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93)화 (93/282)

<93화>

“잠깐만요. 제가 오르비아 영애한테 무엇을 또 잘못했다는 거지요? 저는 정말 친해지고 싶은 것뿐인데.”

페넬로페는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소맷자락에 찍어 내며 말했다.

“흐흑.”

“카빌 영애, 울지 말아요.”

그 눈물에 동요한 몇몇 아이들이 페넬로페를 가련하게 보았다. 하지만 루시엘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녀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저는 오르비아 영애가 아니에요. 이제는 벨슈타인 공자비라고 불러야 마땅해요. 결혼식 피로연에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건 벨슈타인의 명예를 일부러 낮추려는 의도인가요?”

루시엘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불순한 의도가 투명하게 보여서 웃음이 날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루시엘을 골탕 먹이려고 해 봤자, 페넬로페는 고작 열 살짜리 아이일 뿐이었다.

과거에는 자신을 두렵게 만들었던 영악한 아이가 이렇게 멍청하고 악의로 똘똘 뭉쳐 있는 아이였구나, 새롭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아, 아뇨, 그럴 리가 있어요? 그저 착각했을 뿐이에요.”

당황한 페넬로페의 열 오른 얼굴이 눈에도 보였다. 루시엘은 조금 더 약 올려 주기로 했다.

페넬로페가 그 나이치고 똑똑하고 영악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도 바로 멍청하다는 말이었다.

“벨슈타인의 피로연에 초대되었으면서 가문 이름을 착각하다니, 그 정도로 기억력이 안 좋나요, 카빌 영애?”

“…….”

페넬로페가 분하다는 눈빛으로 씩씩대면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저 망할 계집애! 감히 나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주변을 얼른 살폈다.

삼 층에는 어른이 없으니, 여기 있는 아이들만 조용히 시키면 될 터였다.

가뜩이나 아버지의 강요로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친한 척 굴었던 것인데 공자비가 되었다고 잘난 척 저를 무시하는 꼴이라니 얄밉고도 분했다.

지금은 이 화를 터트리고, 저것에게 분풀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뭐가 어째?”

페넬로페가 루시엘을 노려보며 다가가 손을 뻗었다.

당장 루시엘의 머리채를 잡아채려는데 다나와 마샤가 페넬로페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카빌 영애, 공자비 님께 무슨 짓인가요?”

“폭력은 나빠요!”

“이거 놔! 저 계집애가 나더러 멍청하다고 욕하잖아!”

페넬로페의 겉모습에 넘어갔던 다른 아이들도 그 패악질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갔다.

“무슨 소란이지?”

루시엘을 찾으러 다니던 키제프의 등장에 일순 주변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교류가 잦진 않지만 다들 키제프의 위압감이 일찍부터 남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다행히 페넬로페의 손에 머리가 붙잡히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루시엘은 몸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루시엘!”

“저, 저, 저거 다 연기하는 거예요! 내 손 닿지도 않았는데.”

페넬로페는 억울함에 외쳤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벨슈타인 공자가 나타나다니.

서둘러 루시엘을 일으켜 부축한 키제프가 페넬로페를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말버릇이 형편없는 걸 보아하니 수준이 알 만하군. 어느 가문이지?”

페넬로페는 입술을 꾹 닫았고, 곁에 있던 다나가 대신 대답했다.

“카빌 후작가의 페넬로페 영애래요.”

그러자 페넬로페가 다나의 팔뚝을 꼬집었다.

“아얏.”

“카빌 후작가라. 그것 참 절묘한 인연인데.”

키제프가 입매를 틀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어린 영애들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벌렸다.

뒤늦게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인지한 페넬로페가 애원하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 아뇨. 전 좋게 해결해 보려고 했던 거예요. 별일 아닌걸요.”

“그게 영애에겐 별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난 아니에요.”

이윽고 루시엘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자 잠자코 듣고 있던 키제프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비뚜름하게 꺾었다.

“맞는 말을 했는데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다니. 영애의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저, 고, 공자. 부탁인데 모른 척해 주세요. 진짜 제게 맞은 것도 아니잖아요.”

페넬로페가 뻔뻔하게 말했다.

과연 막시무스의 여동생다운 말이었다.

“여동생이라 다를까 했더니 그것도 아니군. 막시무스처럼 비겁하고 뻔뻔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어.”

키제프가 뿜어내는 어두운 기운에 페넬로페가 눈썹을 움찔하고 올렸다.

“뭐, 뭔 말이에요?”

“네 오빠를 찾고 있다. 그에게 후원으로 오라고 전해 줘.”

“우리 오빠는 왜 불러요?”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아, 네 오빠가 오지 않는다면 이 일을 빠짐없이 어른들께 알리는 것으로 하자. 어때?”

순간 공작을 비롯해 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퍼뜩 깨달은 페넬로페의 얼굴이 아연실색해졌다.

