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침대에는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낯빛의 솔리아페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 있었다.
그 손 위로 루시엘이 자그만 손을 겹치자 냉기가 훅 끼쳐 놀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치던 그녀였는데 한순간에 이리되다니…… 허망하고 슬펐다.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루시엘의 뺨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졌다.
“어머님……. 흑.”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그녀의 병을 알고서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만약 정말 잘못된다면 남은 가족들은 이제 어떻게 봐야 하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라 루시엘은 절로 고개를 흔들었다.
루시엘의 눈동자 가득히 눈물이 고였다. 심장이 아프고 두근거렸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짙게 드리우자 루시엘의 마력이 심장으로 모여들며, 짙푸른 사파이어들이 생성되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박동.
파아아아!
또롱!
또로롱!
인어가 흘린 눈물이 이렇게 생겼을까. 슬픔의 크기가 커서인지, 오늘따라 사파이어가 더욱 영롱했고 모양도 눈물방울같이 길쭉한 형태였다.
루시엘은 덧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 마나를 끌어모아서 솔리아페에게 전해 주려고 했다.
피닉스의 장미에게 그랬듯이.
그러곤 자신이 만든 사파이어 보석을 솔리아페의 손에 살짝 쥐여 주었다.
‘혹시 이 보석이 그녀의 마나를 채워 주지 않을까?’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루시엘……. 걱정하지 마라. 솔리아페는 깨어날 거란다. 응?”
“할머니……. 제발…… 그랬음 좋겠어요…….”
이벨린이 루시엘의 자그만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러나 이벨린 역시 솔리아페의 미약해진 마나를 알아챘는지, 턱 끝이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루시엘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먹구름이 가득 낀 공작과 키제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린 공작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전부 내 잘못이다.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야. 아니, 처음부터 절대로 데려가는 게 아니었다.”
그라면 누구보다 솔리아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것을 방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뇨, 시아빠는 분명 힘껏…… 지켜 내셨잖…… 끄흑. 으허엉!”
잠긴 목소리가 쉬이 나오지 않다가 다시 울음이 아이처럼 터졌다.
아무리 회귀를 했어도 이런 슬픔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키제프가 말없이 루시엘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것은 금세 눈물로 가득히 젖어 버렸다.
하늘이 무너진 듯 희게 질린 얼굴로 공작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아까 그 주치의 놈이 수상하다. 마나가 소진되었다며 마나를 채워 주는 치료를 하고 약까지 먹였는데,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이지? 이놈을!”
씩씩거리면서 당장에 주치의를 죽이러 갈듯한 기세에 루시엘이 공작의 팔을 붙잡으며, 구슬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요. 주치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 의사 말대로 언제까지 비밀로 묻어 둘 수는 없어. 나라도 어머님을 대신해서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 해.’
루시엘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모두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
그때 가느다란 기척이 들렸다. 잠깐 정신이 든 것인지 솔리아페가 희미하게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솔리아페!”
“어머님!”
“얘, 정신이 드니?”
가족들이 동시에 그녀를 불렀다. 솔리아페가 파리해진 낯으로 겨우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모… 모두…… 미안해…… 나……! 고…… 주…… 죽을 거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솔리아페. 네가 죽긴 왜 죽어?”
이벨린이 며느리의 손을 꼭 잡았고, 루이비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깟 마물 따위에 당해 죽는다니……. 난 죽어도 당신 못 보내. 엘링턴이 곧 황도의 의사와 치료사를 데리고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만 버텨 봐.”
그러나 솔리아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나는 가망이…….”
“그런 말은 꿈에도 하지 마.”
한없이 나약해진 솔리아페와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루시엘은 생각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밖에 없어.’
그 현실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무엇보다 피닉스를 부활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을 텐데. 그러나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었다.
그러고 보니 다이아몬드를 가지러 마탑으로 가신 할아버지 역시 아직 깜깜무소식이었다.
솔리아페의 의식이 다시 가물가물하다 끊어지자, 가족들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루시엘은 솔리아페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는 결심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 드릴 수 없어. 뭐라도 해야 해. 아니,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야 해.’
루시엘은 눈물을 소매로 닦아 내고는 방문을 꼭 닫고 밖으로 나와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얏.”
무심결에 슬리퍼가 벗겨져 넘어졌다. 무릎이 쓸렸지만, 루시엘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뉴나…… 요기서 모해?”
어서 일어나서 가려는데 지금은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루시엘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직 엄마가 필요한 다섯 살배기 아이. 레오니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레오니는 엄마가 아픈지도 모를 텐데…….’
