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나의 작은 벗, 루시엘에게.
오랜만이에요. 황도는 푹푹 찌는 더위로 다들 고생이랍니다. 벨슈타인 공작령은 한여름에도 선선하겠지요?
국무회의에서 성공리에 발언을 마쳤다는 짧은 쪽지만 보낸 후, 아무 소식이 없어 궁금했지요?
그 후로 정말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거든요.
우울증 치료사 양성 사업을 대신들과 함께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생각보다 마법 인형을 원하는 수요가 더 많아서 마법사 제르다가 꽤 곤혹스러워하고 있지만요.
폐하와 대신들 앞에서 그날 좋은 모습을 보인 덕분에 여러 가지 수업도 잔뜩 늘었답니다. 정치, 지리, 역사, 경제, 그리고 제왕학까지.
예상대로 메이플 소유권을 조건으로 내걸고, 월계수 맹약을 해 달라 하니 메이너드는 공식 청혼서조차 보내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누가 소문낸 것인지 다들 클로디아 황녀에게는 심사숙고하여 황금 같은 조건으로 청혼을 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네요. 혼삿길이 막히는 것 같지만 나쁘지 않아요.
레이놀드도 그 후로 공식 석상에 모습도 비치지 않았고요. 덕분에 요즘 내 속이 다 편안해요.
조심스럽게 다음 주에 열리는 여름 문학 살롱의 초청장을 함께 동봉할게요.
어서 만나고 싶어요, 루시엘.
―루시엘의 키다리 언니, 클로디아」
그물 해먹에 누워서 클로디아의 편지를 전부 읽은 루시엘은 미소지었다.
“클로디아 황녀님, 잘하고 계실 줄 알았어. 제왕학 수업을 듣게 되신 건 좋은 신호인걸.”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간 루시엘은 무엇보다 솔리아페의 치유를 돕는 일에 가장 힘을 쏟았다.
일주일에 세 번씩 신전에 가서 성수를 얻어 솔리아페의 치유를 도왔고, 마침내 어제 주치의로부터 솔리아페의 마나리스가 완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미리 가뭄을 대비한 덕분에 워터 드래곤의 종자도 잘 들어왔고, 영지민들은 모두 어려움 없이 여름을 보내고 있다고 베르가 자작에게 들었다.
‘이제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다른 일들을 신경 써야지.’
잠시 지연되었던 에리카의 연구 결과도 슬슬 나올 때가 되었고.
이번에 그녀에게 연구를 맡긴 보석들은 분홍색의 스피넬, 연두색의 페리도트, 검은색의 옵시디언이었다.
이제 어떤 감정으로 그 보석들을 만들어 냈는지 경험이 있기에 명확히 알게 됐다.
페리도트는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경이로울 때 만든 기억이 있었다.
옵시디언은 원래도 잘 아는 고통으로 만들어 내는 보석이었고.
스피넬은 설렘. 이건 이상하게 키제프와 있을 때만 만들어지는 게 특이했다.
순간 처음으로 스피넬을 만들었던 때의 키제프의 얼굴과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보석이든 꽃이든, 네가 뭘 만드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이젠 달아날 생각 하지 마. 내 눈에서 벗어나면 결혼반지 타고 쫓아갈 거니까.’
루시엘은 이내 볼이 붉어지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다시 생각해도 생크림처럼 달콤하고 귓가에 감기는 말이었다.
‘……그런 말은 적어도 진짜로 좋아하게 되었을 때 하는 게 좋잖아. 바보 키제프.’
루시엘은 남자들이 달콤한 말을 한다고 해서 전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황태자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도 사랑을 속삭일 때는 무척 달콤했다.
지난번 몰래 보았던 연애 소설에서도 달콤한 말로 고백하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소녀의 이야기가 나왔다.
‘모르겠어, 아직 그런 건…….’
루시엘은 그만 털어 버리고, 보석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이번 보석들의 연구 결과는 더욱 기다려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을 믿는 강한 마음으로 만들었던 그 아름다운 보석.
과거의 나약했던 루시엘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올랐던 그 마음이 생각나 아직도 두근거렸다.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면서도 스피넬처럼 고운 분홍색을 가진 보석이었다.
지난번 각성 후에 새롭게 만든 보석은 그다음에 연구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황성의 문학 살롱에 가기 위해서 유리 공예품도 선보여야 하는데……. 아직 막스에게서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아주 촉박하네.”
응접실로 들어와 제국 달력의 날짜를 따져 보던 루시엘은 블루베리 주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화들짝 놀라 중얼거렸다.
“잠깐! 오늘이 그날 아니야?”
뜨개질을 하고 있던 베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가 마님, 무슨 날이요?”
“시클라인 선생님의 약제사 시험일이잖아!”
“어머, 오늘이었나요? 잘하고 오시겠지요.”
“응…… 그렇겠지?”
마나 영양제를 조제하는 레시피를 알려 주긴 했지만,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이 없었다.
그녀라면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루시엘은 제국신문을 집어 들었다.
「금일 황성의 약제사 필기시험이 열린다. 필기에 통과한 참가자는 열흘 뒤, 특별실기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진다.」
“앗, 오늘은 다행히 필기시험이구나. 실기가 열흘 뒤라면. 그 전에 시클라인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만나서 응원을 해 주고 싶은데 우선은 필기부터 합격하길 빌어야겠지만. 무엇보다 마나 영양제의 배합법을 잘 찾았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이제야 조금 한가해졌나 싶었을 때쯤, 별궁으로 에바가 마도사와 함께 찾아왔다.
