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막시무스와 엉겨 붙어 있던 키제프가 방향을 비틀어 그가 맞게 유도했던 터였다.
깜짝 놀란 페넬로페가 버튼이 달린 조종기를 떨어뜨렸다.
“오, 오빠!”
한가롭게 팔짱을 낀 채 구경하고 있던 레이븐이 키제프에게 말했다.
「마법 쓰면 간단하게 해결될 걸, 왜 맞고 있는 건데?」
“지금은 마법 쓰기 좀 곤란한 상황이라. 네가 도와줄 줄 알기도 했고.”
연회로 인해 저렇게 사람이 바글거리는데,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도와주세요, 라고 부탁해 봐.」
“…….”
키제프가 질색했지만 이내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쯤 괴롭혔으면 됐다 싶었는지 레이븐의 눈동자가 갸름해지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막시무스를 향해 검은 연기를 뻗쳤다.
어느덧 형질이 달라져 흐물흐물 액체처럼 변한 그것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움직여, 막시무스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포박했다.
“으웁……!!”
겁에 질린 막시무스가 더욱 발버둥 치면서 몸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검은 액체는 로프처럼 더욱 팽팽하게 몸을 조였다.
털썩!
그걸 지켜보던 페넬로페도 놀라서 주저앉았다가 겁에 질린 채 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키제프는 잠자코 레이븐이 막시무스를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생긴 장난감을 만지는 어린아이처럼 레이븐은 막시무스를 더욱 겁주며 짓눌렀다.
이제는 막시무스의 눈에도 레이븐의 형체가 보였다.
레이븐이 막시무스를 향해 선득하게 웃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검은 머리 소년의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가 보이지? 난 사신이야.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
놀란 막시무스의 동공이 커졌다.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을까 봐. 입은 여전히 가로막혀 말할 수 없으니 고개만 맹렬히 저어 댔다.
레이븐은 명부로 쓰는 두루마리를 슥 꺼내더니, 막시무스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힐끔 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을 마주한 막시무스는 덫에 걸린 것처럼 하얗게 질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막시무스 폰 카빌, 15세. 부유한 후작가에서 자랐지만 망나니에 성격은 개차반이고, 음……너는 어떻게 살아도 지옥행이겠다. 인간쓰레기의 표본이랄까.”
촤르륵.
레이븐이 두루마리를 길게 펼쳤다.
“네 악행 목록, 길기도 하다.”
“우으읍!”
스슷.
미처 도망가지 못한 채 덜덜덜 떨고 있던 페넬로페의 발목도 레이븐의 검은 액체가 휘감아 버렸다.
“가긴 어딜 가. 오빠가 여깄는데.”
“꺄아악! 사, 사, 살려 줘!”
레이븐은 막시무스 옆에 페넬로페도 붙들어 놓았다.
막시무스와 페넬로페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듯 몸부림치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자그만 소녀가 다가와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레이븐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너로군.”
* * *
루시엘은 기분 좋게 일을 끝내고, 키제프를 찾으러 연회 홀에 나왔다가 이곳저곳을 헤매는 중이었다.
키제프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조금 걱정이 되어 이동 반지를 이용했다. 그러고 보니 페넬로페와 말할 때도 막시무스를 찾고 있다고 했었다.
이윽고 빛과 함께 도착한 후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루시엘은 의아함을 가득 품을 수밖에 없었다.
깊은 어둠이 느껴지는 낯선 소년이 키제프, 막시무스와 함께였다.
“루시엘.”
키제프가 얼른 루시엘에게 다가갔다.
“키제프,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잠깐, 얼굴 다쳤잖아.”
루시엘이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자, 입가에 흐른 피를 대충 닦은 키제프가 대답했다.
“이건 별거 아냐. 설명하자면 길어. 루시엘, 저 녀석 알아? 카빌 후작가의 장남 막시무스 폰 카빌. 네가 적어 놓은 명단에 들어 있던데.”
입이 틀어막힌 막시무스를 보자 루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를 리가 없지.’
막시무스 폰 카빌.
전생에서 루시엘을 괴롭히고 비겁하게 웃던 남편이 아닌가. 백치라면서 짐승처럼 함부로 대하고 무시했었다.
이번 생에서는 아무런 관계 없이 스쳐 지나가고 싶었던 인간.
루시엘은 그에게 괴롭힘당하던 과거가 잠시 떠올랐다. 당사자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아프고 분노가 밀려들었다.
자그맣게 말아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지만 드레스 뒤로 감추었다.
무어라고 변명을 해야 하는데, 루시엘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건…….”
루시엘은 떨리는 입술을 겨우 벌려 단어를 내뱉었다.
“아,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우연히 알게 됐어. 그 명단은 그, 그냥 내가 연습 삼아서 귀족 이름들을 적어 본 거야.”
루시엘은 대충 얼버무렸다.
복수 대상들을 적었던 걸 키제프가 보았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제 정체까지 알고 있는 키제프에게 더 숨길 것은 없지만, 지금 밝히기엔 상황이 애매한 것 같았다.
루시엘은 그제야 낯선 소년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피부로도 느껴지는 낮은 온도감과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어둠. 그리고 죽음의 냄새.
