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비좁은 골목에 위치한 외딴 술집을 빌려 카일록 암즈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빌푸는 곧이어 도착한 고객들을 맞이했다.
“저, 정말로 다들 본인 맞으십니까요?”
서류를 보면서 명단과 지위, 대출해 간 금액을 확인하던 빌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물 내부로 들어선 세 사람은 벨슈타인 공작가의 가신이라기에는 다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카빌 후작 밑에서 일하기 전에는 해적선에서 활약하던 빌푸였기에 샌님들이 풍기는 차림새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가신이라면 중년에서 노년의 나이대가 많을 텐데 이들은 너무 젊고, 인물도 출중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귀족 패를 척, 하고 동시에 내밀었으니까.
‘명단과 신분은 분명 맞는데…….’
슬쩍 위조한 건 아닌지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귀족 패는 제국의 각인이 선명한 것이 진짜가 확실했다.
흑발을 가진 한 명은 혹 전사가 아닌가 싶게 지나치게 덩치가 컸고, 갈색 머리칼의 다른 한 명은 그나마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지만 너무 어려 보였다.
마지막 한 명, 모자를 깊이 눌러쓴 루퍼스 자작이라는 자가 가장 수상쩍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딘가 모르게 풍기는 기품 같은 것이 자작이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귀족 같았다.
마치 공작 같은 대귀족을 연상하게 한달까.
하지만 빌푸 자신도 사무원답지 않게 얼굴에 깊은 상처가 나 있는 것이 수상쩍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의심은 거두기로 했다.
“예, 나리들 확인은 끝났습니다. 이거 워낙에 요즘 세상이 흉흉한지라.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사무원이 위스키를 세 잔 가져와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이자를 반으로 내리겠다니,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갈색 머리의 젊은 청년 귀족이 물었다.
“하하하, 여러분께서 특별히 자격을 가지신 고객이라 그런 혜택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론은 저희 마스터이신 카일록 암즈 님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빌푸의 말이 끝나자, 다른 방의 문이 드르륵 열리며 앞에 긴 막이 쳐졌다.
밖에선 안을 볼 수 없으나,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게 작은 틈이 나 있었다.
카빌 후작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한눈에도 모자를 쓴 자가 심상치 않았다.
“실례지만 잠시 모자를 벗어 줄 수 있겠소?”
“제게만 얼굴을 보이시라고 권하는 겁니까. 동등하게 얼굴을 보이시죠.”
“먼저 보인다면 나도 그리하겠소.”
느릿하게 움직인 루퍼스 자작이 모자를 벗었다.
청동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벨슈타인 가신들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각각 기록한 문서를 입수했다. 물론 정보 조직원을 통해서였다. 그것과 일치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공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목구비가 무척 수려하게 잘생긴 사내였다.
서늘한 인상과 위압적인 분위기는 왠지 상대를 경외심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
‘여자깨나 울리겠군. 벨슈타인가의 공작은 금발에 적안이었지.’
카빌 후작은 의심을 지운 뒤, 손을 들어 막을 걷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곤 비뚤어진 입술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카일록 암즈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소. 다들 편하게 앉으시오.”
루퍼스 자작의 신분으로 앉아 있는 루이비드의 핏빛 눈이 그제야 더욱 날카롭게 빛나며 상대를 파악했다.
흡사 사냥을 시작한 사자의 눈빛이 저럴까.
루이비드의 머릿속으로 수도의 초상화가 여럿에게 받아 둔, 카빌 후작의 인상착의가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미중년으로 그려 놓은 초상화 두 장을 빼놓으면, 인상착의는 거의 일치했다.
포마드로 넘긴 잿빛 머리카락에 퀭한 눈과 매부리코가 음침한 데다 살집이 두둑한 몸체는 단단해 보였다. 나이는 오십 대 후반에서 육십 대 초반.
본래 카빌 후작은 적갈색 머리칼을 가졌으니, 단순히 머리 색만 바꾼 모양이었다.
‘벨슈타인에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지.’
루이비드는 모자를 푹 눌러쓰며, 눈동자를 서늘하게 아래로 굴렸다.
차림새도 제법 화려했는데, 목에 두른 모피 목도리부터 휘황찬란한 금반지며, 메달처럼 커다란 금목걸이까지 자신의 부를 과도하게 전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쉽게 말하면 졸부의 차림이었다.
품위가 높아 보이는 건 도리어 세 명의 가신 쪽이었다.
카일록 암즈는 다짜고짜 금화가 가득 든 헝겊 주머니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돈보다 귀한 건 바로 정보라고 생각하오. 나리들께서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카일록 암즈, 아니 카빌 후작은 제법 혓바닥이 길어 장장 한 시간 넘게 떠들어 댔다.