“그건 절대로 안 돼. 그럼 우리 오빠만 데려오면 된다고요?”

‘우리 오빠를 데려와서 뭘 어쩌려고?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래.”

그리 말한 키제프는 루시엘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아이들도 하나둘 페넬로페에게 멀어지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페넬로페는 눈을 부라리며 다른 아이들에게 협박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희들 여기서 있던 일에 대해 말하면 후회하게 될 거야. 알겠어?”

혼자 남은 페넬로페는 손톱을 잘근 씹으며, 아래층을 살폈다.

‘아, 짜증 나. 사람이 하도 많아서 오빠가 어딨는지 모르겠어.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

페넬로페는 우선은 제 부모님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버지, 어머니! 혹시 오빠가 어디 갔는지 보셨어요?”

“막시무스라면 볼일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수도에서 내려온 고위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다 제 딸이 온 걸 카빌 후작이 냉큼 다가왔다.

“페넬로페, 이 아비에게 할 말이 있지 않니?”

온후한 표정을 지으며 후작이 딸아이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그는 잠시 이야기하자는 듯 딸아이를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회랑으로 함께 가서 작게 물었다.

“그 일은 어떻게 되었지? 공자비는 만나 보았느냐?”

“아, 아뇨. 아직…….”

일을 그르쳤다고 하는 것보다는 아예 못 봤다고 하는 게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저기 마침 제 발로 오는구나.”

그때였다. 테이블을 돌면서 공자 부부가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카빌 후작은 드디어 공자비 계집애의 눈이 보석안이 맞는지 제 눈으로 확인할 기회라 생각해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페넬로페는 혹여나 아까 일이 탄로 날까 봐 홀 안에 들어가지 않고,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공자비 부부가 카빌 후작 부부와 눈이 마주칠 때였다.

“방문해 주셔서 기쁩니다, 카빌 후작이라고 하셨습니까.”

눈은 웃고 있지만 아이답지 않게 싸한 미소를 보내며, 키제프의 입술이 움직였다.

“예, 저희 가문이 벨슈타인의 초청을 받은 것은 처음이군요. 결혼을 축하드리오, 공자.”

카빌 후작은 이어서 자그만 루시엘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자신을 꼼꼼히 훑어보는 그를 보며 루시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내 눈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를 만나기 전에 미리 대비한 것이 있었다.

루시엘은 조금 전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할아버지, 눈동자를 바꾸는 마법을 걸어 주세요.”

“무슨 이유라도 있니?”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니까 너무 빤히 쳐다볼 것 같아서요.”

“그거야 네가 귀여우니 그런 거겠지만. 그 눈은 확실히 주목받겠지. 알았다.”

그렇게 길리아트에게 부탁해 조금 어두운 갈색 눈동자로 색을 바꾸었더니 이제 완벽하게 변신한 것 같았다.

역시나 카빌 후작의 얼굴이 무척 구겨지는 중이었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공자비의 눈동자가 보석안이 아니라 당황한 듯싶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페넬로페가 분명 반짝이는 눈동자라고 했었거늘.’

당장에 페넬로페에게 가서 물으려는데…….

순간 주변을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기운이 풍기더니 공작이 천천히 다가왔다. 루시엘 옆에 선 공작의 붉은 눈동자가 카빌 후작을 하찮은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그 위압감에 순간 바짝 숨을 죽였다가 다시 머리를 쳐드는 뱀처럼 카빌 후작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리오, 벨슈타인 공작 각하.”

카빌 후작의 인사에 공작은 그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훑어보았다.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듯한 태도에 카빌 후작은 속으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기막히게도 저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이런, 누구시더라.”

무안하고 불쾌함은 둘째 치고, 대놓고 공작의 냉대를 받자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모였다. 이런저런 수군거리는 말들이 오간 것은 당연지사.

“……저 정도면 초청을 받지도 않았는데 온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카빌 후작가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던데…….”

카빌 후작은 수치심과 억울함에 일그러진 표정을 겨우 유지하고는 대답했다.

“직할령에 소속된 이라 모르실 수도 있단 생각이 드오. 카빌 후작입니다.”

“예에, 저희는 분명 초청장을 받고 온 것이랍니다. 명단 확인도 마쳤습니다, 각하.”

후작 부인도 벌게진 얼굴로 주변 사람 다 들으라는 듯이, 초청장을 들어 보였다.

“아, 미안하군.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오.”

“그, 그럴 리가…… 명단을 확인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공작이 잠시 연회 담당을 맡은 행정관을 불러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에는 있었으니, 행정관을 나무란 후에 공작이 말했다.

“하지만 애초에 벨슈타인은 카빌가와 전혀 왕래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지……. 이제 와 뭘 어쩌겠나. 기왕 오셨으니 그럼 잘 즐기다 가시길. 실례하지.”

그 한마디에 연회에서 나갈 수도, 나가지 않을 수도 없게 되어 버린 후작 부인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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