언제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었나?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데…….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저 사람은 누구야?”
“아…….”
키제프가 어두운 표정으로 침음을 삼키며 말하려는데 레이븐이 먼저 다가와 하얀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이 차가워서 루시엘은 조금 놀랐다.
“반가워, 꼬마 아가씨. 나는 레이븐이라고 해. 키제프 친구야.”
“아, 나는 루시엘이야. 당신은 정체가 뭐야?”
“음, 바로 알아채네. 역시 난 사람인 척하기 글렀나?”
레이븐이 목덜미까지 내려온 흑발을 넘기면서 싱긋 웃었다.
“난 사신이야.”
“사신……?”
“죽음에 이른 인간을 인도하는 자이지. 아, 너무 무서워는 마. 아무나 막 데려가는 거 아니니까.”
“……으응.”
쭈삣 털이 곤두설 만큼 차가운 감각과 죽음의 냄새가 풍겼던 건 그래서였을까?
그런데 루시엘이 어렴풋하게 상상했던 사신과는 이미지가 완전 달랐다.
그런 루시엘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레이븐이 히죽 웃었다.
“사신이 이렇게 미소년일 줄 몰랐지? 저놈에게 참교육 좀 해 주고 있었는데. 루시엘, 너라면 막시무스에게 어떤 벌을 내리고 싶지?”
“응……? 나?”
왜 그걸 묻는 것일까. 그보다 사신이라니, 키제프와는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
“그래. 이놈은 아주 나쁜 녀석이거든. 그래서 좀 혼내 주려고.”
“잠깐. 막시무스가 키제프 얼굴 저렇게 만든 거야?”
몹시 화가 난 얼굴이 된 루시엘이 막시무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곤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조그만 덩치에 작은 발이 제법 매운 모양이었다.
“으읍!”
“내 남편 괴롭히지 마.”
그 모습을 본 레이븐이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때려서야 아프겠어? 내가 복수해 줄까……?”
“그럼 아프게 때려 줘. 열 대 정도.”
레이븐이 루시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키를 낮추더니 루시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 바라는 게 그것뿐인가?”
“……무슨 뜻이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가까워진 거리에 키제프가 사이를 가로막고, 루시엘을 보호하듯이 제 곁으로 당겼다.
“루시엘. 이리 와. 저 녀석한테 일일이 상대해 줄 필요 없어.”
레이븐이 루시엘을 살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얗고 조그만 여자아이는 솜 인형처럼 보송해 보였다. 장래가 기대되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사랑스러움을 보태는 데 한몫했다.
“……키제프 녀석이 그동안 왜 나에게 소홀했는지 알겠군.”
레이븐이 놀리듯 웃자, 키제프의 양 귀가 붉어졌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쟤들은 내가 적당히 혼쭐내서 기억을 지워 보낼 테니, 둘은 이만 가서 데이트해라.”
“……시, 신경 꺼.”
키제프는 ‘데이트’라는 말에 반응하듯 귀와 뺨이 더욱 붉어졌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붙잡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후원을 빠져나와, 커다란 분수대가 흘러내리는 라일락이 핀 정원까지 다다랐다.
촉촉한 밤이슬, 살랑 불어오는 바람, 울어 대는 풀벌레.
“여기 앉아서 쉴까?”
“좋아.”
분수대에 걸터앉자 서로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키제프의 상처가 신경 쓰였다.
입안이 터진 것뿐 아니라 입술에서 피도 나고 뺨에도 긁히고 부은 상처가 있었다.
“예쁜 얼굴에 흉 지면 안 되는데.”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린 루시엘이 주섬주섬 딸기가 수놓아진 분홍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 상처가 생겼을 때 붙이는 작은 헝겊 파스와 동그란 고체 연고를 찾아냈다.
루시엘이 넘어져 무릎이 살짝 까졌을 때 베시가 시클라인에게 부탁해 준비해 준 거였다.
루시엘이 뽀시락거리는 동안 키제프는 그 하얗고 말랑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빛을 머금어서 그런가.
눈에 걸어 둔 마법을 해제한 루시엘의 보석안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반짝거리고 예뻤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모른 척하면서 키제프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괜찮은데…….”
“우선 여기로 얼굴 내려 봐. 아니면 여기 누워.”
루시엘이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키제프가 머뭇거리자, 루시엘이 그를 잡아당겨 눕혔다.
“……!”
조그맣고 연약한 줄로만 알았더니 루시엘은 제법 힘이 셌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 때문인지 무릎베개가 폭신했다.
루시엘이 힘들까 봐 키제프는 목에 힘을 뻣뻣하게 주고 있었다.
루시엘은 연고를 손에 묻혀 상처 부위에 발라 주고, 헝겊 파스를 꼼꼼하게 붙여 주었다.
“다 됐다.”
루시엘의 얼굴이 만들어 낸 그늘에 키제프는 숨을 잠시 쉬지 못할 것처럼 아득해져 눈을 감아 버렸다.
루시엘이 치료해 주는 동안, 키제프는 왠지 다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고
키제프가 파스를 매만지며 말했다.
“……고, 고마워.”
“응.”
그리고 루시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사신과 알게 되었는지, 분명 궁금할 텐데.
‘날 믿고 기다려 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