“아가 마님, 오늘은 여유가 되신다고 해서 지난번 계좌 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왔어요.”
“아…… 막 여유롭지는 않지만 잠깐이면 되겠지요?”
“물론이에요. 개인 도장부터 만드시는 게 편하실 듯해 사무처리 마도사와 함께 왔답니다. 제가 이미 계좌는 개설해 두어서 마법 통장도 가지고 왔답니다.”
“좋아요.”
에바의 설명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명 대신 도장으로 쾅쾅 찍어 내면 편할 듯했다.
“좋아요.”
“그럼 아가 마님 도장부터 만들어 드리세요.”
마도사가 짧게 대답한 후, 도장을 어떻게 만들지 여러 가지 샘플을 보여 주면서 루시엘과 상의했다.
최종 만들어진 도장은 루시엘의 이름 옆에 토끼 얼굴이 조그맣게 들어갔다.
마도사는 캐스팅으로 금세 이름과 서명을 만든 다음, 단단하고 하얀 돌에 그대로 마법으로 새겨 넣었다. 도장마저 새하얀 눈토끼 모양이었다.
“와, 감사해요.”
도장을 품에 받아 든 루시엘에게 에바가 마법 통장도 꺼내서 건넸다.
“이게 바로 아가 마님 통장이에요.”
도톰한 황금색 통장을 열어 보자, 아직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제 마법 서명을 하시거나, 마법 도장을 찍고 통장을 완성하시면 된답니다.”
루시엘은 에바가 건넨 끈적한 보라색 인주에 도장을 골고루 묻힌 다음 서명란 빈칸에 꾹 찍었다.
귀여운 도장이 찍히는 걸 보곤 에바가 미소 지었다.
스르르.
이내 황금색 통장이 핑글핑글 돌더니 마치 처음부터 찍혀 있었던 것처럼 앞면에 루시엘의 이름이 황금빛으로 아로새겨졌다.
다시 안을 열어 보니 이벨린이 예전에 알려 준 금액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부티크와 아기 영지의 수익금, 루시엘의 몫으로 배정된 예산까지.
아기 영지의 과수원에서 나는 과일을 내다 파는 수익금도 제법 쏠쏠했다.
“신기해요.”
“이제 제대로 연결이 되었네요. 축하드려요, 아가 마님. 매일 정오에 한 번 현재 계좌 금액이 적용되니까 참고해 주세요.”
“네. 참고할게요. 두 분 고생하셨어요.”
‘왠지 나중에 유용할 것 같아.’
루시엘이 서랍 깊은 곳에 통장과 도장을 챙겨 두었다. 앞으로 이곳에 차곡차곡 재산을 불릴 계획을 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쪼록 이런저런 일을 도모하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하니까!
루시엘은 밝게 웃었다.
* * *
이른 새벽 기사단의 연무장에 도착한 키제프 앞에는 검술 스승 쿠란티엘이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올백으로 묶은 긴 잿빛 머리칼만이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견에 금속처럼 날카롭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형형한 눈동자와 전신에서 내뿜는 그의 위압감은 실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날개의 기사들도 쿠란티엘을 대면하는 걸 꺼리는 눈치였다.
순혈 드래곤이 아닌 쿼터였지만,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터라 실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아버지와 검은 날개의 대장인 자르가가 혀를 내두르며 그 실력을 칭찬할 정도였으니…….
“오늘은 어떤 훈련을 하고 싶으십니까.”
쿠란티엘이 물었다. 그는 언제나 키제프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을 하게 만들었고,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때 기합을 내렸다.
“정신 수련을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쿠란티엘은 자그만 물결 문양이 그려진 조약돌을 키제프에게 내밀었다.
키제프가 그걸 받아 돌을 문질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훈련장이 아니라 사방이 물에 잠긴 호수 같은 곳에 와 있었다.
이곳은 키제프의 정신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잡념을 갖자마자 수면 위로 파문이 거칠게 일었다.
‘곧장 이렇게 되고 말아. 이 수면을 고요하게 유지하면…….’
그야말로 초인적인 집중력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리되면 검술을 훈련하는 효과가 늘어날뿐더러 오러를 더 오래, 더 강하게 발현하는 것도, 새로운 검술을 익히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집중력이 발휘되면, 어디를 베어야 할지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였기에 미리 기초를 다져 두면 유용한 훈련이었다.
‘계속 단련하다 보면 좋은 무기가 되겠어.’
쿠란티엘이 첫 만남부터 강조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검술을 단련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정신을 수양하는 일입니다.’
루시엘의 적이자 벨슈타인의 적.
레이놀드 황자든 누구든.
끝장내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힘을 길러야 한다.
수면 위로 파문이 일면서 요동을 치자, 쿠란티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중력이 엉망인 상태입니다.”
“…….”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성공시켜 보십시오.”
“…….”
쿠란티엘 선생은 목검 하나 없이 뒷짐을 진 채로 늘 키제프를 상대했다. 분하게도 그동안 숱하게 실패했었다.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 말하던 그 애의 반짝이던 눈도.
‘누구보다 자신을 믿는 게 중요해. 다른 누군가가 너를 평가할 수 없게.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이야. 나도 그러니까 거짓말처럼 해냈어. 웃기지?’
‘누구보다 나를…… 믿을게.’
파도처럼 하얗게 일어난 수면이 들끓다가 이내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슷!
허공을 몇 번이나 가르던 검 끝이 드디어 처음으로 쿠란티엘의 목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