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쿠란티엘이 키제프의 스승이 되어 훈련에 집중하는 나날이 거듭되었다. 때문에 레이븐은 그와 연결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쿠란티엘은 키제프의 정신과 이어진 수양을 자주 하는데 지난번에 그의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그야말로 사탄 취급을 받으며, 호되게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레이븐은 그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제자에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겁니다.’
서늘한 눈빛으로 경고하던 쿠란티엘은 이내 성스러운 드래곤의 가호 마법까지 키제프에게 걸었다.
뭐, 그렇게 한다고 해도 어둠의 속성을 발현한 키제프이니 접촉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둘이 거의 붙어 있으니, 키제프와 만날 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계약자를 못 만나는 사신도 있냐고!’
그야말로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 키제프는 그랬지.
‘당분간은 얌전히 그냥 기다려 줘. 이게 다 우리를 위해서니까.’
뭔, 알 수 없다는 소리만 늘어놓더니 곧 스승 곁으로 돌아갔다.
불만 가득한 레이븐은 초콜릿을 먹어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검은 연기 상태로 공작성을 배회하던 레이븐은 도도도 바쁘게 달려가는 자그만 은발의 아이를 보며 슬며시 입매를 올렸다.
아이에게는 더 강한 성스러운 기운이 있었지만, 방해하는 이가 없으니 상대는 할 수 있었다.
스슷.
레이븐이 모습을 드러내자, 루시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안녕. 내 계약자의 계약 신부님. 아, 호칭으로 명명하니까 우리 사이는 진짜 애매하긴 하다. 그치?”
“……레이븐?”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
방긋 웃는 레이븐을 보며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제프 말고 나에게 볼일이 있는 거야?”
“……그 녀석한테 지금 난 접근 못 하거든. 그러니까 네가 대신 초콜릿 좀 주라.”
“……뭐? 그건 어렵진 않지만 내가 두 번 살아 보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
“……뭐, 뭘 원하는데.”
짧은 순간이지만 루시엘의 눈이 초롱이며 자신을 스캔했다.
“레이븐은 검은 연기가 변하면 어디든 갈 수 있어?”
“그거야 뭐. 갈 수는 있는데 계약자인 키제프의 곁을 벗어나면 아주 오래는 곤란해. 이거 엄연히 명부에 소속된 몸이라고.”
루시엘의 귀가 쫑긋해졌다.
“그렇구나. 좋아. 일 이야기는 내 별장으로 가서 이야기하고, 우선 주방에 가서 초콜릿 가져올게.”
루시엘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레이븐은 뭔가 저 조그만 애한테 말린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당은 충분히 채워 줘야 하니까.
이내 루시엘의 별장 테이블 위에 초콜릿 천국이 가득 펼쳐졌다.
파베 초콜릿부터 크런치가 든 것, 크림이나 견과류, 과일이 들어간 초콜릿 등 어림잡아 백여 개도 넘는 초콜릿이 풍기는 단내에 레이븐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끝판왕은 가나슈 크림이 가득 올려진 초콜릿 케이크였다.
입을 채 다물지 못한 레이븐이 루시엘의 주방 권력에 찬사를 보냈다.
“와, 루시엘 최고. 아니, 루시엘 님 최고!”
“……역시 남자애들은 다들 초코를 좋아한다니까.”
루시엘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동그란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는 오늘 자 제국신문을 펼쳐 보았다.
필기시험 합격 명단에 시클라인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걸 확인한 루시엘이 중얼거렸다.
“좋았어.”
우물거리면서 당분을 가득 채운 레이븐이 금빛 눈동자를 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루시엘은 간단하게 말했다.
“내 정보원이 되어 줘.”
레이븐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나더러 네 수하가 되라는 거야? 계약자도 아닌 인간의 말을 내가 들을 것 같니?”
“수하가 되라는 게 아니라, 협력을 도모하는 거래를 하자고 하면 될까?”
“이래 봬도 나는 꽤 바쁜 몸이란 말이다. 응?”
“……그런 거치곤 꽤 한가해 보여서. 뭐,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을게. 초콜릿은 그럼 치울까?”
루시엘이 테이블보 끝을 붙잡았다. 이걸 당기면 그대로 초콜릿이 우당탕 바닥으로 다 쏟아질 터였다.
“……이봐, 자, 잠깐만. 나 고민하고 있잖냐.”
레이븐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는 황홀한 단맛을 먹고 있었다.
사신인 제게 유일하게 허락된 쾌락이 바로 이 달콤한 맛을 느끼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먹고 싶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으니 말이지.
루시엘이 금박 상자에 싸인 프랄린 초콜릿을 열어 보였다.
“대가는 초콜릿. 원하는 만큼 또 줄게.”
레이븐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과는 루시엘의 승리였다.
“뭐,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정보원이 하는 일 그대로. 몰래 가서 보고 들은 걸 내게 알려 주면 돼.”
“무슨 정보를 구해 오라는 건데. 나는 정보 길드 같은 거 아니거든?”
루시엘이 말했다.