더 듣고 있기가 괴로워진 세 사람은 물끄러미,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약하자면 돈을 줄 테니 벨슈타인의 정보를 넘겨라. 그러지 않으면 공작에게 너희들이 뒷돈 마련한 걸 찌르겠다.
뭐, 그런 뜻이었다.
루이비드는 저 뻔뻔한 너구리를 어떻게 요리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미 그의 말을 빠짐없이 녹음 중이었다.
고리대금업은 공작령에서는 불법이지만 카빌 후작은 처벌할 수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제국 황제의 직할령에 속한 귀족이므로 황실 법관에게 자료를 넘기면 처벌은 가능했지만 그걸로는 시원치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불법을 저지른 자에게는 불법적 방법으로 응징을 해 줄까?’
그가 신분을 위장한 카일록 암즈는 알아보니, 벨슈타인의 영지민 신분이었다.
작위는 없는 작은 길드를 가진 상인으로 뇌물수수를 비롯해, 감히 공작가의 정보를 캐내려 한 죄까지 물어서 최소 처형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듣자 하니 카빌 후작이 손대는 사업도, 자금도 꽤나 많다고 들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수확을 거두기에는 좀 이른 감도 있었다.
게다가 벨슈타인 공작가의 정보를 캐내려는 궁극적인 이유도 있을 것만 같았다.
루이비드는 엘링턴과 자르가 기사단장에게 눈짓해서 이만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엘링턴이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너무 뜻밖이고 갑작스러운 일이라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요. 의논을 한 후에 우리 측에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때 정보를 같이 드리지요.”
카빌 후작이 뱀처럼 교활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걸 어찌 믿겠소? 내 돈만 빼앗기게 된다면?”
“돈은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이자도 면제해 주지 않아도 되고 말입니다.”
“……크흠.”
“주군께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는 그날로 성문에 목이 걸리는 일. 심사숙고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루이비드가 새치름하게 말했고, 곁에 있던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들은 천장 위에 대기 중이다. 카빌 후작은 내심 고민에 빠졌지만, 그로서도 벨슈타인의 가신들을 건드리는 것은 득보다 실이 컸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던 카빌 후작은 훗날 벨슈타인의 부를 빼앗고, 크리스털 페어리가 제 손아귀에 들어올 것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발휘해 대답했다.
“좋소. 돌아가 보시오. 연락은 언제 주시겠소?”
“보름 후에 이곳으로 연락책을 보내지요.”
못마땅한 기색을 지운 후작이 그러라면서 너그러운 체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솔리아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피를 토하던 증세가 차츰차츰 줄어드는 걸 느꼈다.
“쿨럭…….”
아직도 연한 핏물이 나오긴 했지만, 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다.
거기다가 오늘은 컨디션까지 좋아서 오전에는 검을 잡고 연습을 즐기기까지 했다.
아픈 것을 들킬까 봐 가족들도 자주 만나지 않던 그녀가 이제는 식사도, 티타임도, 산책까지도 다녀왔다.
기침을 억누르는 약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솔리아페는 마법 대련에서 보았던 루시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가 검을 잡은 것은 루시엘,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 조그만 아이의 엄청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 아이의 넘치는 활기가 제게도 전해지고 자극을 주는 듯했다.
루시엘은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그녀를 찾아와, 조그만 손으로 솔리아페의 손을 잡아 주며 몸 상태를 살펴 주곤 했다.
오지 않는 날에는 달지 않은 간식과 함께 작은 편지를 보냈다.
「어디서 읽었는데,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가지고 있대요. 분홍색 말, 해 주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에요.」
종이를 펼쳐 든 채 솔리아페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아이의 상상력이 귀여웠다.
‘분홍색 말이라, 무슨 말일까?’
좋아해. 복숭아. ……루시엘?
루시엘이야말로 분홍색이 어울리는 귀여운 아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루이비드의 서재에서도 비슷한 걸 발견한 것 같은데. 액자에 보란 듯이 끼워 두었기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이건 루시엘만의 꼬시는 방식인가?’
솔리아페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풋 웃고 말았다.
“고전적이지만 마음에 드는 방식이군.”
그 아이는 제게 매일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보자고 설득을 했다.
아직도 의사에게 진찰받을 용기는 나지 않지만 지금 상태로는 나쁘지 않았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희망이 들기도 했다. 아니, 조금 더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닉스의 장미라는 것이 정말 내게 생명력을 준 탓일까?’
직접 겪은 후에도 꿈처럼 믿기지 않는 경험이었다.
“마님, 주문하신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이구나.”
솔리아페는 입가에 미소를 띤 후, 시녀를 불러 외출 준비를 하곤 대장간으로 향했다. 자신의 검을 맞출 때보다도 훨씬 더 설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리운 아들 키제프를 만날 생각에도 설렜고, 제 선물을 받은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떨지도 사뭇 궁금했다.
처음 시한부를 선고받은 그날 이후로 모든 것에 무덤덤해질 줄 알았는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