬 버렸다.
잠시 후 페넬로페의 방문이 열렸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찾으시네요.”
“정말?”
페넬로페는 신나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까 마차에서 내린 그 귀부인이 저를 부른 것인가 싶었던 터였다.
구석에서 페넬로페를 지켜보던 레이븐이 스르륵, 카빌 후작의 서재로 함께 이동했다.
‘아까, 그건 뭐였지.’
아까 그 여자에게서 아주 익숙하고도 기분 나쁜 기운이 끼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죽음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카빌 후작이 다가온 딸 아이에게 말했다.
“페넬로페, 황성 문학 살롱에 다녀오거라.”
“네, 지, 지, 진짜로요? 아버지, 감사해요!”
페넬로페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카빌 후작에게 와락 안겼다. 제 예상이 맞았다. 아까 그 기묘한 여자가 자신의 진짜 동아줄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빌 후작은 이내 씁쓸한 얼굴이었다.
줄줄이 빠져나가는 자금들 때문에 돈을 융통하기 위해서 수소문을 했지만 카빌에게 손을 내미는 곳이 없었다.
한데 큰 상단을 운영하는 발루크 후작가에서 선뜻 큰돈을 빌려주겠다고 도움의 손길을 뻗쳐 왔다.
더욱이 황성 문학 살롱에도 초청받았다는 말에 제 딸아이도 염원하는 자리라고 하니 선뜻 데려가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발루크 후작 부인은 마차에 먼저 올랐으니 너도 따라서 가면 되겠구나.”
“아, 드레스랑 짐도 싸야 하는데 지금 당장이요?”
“카빌 후작가의 영애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지?”
“알아요. 발루크 가문의 소속으로 가는 거겠네요?”
“그렇단다. 부인이 곁에서 잔심부름을 도와줄 아이가 필요하다고 하니…….”
페넬로페가 펄쩍 뛰었다.
“……네? 잠깐만요. 혹시 저더러 시녀처럼 잔심부름 노릇을 하라고요?”
“……살롱을 그저 구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느냐?”
“아, 제 마음도 모르시면서……. 제가 시녀로 가면 무슨 소용이에요.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시녀를 하면 좋으세요?”
속상한 얼굴로 페넬로페가 징징거리자, 카빌 후작이 다시 말했다.
“크흠, 그냥 안 가면 안 되겠느냐?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가야겠어?”
“……흐흑.”
눈물을 터트린 페넬로페가 눈물을 다시 닦고는 아버지 손을 흔들었다.
“차라리 수양딸처럼 그냥 말동무를 해 줄 아이로 데려가 주면 안 되냐고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끄흐음. 있어 보거라. 내가 다시 확인하고 오겠다.”
“저도 갈래요.”
카빌 후작이 페넬로페를 데리고 발루크 후작 부인을 만나 다시 물었다.
“부인, 외람된 말씀이오만 우리 딸애를 그저 말동무로만 데려가는 것이 어떠시오? 우리 애가 귀하게 자라 잔심부름 같은 것은 전혀 하지 못해서 말이오.”
“맞아요. 제가 말동무는 잘해 드릴게요.”
두 부녀를 마차에서 내려다보던 발루크 후작 부인이 페넬로페의 말에 베일 너머로 입꼬릴 올려 웃었다.
자애로운 얼굴이었는데도 어딘가 섬뜩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무언가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영애에게 일을 시킬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자식이 없어 적적한 차에 그저 말벗이 필요했고, 어린 영애에게 황성 구경을 시켜 주려는 것뿐이니까요.”
발루크 후작 부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제게로 훌쩍 다가온 페넬로페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 매만졌다.
페넬로페는 그녀의 손이 놀랄 만큼 차가워서 깜짝 놀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진한 향수 내음도, 값비싼 보석도 이미 페넬로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터였다.
“바로 타고 가겠니? 널 위한 드레스는 가는 길에 시내에 들러 사 주마.”
“저…… 정말이세요?”
“……아,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카빌 후작은 혹여나 발루크에 상환할 대금이 더 늘어날까, 염려스러워 말했다.
“괜찮습니다. 영애가 귀여워 사 주는 것이니 드레스 가격은 상환하라고 하지 않을게요. 늘 이런 딸이 있었음 했어요.”
발루크 후작 부인이 사연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허, 이토록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고맙소. 발루크가 우리 카빌에게 베푼 은혜는 내 반드시 갚겠소.”
카빌 후작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모두가 카빌에 등을 돌린 지금, 손을 내민 것은 발루크뿐이었다.
“아버지, 저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오거라. 페넬로페.”
페넬로페가 카빌 후작에게 안겼다가 이내 마차 위로 폴짝 올라탔다.
페넬로페는 벌써 그녀의 딸이라도 된 양 신난 얼굴로 발루크 부인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후작은 페넬로페의 시녀와 호위 기사에게 따라가라 명하고선 돌아섰다.
“참 묘한 마력을 가진 여자로군.”
발루크 후작 부인과 페넬로페가 떠나자 카빌 후작은 정말로 무엇에 홀린 것처럼 자신이 움직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발루크 후작 부인을 만날 때마다 늘 꿈꾼 듯 몽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큰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발루크 후작이라면 큰 상단을 운영하고 있으니, 그만한 여유가 있었겠지.
덕분에 페넬로페의 소원도 성취시켜 주었으니 됐다 싶었다.
붉은색 마차는 다각거리며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때 외출에서 돌아온 카빌 후작 부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제집에서 멀어지는 붉은색 마차를 보고 의문을 품은 그녀가 물었다.
“여보, 저 마차는 뭐예요?”
“발루크 후작 부인이라고 아주 고마우신 분이야. 저분 덕에 위기를 모면했고, 우리 페넬로페까지 황궁 문학 살롱에 데려가 주신다는군.”
“……네? 돈을 빌려준 건 고맙지만, 페넬로페를 왜요?”
“발루크 부인이 아이가 없어 우리 페넬로페를 귀여워하더군.”
“맙소사, 당신…… 제정신이에요? 낯선 사람에게 딸을 덜컥 보낸다고요?”
“발루크 상단 몰라? 제국을 주름잡는 큰 상단이라고. 상단권리증까지 다 보았어! 뭣 모르는 소리 말고 이만 들어가자고.”
카빌 후작 부인은 울상을 지으며 마차를 바라보다가 남편을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