“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어. 키제프의 곁을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 동안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뭐, 제국 전역은 가능하지. 다만, 시간은 보름 정도.”
“정말? 레이븐은 순간이동도 되고, 남들 눈에 띄지도 않잖아. 정말 정보원에 완벽하게 부합된다.”
“……그, 그래?”
루시엘이 감탄하며 칭찬하자, 레이븐의 귀가 팔랑거렸다.
“우선 가장 먼저 해 줄 일이 있어.”
“뭔데?”
“알아봐 줄 사람이 있어.”
루시엘의 진홍색 눈동자가 깊어지며 레이놀드를 떠올렸다.
클로디아 황녀에게 한 방 먹고 계획이 틀어졌으니, 잠잠해진 지금쯤 레이놀드가 무언가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기간은 일주일 정도. 레이놀드 황자의 근처에 누가 있는지, 그가 누굴 만나는지 알아봐 줘.”
“음…… 과거에 널 괴롭게 만들고 벨슈타인을 망하게 한 그놈 말인가.”
레이븐은 루시엘의 과거에서 보았던 그 악랄했던 자를 떠올렸다.
“맞아.”
“그런 거라면 나보다는 황성에 세작을 심어 두는 게 나은 거 아닐까?”
“시아빠께서 따로 손 쓰실지도 모르지. 그래도 정보는 많아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러니 나를 요긴하게 사용하시겠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일주일 만에 뭐가 걸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가 보지.”
“잘 부탁해, 레이븐.”
루시엘은 싱그레 미소 지었다. 절로 굴러들어 온 정보책이 반갑기도 했다. 이번 일에 성과가 없더라도 앞으로 그를 보낼 곳은 많을 테니까.
‘이번 일을 다녀오면 더 꼬셔 보아야겠어.’
* * *
“각하, 지난번 사일런트 아일랜드 건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토지매매업자의 말로는 섬을 둘러볼 수 있는지 문의가 한번 들어왔다고 합니다.”
엘링턴의 보고를 듣고 있던 공작의 눈썹이 느릿하게 움찔 올라갔다.
“그렇단 말이지. 매수를 시도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봐.”
루시엘이 추천했던 섬이었기에 공작도 매수하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다만, 급한 건은 아니었기에 다음 달에 매입하려던 중이었다.
알아봐서 섬을 둘러본 곳이 카빌 가라면, 미리 매수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카빌이라면, 호크아이 측에서 언질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엘링턴의 추측에 공작도 같은 생각이었으나, 매수 전 둘러보기만 한 것뿐이니 호크아이에서 주목하지 않거나 놓쳤을 수도 있었다.
“섬은 어떻던가?”
“지난번 둘러본 바로는, 상당히 외진 곳이긴 합니다만 경관은 기가 막히더군요. 바다를 보는데 말이 안 나왔습니다. 휴양지로 다녀오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그래? 애들을 데려가면 좋겠군.”
“가족 여행 가기 전에 마님과 다녀오셔도 좋은 추억이 되실 겁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옛, 아, 그리고 호크아이 측에서 헨드릭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마검에 대한 리스트를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합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요.”
“완벽은 바라지도 않지. 곧 확인할 수 있겠군. 그리고 황실에 우리 사람도 슬슬 심을 때가 되지 않았나. 장차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면 말이지.”
루이비드가 씩 입매를 틀어 올리고 나선, 여름용 얇은 외투를 걸쳤다.
나갈 준비를 하는 주군을 보고 엘링턴이 서류를 챙겨 뒤따르며 물었다.
“……정무궁으로 곧장 가실 요량이십니까? 오늘은 회의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아니, 약속이 있다.”
“약속이요? 외부 미팅입니까?”
다른 보좌관에게 각하의 일정을 따로 전해 들은 것이 없어서 엘링턴은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다.
“아내와 약속.”
“……오오. 축하드립니다, 각하.”
“내가 내 아내와 약속 생긴 게 왜 축하받을 일이냐.”
“아, 아뇨.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
엘링턴은 큭 웃음을 참다가 돌아오는 살벌한 시선이 날아들자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통신구가 빛났다.
“아이고, 일이 끝없이 밀려드는군.”
엘링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가 상대가 누군지 알고는 곧 화색이 돌았다.
―엘링턴 자넨가? 내일 한번 공방에 와 보든가.
“갈리우스 백작님! 오, 드디어 공예품이 어느 정도 되었을까요?”
―그건 와서 확인하게. 이만 끊겠네!
―아, 저, 저기요? 백작님……?
아가 마님이 기다리는 소식이니만큼, 어서 뭐라도 보고하려고 했으나 이미 통신이 끊긴 상태였다.
제멋대로인 점은 여전하지만 그가 통신을 보냈다는 건 분명히 무언가 보여 줄 것이 있다는 소리였다.
‘괜히 큰소리칠 위인은 아니라는 거지.’
하여간 콧대 높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진이 다 빠지는 듯했다. 엘링턴은 루시엘에게 어서 이 소식을 알려 주러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