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갈리우스 님이 설계하신 성당이에요. 특히 저 여신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웅장하고 신비로운 것 같아요!”
“……그래서 할 말이 이것뿐이었나?”
갈리우스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는 듯 건조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지금껏 많은 칭찬을 받았을 테고 스스로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 듯하니 별다른 여흥이 없을지 몰랐다.
“아뇨.”
루시엘이 손으로 신호를 주자, 엘링턴이 성당 한곳에 마련된 검은 천들을 벗겼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곧 조명이 탁 켜지면서 그 속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갈리우스가 만들어 온 건축물을 축소시킨 조형물들이었다.
벨슈타인 영지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세비야 광장, 황성의 황금 거울궁과 대신전 등.
루시엘과 엘링턴도 내심 이번에는 그의 반응을 살짝 기대했지만, 갈리우스는 표정 변화는커녕 도리어 성을 냈다.
“아니, 쓸데없이 이것들은 다 무엇 하러 만들었지?”
그러나 루시엘이 준비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루시엘은 성당 예배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막스에게 손짓해 불렀다.
“제가 아니라 저 사람이 만든 거예요. 이브나크의 유리공예 기술자거든요.”
막스가 갈색 더벅머리를 긁적이면서 다가왔다.
“막스 하멜입니다. 저 스테인드글라스는 저에게 깊은 영감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선생님께 그 기법을 꼭 배우고 싶습니다.”
막스의 말에 갈리우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리공예라면 장식품이나 그릇을 만드는 기술자 아닌가? 어째서 건축가인 내게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운다는 거지?”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루시엘이 다시 나섰다.
“바로 그 의문 때문이에요. 일반 사람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유리공예로 쉽게 연결시키지 못하니까요.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리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건축물의 일부지만, 그걸 유리공예품으로 재탄생시킨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루시엘이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지자, 그제야 갈리우스의 눈에 호기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소유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 그렇게 된다면 스테인드글라스의 미가 대중에게 더 널리 퍼지게 되겠군. 발상의 전환이라는 건가?”
안경알 너머 갈리우스의 눈빛이 빛났다.
“맞아요. 저희는 갈리우스 백작님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유리공예품의 미래를 봤어요.”
루시엘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까지 유리공예품에 공을 들이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갈리우스는 루시엘을 먼저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치고는 그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보기 드문 아이였다.
“죽어 가는 이브나크의 유리공예를 되살릴 거예요. 그러기 위해 황성에 내놓아도 모두가 감탄할 유리공예품을 준비 중이었어요. 막스 씨는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고요.”
“예. 예전 유리공방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습니다. 발루크 상단이 유리 제품을 많이 내놓아 설 자리를 잃었지요. 그렇기에 저도 한 사람의 유리 기술자로서 자부심을 걸고, 진심으로 배워 보고 싶습니다.”
막스도 용기 있게 말을 보태 주었다.
“이브나크라……. 유리의 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었지. 그곳의 유리는 품질이 무척 좋았다. 발루크 상단이 찍어 내듯 만드는 것과는 차이가 크지.”
루시엘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안 그래도 발루크 상단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했는데, 갈리우스의 속내도 이렇게 듣게 되다니.
일이 술술 잘 풀려 가고 있었다. 루시엘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갈리우스 백작님은 현재 발루크 상단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하셨죠.”
“그렇다.”
엘링턴에게 전해 듣기로, 표면적인 상단주는 발루크 가문의 가주였지만 진짜 실권자의 정체는 철저히 가려져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는 건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거나 더 큰 부를 가졌다는 건데…….
루시엘은 잠시 상념을 마치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벨슈타인가의 후원을 받아 보시는 건 어떤가요?”
“……허허, 진심이냐? 가만, 그러고 보니 아가야, 너는 공작의 며느리라고 했지 않은가? 그것을 네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더냐?”
“음, 그건 제게 맡겨 주시면 반드시 벨슈타인 공작님께 허락받아 올게요. 액수는 제 마음대로 제안 드리기 어렵지만, 공작님께서는 손이 어마어마하게 큰 분이시니까 아마…….”
커다랗게 내비치는 아이의 배포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 자신감 있는 모습이 신통방통했다.
“얘, 너 이름이 무엇이냐?”
“루시엘 폰 벨슈타인이에요.”
“나이는 몇이고?”
“이제 막 열 살이 됐어요.”
“허, 거참 믿을 수가 없군. 열 살 아이에게 후원 제안을 받아 보다니…….”
갈리우스가 고개를 흔들자 루시엘이 수줍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조건은 막스 씨에게 스테인드글라스의 건축 기법을 전수해 주시는 거예요.”
“정말 그것 하나뿐이라고?”
“네. 그럼 다른 조건이 있어야 하나요?”
“아니, 아니다.”
갈리우스는 발루크 상단과의 조건을 떠올렸다. 후원의 대가로 총 세 군데에 건축물을 지어 주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아직 건축물 하나가 조건으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어 전혀 다른 설계로 건축하게 된 적도 있었다.
“후원 이야기는 공작과 직접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정말입니까?”
곁에 있던 엘링턴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사실 몇 년 전, 그가 발루크 상단과 손을 잡기 직전에도 벨슈타인가에서 공작성의 예배당을 의뢰하면서 후원 제의를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발루크 상단과 이미 논의 중이라는 답만 돌아왔었다.
