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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92)화 (92/282)

<92화>

루시엘은 고개를 돌렸다. 눈에 들어온 쪽은 실내 분수대 근처에 자리 잡은 사교계 테이블이었다.

“키제프, 나 저쪽 구경 좀 다녀올게.”

“같이 가. 우린 부부니까. 인사 다닐 땐 함께 다녀야 한댔어.”

키제프가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밀었다가 키 작은 루시엘에게 맞추듯 그냥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런 말은 전해 듣지 못했는데 부부는 같이 다녀야 하는구나.’

어쩔 수 없이 손을 맞잡자 붉은 눈동자가 루시엘을 눈에 담았다.

시폰 소재의 여린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은 긴 은발을 반 묶음으로 가지런히 묶어 내려 하얀 레이스 리본으로 매듭을 지었다.

성숙한 스타일이지만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느껴졌다.

키제프가 루시엘을 힐끗 보며 말했다.

“오늘 머리 모양 잘 어울려.”

“……아, 베시가 해 줬어. 고마워. 키제프도 앞머리 내렸네?”

“응.”

루시엘의 언급에 키제프가 앞머리를 살짝 매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선홍빛의 모양 좋은 입술이 단정했다.

“이제 가자.”

“응.”

사교계 테이블에는 잘 차려입은 우아한 귀족들과 왕족들이 모여 있었다. 이벨린과 솔리아페도 앉아 있어서 루시엘은 한결 긴장을 덜어냈다.

그런 그들의 눈에도 공작가의 어린 부부는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

어린 영애들은 환한 금발에 수려한 미모를 가진 키제프의 등장에 속으로 두근거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녀노소 모두에게 살포시 미소를 짓게 만든 건 사랑스러운 루시엘이었다.

“감사합니다.”

“와 주셔서 기뻐요.”

키제프와 루시엘이 손을 나란히 잡고 예법에 맞춘 인사를 하자, 흐뭇한 얼굴들이 이어졌다.

“아이고, 예뻐라. 두 사람 결혼 축하해요.”

“벨슈타인 공작가에 저렇듯 귀여운 며느리라니! 얼마나 흐뭇하실까요?”

“키제프 공자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요.”

낯선 사람들의 칭찬과 따뜻한 눈빛에 루시엘은 양 볼이 발그레해졌다.

특히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어린 부부를 칭찬하자, 이벨린은 부채를 살랑 흔들면서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렇지요? 우리 손주 며늘아기가 너무 예뻐서 내가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니까요.”

대외적으로는 그녀가 드래곤이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수면기는 비밀에 부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솔리아페의 옆에 앉아 있던 분홍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어린 부부에게 시선을 마주치며 다가왔다.

“키제프, 오랜만이구나.”

“이모, 오셨습니까.”

“그래, 아주 늠름해졌네. 꼬꼬마일 적에 봤는데. 결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키제프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 순간 그녀는 따사로운 눈빛으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안녕, 나는 라리에트 폰 세리안이야. 아유, 깜찍해라.”

‘세리안이라면…… 잠깐만. 그 세리안 백작 부인?’

황성에 있을 적에 익히 들어 본 이름이었다. 그녀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있었다.

사교계의 꽃, 아르테의 분홍 장미.

그녀가 어머님의 여동생이었을 줄이야. 그만큼 벨슈타인이 폐쇄적이었던 탓일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루시엘이에요.”

루시엘은 놀란 마음을 뒤로한 채 드레스 자락을 잡고 세리안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마주치는 눈빛이 살가워서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엘. 정말 인형처럼 귀엽구나.”

“라리에트 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활짝 핀 장미꽃 같아요.”

빈말이 아닌 게 솔리아페가 수국처럼 은은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이라면, 라리에트는 장미처럼 화사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눈길이 절로 갔다.

“라리에트, 우리 새아가 정신없겠다. 앉아서 말해.”

솔리아페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언니 새아가 안 잡아먹어. 가만, 그러면 내가 시이모가 되는 거려나? 나중에 수도에 오게 된다면, 나를 찾아오렴. 이래 봬도 수도 사교계는 내가 꿰뚫고 있거든. 세리안 백작가를 찾아오면 돼.”

“네. 가게 되면 꼭 찾아갈게요.”

어쩌면 나중에 유리공예를 선보이게 될 때,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 잠깐만 혼자 있어. 볼일이 있어서 다녀올게.”

키제프의 말에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응. 천천히 와. 나도 주변을 둘러보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사람이 많아서 복잡하니까.”

키제프는 누군가를 찾고 있기라도 한 듯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빠져나갔다. 루시엘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홀을 두 개나 이어 놓아서 더욱 넓었다. 게다가 삼 층까지 개방한 걸 보니 정말 손님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온 모양이었다.

누가 왔는지 전부 다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삼 층에는 루시엘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티테이블 앞에서 재잘거리며 놀고 있었다.

한 번도 또래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던 루시엘은 왠지 정다운 분위기가 즐거워 보였다.

어린 영애들 중 한 명이 3층으로 올라온 루시엘을 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벨슈타인 공자비지요? 결혼 축하드려요. 이리 와서 같이 놀아요.”

“우리 친해져요. 공자비님과 인사하기를 기다렸어요.”