“뉴나?”
검은 토끼 인형 베니를 오른손에 끌어안은 레오니가 글쓰기 선생 리안델의 손을 이끌면서 루시엘을 불렀다.
루시엘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레오니의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아무것도. 그냥 산책 중이었어. 산책.”
루시엘이 미소 지으며 말하자, 관찰력이 좋은 레오니가 눈썹을 까딱 치켜올리며 루시엘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깐만, 히익! 다리 아야 하는데?”
“아, 정원에 가다가 잠깐 넘어졌어. 이제 괜찮아.”
레오니가 루시엘의 스커트 자락을 붙잡았다.
“다치면 안대. 시쿨라 선샌님한테 빨리 가자. 응? 선샌님, 맞지요?”
“어머, 그러게요. 어서 치료받으러 가셔요, 아가 마님.”
“네, 걱정 마세요. 레오니, 누나 치료받으러 갈게. 나중에 봐.”
“……안넝.”
레오니를 겨우 보내고 루시엘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린 레오니를 위해서라도 어머님은 내가 구할 거야.’
루시엘은 그리 결심하면서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리에 질끈 묶었다.
이윽고 다다른 곳은 온실 정원이었다. 여전히 봉오리를 꼭 닫고 있는 피닉스의 장미는 미동조차 없었지만, 루시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나마 솔리아페에게 차도가 있게 했던 것이 바로 피닉스의 장미가 아니었던가.
“제발…… 우리 어머님을 살려 주세요! 피닉스 님…… 네?! 흐흑.”
흐느끼는 루시엘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젖어 들어갔다.
‘어머님이 건강해지신다면 무엇이라도 할게요……. 제발, 제발!’
루시엘이 눈을 감고 기도하던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
‘죽지 마세요……!’
거대한 마나의 물결이 심장에서 목구멍까지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건……?”
화아아아!
순식간에 온실 정원을 가득 채워 버린 빛.
처음 보석의 힘을 각성했을 때도 이랬던 기억이…….
루시엘은 순간 몸이 온기로 가득 차오르면서 부웅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했다. 심장을 휘도는 바람도 느껴졌다.
강하고, 뜨거운.
하지만 그런 것 따위 모르겠다. 지금 오직 그녀가 바라는 건 솔리아페의 치유였다.
자신에겐 이렇게 넘쳐 흐르는 마나인데…….
‘이 모든 마나를 전해 줄 수만 있다면 어머님의 병도 치유될 텐데.’
또로로, 롱!
우수수수, 촤르륵.
데구르르.
이내 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갯빛 다이아몬드가 생성되었다. 길쭉한 물방울 형태의 다이아몬드. 지난번 만들어 낸 것과 다른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보다 작은 크기의 사파이어, 토파즈, 다이아몬드도 같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지난번과 같이 다양하게 컷팅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둥근 형태였다.
‘이것도 감정이 격렬해져서일까?’
루시엘은 커다란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지난번 것도 컸지만 이건 그것보다 더 커다랗다.
게다가 닿기만 해도 따스해지는 온기가 다이아몬드에서 뿜어져 나왔다.
루시엘은 어안이 벙벙해 바닥에 깔린 보석들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루시엘! 내가 왔다. 네 다이아몬드는 역시 귀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았단다!”
기쁜 낯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길리아트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루시엘?”
“할아버지이!”
다이아몬드의 힘을 조금 전 확인하고 돌아온 길리아트의 눈동자가 사과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와 바닥에 깔린 보석들을 보고는 몹시 커졌다.
“저, 아무래도 또 각성한 것 같아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머님이 죽어 가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네 보석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아뇨, 제 보석은 소용없었어요. 사파이어에 들어 있는 마력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세요. 제 마나는 이렇게나 많은데…… 이러다간 정말 어머님이……!”
조잘조잘 쉼 없이 이야기하는 루시엘에게 길리아트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 보석이 아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의 치유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따로 있단다. 어서 가자, 솔리아페를 치유하러.”
“……어떻게요?”
“가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렴. 우선 저 보석들도 가져가자. 다이아몬드는 강한 생명력과 치유력을 가진 것이 확실하니까.”
길리아트가 사물을 끌어당기는 마법을 사용해서 보석을 전부 로브 안쪽의 마법 포켓 안으로 집어넣었다.
루시엘은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슥슥 닦아 내고는 할아버지와 함께 다시 솔리아페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