벨슈타인 성의 규모는 엄청났기에 감히 오래된 부분을 보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돈은 둘째 치고, 그 일을 예술성과 결합시켜 제대로 마무리할 인재를 찾지 못했던 터였다.
그러나 갈리우스를 후원하며 연을 맺는다면 보수 이야기는 물론 영지의 다른 건물까지도 천천히 얘기를 꺼내 볼 수 있을 듯했다.
솔직히 갈리우스 같은 인재를 놀게 하는 건 그야말로 재능 낭비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아가 마님의 활약은 벨슈타인을 발전시킬 새로운 성취가 될 것이다.
* * *
성당의 예배당 벽 뒤에서 루시엘이 갈리우스를 만나는 걸 지켜본 키제프는 자신이 알던 그 아이가 맞나 싶었다.
루시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몰래 따라와 보았는데…….
반짝이는 것은 그 아이의 눈동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키제프는 돌아섰다.
예배당을 벗어나자 레이븐이 말을 걸어왔다.
「저 아이 때문인가? 요즘 나 못 나오게 막은 것 말이야.」
오랫동안 레이븐을 억눌러 온 탓일까.
그가 흩뿌려 대는 검은 기운들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내 야외로 나오자마자 그 기운들은 검은 연기가 되었다.
달빛에 비친 키제프의 늘어진 그림자를 통해서 이윽고 레이븐이 밖으로 나와 키제프 옆에 소년 형상으로 자리했다.
쭉 찢어진 황금빛 눈동자와 어둠처럼 내려앉은 흑발, 창백한 얼굴로 레이븐이 히죽 웃었다.
「언제까지 내게서 감출 수도 없는데 일부러 안 보여 준 이유는 뭘까.」
키제프의 어깨 위에 손을 걸친 레이븐이 옆에서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키제프는 레이븐이 이럴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에밀리아의 유령이 키제프를 만질 때도 산 자가 아닌 듯 비슷한 냉기가 느껴졌던 터였다.
“그냥 계약 결혼 상대야. 최대한 서로 피해 주지 않기로 했다고.”
키제프가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열세 살 소년의 마음은 금세 간파당했다.
「거짓말. 저 아이에게 관심 있는 거지?」
키제프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조용히 밤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부정은 안 하네. 하긴 넌 거짓말은 능숙하지 못하니까.」
키제프가 그를 돌아보며 뾰족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나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거야.”
레이븐이 앞장서서 걸으며 빙긋 웃더니 말했다.
「나만큼 너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야행성 맹수의 그것처럼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정말 키제프의 내면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그를 무시하고 후원까지 다다르자 막시무스가 섬뜩한 눈빛으로 키제프를 노려보며 풀밭에 앉아 있었다.
씩 비열하게 웃는 걸 보니 무언가 단단히 준비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결혼식 피로연회에 날 초청하다니, 간도 크네. 내 여동생을 시켜서 부르기까지 하고 많이 컸네? 이제 공자님 노릇 좀 해 보시겠다 이거냐?”
막시무스의 뒤로 삐거덕거리면서 나타난 목각인형이 순간 주먹으로 키제프의 얼굴을 가격했다.
퍼억!
“……!”
입안이 터지며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키제프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장난감을 가져왔군.”
전투용 목각인형은 실제 전투에 쓰이기보다는, 적에게 위협을 주는 용도였다.
그렇기에 돈은 많으면서 싸울 힘은 없는 자들이 쓰는 비겁한 방식이기도 했다.
수풀 뒤에 숨어서 바르르 떨고 있는 페넬로페의 붉은 머리칼이 언뜻 보였다.
막시무스가 하라는 대로, 그저 목각인형이 때에 맞추어 공격할 수 있게 버튼을 누르려 대기 중이었다.
“건방진 자식. 기억해. 너는 아카데미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막시무스가 기분 나쁘게 키득거렸다.
“아이고, 새신랑 꼴이 이게 다 뭐야? 이 꼴을 네 신부가 봐야 할 텐데 말이야, 안 그러냐?”
키제프의 미간이 좁아들며 물었다.
“물을 게 있다. 너, 루시엘을 알아?”
“루시엘? 그게 누군데?”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한 막시무스의 태도에 키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건가? 그러면 루시엘은 왜 이놈 이름을 적어 둔 거지?’
하긴 이놈뿐 아니라, 카빌 후작가 세 명의 이름이 다 적혀 있었다.
“몰라, 그딴 이름.”
“루시엘은 내 아내야.”
“아아, 진짜? 그럼 조금 알 것도 같은데?”
막시무스가 빈정거리며 키제프의 복부를 가격하려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타앗, 하고 주먹이 붙잡혔다. 평소보다 억세게 잡는 힘에 막시무스도 슬쩍 놀랐다. 저보다 근력도, 덩치도 작은 키제프였기에.
“페넬로페, 뭐 해! 눌러.”
순간 페넬로페가 앞도 제대로 못 본채 정신없이 목각인형의 공격 버튼을 마구 눌렀다.
퍽퍽,
목각인형이 상대를 마구 짓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넬로페가 겨우 눈을 뜨자 맞고 있는 건 키제프 공자가 아닌 제 오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