어린 영애들의 눈이 초롱초롱 순수한 호의로 빛났다.

루시엘은 두근거리며 수줍게 이름을 물었다.

“고마워요. 영애들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저는 다나라고 해요.”

“저는 마샤.”

“저는 루시엘이에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가려는데 다나를 슬쩍 밀어내고 누군가가 갑자기 확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체리처럼 통통한 붉은 입술을 가진 소녀, 페넬로페가 루시엘을 보자마자 끌어안았다.

“꺅, 오르비아 영애! 보고 싶었어요.”

“……?”

루시엘은 의아한 얼굴로 몸을 슬쩍 뒤로 빼냈다.

‘왜 이러지?’

플로린 부티크에서 만난 것이 전부인데, 이렇듯 억지로 친근하게 구는 꼴이 참으로 이상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조심해야겠어.’

루시엘은 사근사근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영애를 보는 게 두 번째인데, 절 놀리려고 이러는 거라면 성공하셨어요. 카빌 영애.”

조곤조곤 상냥하지만 너와는 결코 친한 사이가 아니고 방금 무척이나 무례했다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페넬로페는 쉬이 의도를 간파당하자,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야, 멍청한 앤 줄 알았더니 또 눈치는 빠르네? 근데 눈동자색이 저랬나? 오늘 보니 빛나지도 않고 평범하잖아.’

공자비가 되어 많은 걸 가지기엔 부족한 애였다. 페넬로페는 속으로 무시하면서 겉으로는 환히 웃었다.

“뭐, 우리가 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가워서요. 이것도 다 인연이잖아요?”

아이라기엔 천연덕스러운 미소였다.

“글쎄요. 인연도 인연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루시엘이 끝까지 경계의 눈빛을 하며 가시 돋친 말을 내뱉자, 페넬로페는 하는 수 없이 뻔뻔하게 들이대던 작전을 바꾸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그녀의 눈가에 급작스레 눈물이 고였다.

“사실 그날 부티크에서의 제 결례를 사과하고 싶어요. 진심이에요. 받아 주세요.”

주변의 시선들이 모아졌다. 누가 봐도 페넬로페는 연극을 하며, 동정표를 얻으려 하고 있었다.

다나를 비롯해 다른 영애들이 궁금한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제가 오르비아 영애에게 의상실에서 작은 실례를 해서 사과드리려는 거예요.”

의상실 일에 대해서 아는 일부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카빌 영애가 공자비님이 고른 드레스를 새치기한 탓에 벨슈타인 공작께 쫓겨나 다른 의상실로 갔다던 그 일?’

“용서해 주실 거죠?”

노골적으로 묻는 것이 공개적인 용서를 원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조금도 협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날 일은 이미 끝난 거로 알고 있어요. 그에 대해선 더 받을 사과도 없고요.”

“그럼 우리 사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거네요. 그렇죠? 그럼 저랑 친구해요. 저희 아버지께서 마련한 선물이 마차에 있는데 같이 갈래요? 피로연 선물을 주고 싶어 그래요.”

페넬로페가 루시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루시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야 그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연회장 어딘가에 카빌 후작도 와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꾀어내어 납치라도 하려는 걸까?

“낯선 마차에 타지 않는 건,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에요. 그렇죠, 다나?”

“맞아요.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다나와 마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로연 선물을 주고 싶으시면 제 시녀에게 전달 부탁드려요.”

루시엘은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의 동조를 얻어내며 핑계를 대었다. 마차를 따라갈 생각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오르비아 영애에게 직접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페넬로페는 지금 계속해서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피로연 자리에서 계속 오르비아 영애라고 부르는 것.

“친구가 되고 싶은 제 마음을 알아주시면 안 되나요?”

페넬로페가 눈물로 호소했다.

친구, 친구라……. 루시엘은 조소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 한때는 저 연기에 속아 친구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우리 가여운 새언니, 그동안 내가 너무 괴롭혀서 미안해.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

‘저, 정말인가요? 페넬로페 아가씨?’

‘자, 이거 몰래 줄게. 내 선물이야, 귀엽지?’

‘고마워요…….’

‘그럼 가끔 이렇게 모두 안 계실 때 내가 놀아 줄게. 그러니까 우리 친구 하는 거다?’

페넬로페가 내민 자그만 친절이 기뻐 루시엘은 에메랄드를 만들었다. 몇 번 에메랄드를 얻은 후, 페넬로페는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쿡, 웃긴다. 내가 정말 친구해 주는 줄 알고 기뻐서 이렇게 에메랄드를 만들었어? 나는 천한 노예랑은 친구 안 하는데. 어쨌든 이건 잘 쓸게. 수고했어!’

‘뭐, 뭐라고……?’

과거엔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운명을 바꿨고, 이젠 진짜 가족이 생겼다.

나를 아껴 주고 진짜 기쁨을 알게 해 주는 벨슈타인 사람들이.

‘더 이상 가짜 친절에 기뻐하며 에메랄드를 만들던 난 없어.’

루시엘은 눈앞의 페넬로페를 향해 여유롭게 말했다.

“그것보다 지금 영애가 제게 저지르는 무례에 대해서 사과를 들어 볼까요?”

루시엘이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페넬로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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