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루시엘이 수없이 연습했던 무속성 마법들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지팡이에 자동 기록된 마법이기에 영창 없이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하고 말았다.
아마 기합이 너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켜보던 이들은 루시엘의 구슬처럼 맑은 목소리에 시선을 더욱 빼앗기고 말았다.
사방에 풀어 버린 루시엘의 거대한 마나가 에레스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이 엄청난 마나는 대체…….’
슬리프 마법을 당한 에레스는 뒤늦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콰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악, 뭐야!”
이어서 바로 에레스의 발목을 묶어 놓은 다음, 루시엘은 생긋 웃으면서 즐겨 쓰던 마법을 썼다.
“매직 애로우(Magic arrow)!”
슈슈슉, 퍼엉, 펑!
무속성 마법이라고 얕잡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갈래의 투명한 빛의 화살들이 무섭게 날아들어 에레스의 머리에 연달아 톡톡 떨어졌다.
삡, 삡, 삐삐삐이익!
기다란 음이 울리며 루시엘의 영상구 속 숫자가 마구 올라갔다.
17, 35, 49, 61…….
지켜보던 모두가 깜짝 놀라서 루시엘에게 환호를 보냈다.
졸지에 어이없이 무속성 1서클 꼬맹이에게 져 버린 에레스는 그 충격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에레스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걸 실제로 맞았더라면…… 그야말로 아찔했다.
그러나 실드가 막아 주었기에 톡톡톡 빛이 떨어지기만 했다.
“아, 말도 안 돼! 차라리 스톤 에지를 쓸걸!”
뒤늦게 정신이 든 에레스가 바닥을 쾅 치며 분해서 죽을 것만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마탑에서는 그래도 나름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였다.
루시엘 역시 이 정도로 결과가 확 기울어질 줄 몰랐기에, 그에게 미안해졌다.
고개를 숙인 에레스에게 루시엘이 다가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요 자그만 꼬맹이에게 졌다는 사실이 분했지만, 에레스는 한편으로 루시엘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그만 손을 붙잡는 대신, 자신의 지팡이로 바닥을 짚고 일어난 에레스를 보며 루시엘이 로브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다시 할까? 이번에는 슬리프 안 하고?”
“됐어. 안 할 거거든.”
에레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추가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마탑이 아니라는 것. 누나 에리카의 입만 막으면 어떻게든 소문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 대결, 나름 재미있었다. 자신이 너무 방심한 탓에 허점을 보여서 순식간에 져 버린 건 아쉬웠지만 배울 점이 있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에레스는 이제 승부를 깨끗이 인정했다.
루시엘이 지팡이를 집어넣자, 에레스는 쭈뼛거리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너 오늘 좀 멋있었다?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어. 나중에, 내가 실력을 더 쌓고 나서 다시 대련하자. 그땐 내가 꼭 이길 거야! 메테오(Meteor)로 날려 줄 거라고.”
메테오는 땅 속성 마법 중에서도 제법 고서클에 속하는 마법으로 알고 있어서 루시엘은 화들짝 놀랐다.
“……메테오라니 너무해. 나 죽이려고?”
“아니, 로브 입으면 되잖아.”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왠지 모르게 대련을 하고 나서 한층 더 친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루시엘도 뿌듯했다.
사실 조급하게 굴지 않고 차분히 진행했더라면, 에레스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의 스톤 피스는 열두 살의 소년치고는 무척 위협적이었으니까.
한편 루시엘의 마력이 보통 이상임을 예측한 길리아트도 말도 안 되는 결과에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조용히 루시엘의 승리를 점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차분하게 대련을 이끌어 나갈 줄은 몰랐던 터였다.
이건 분명 강한 마력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었다. 상대의 허점을 찾아내는 판단력과 가장 효율적인 것을 선택해 활용하는 마법 이해도, 섬세한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마나 컨트롤까지. 어느 것 하나 9살 아이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능력이라 그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보통 아이가 아니로군.’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더욱 기대되었다.
대련은 루시엘의 승리로 끝났고, 두 사람은 로브를 벗어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훈훈한 마무리로 매듭을 지었다.
길리아트가 흐뭇한 얼굴로 두 아이에게 다가갔다. 골격이 큰 그가 다가가자, 두 아이가 더욱 조그마해 보여서 그는 무릎을 숙여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다.”
길리아트는 그리 말하면서 에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레스도 분명 훌륭한 마법사가 될 자질이 있는 아이였다. 사실 현재 마법의 정교함만을 따지자면 에레스가 위일 터.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졌다면, 승리할 수도 있었다.
“에레스, 아쉽지만 속도감 있는 공격이 무시무시하더구나. 하지만 조금 더 차분하게 행동해야 한다.”
“넷, 저도 깨달은 게 많아요.”
“그래. 특히 땅 속성 마법은 아주 느릿하니 말이다. 어쩐지 땅 속성의 길은 너에게는 인내심을 요하는 길이 되겠구나. 하하.”
길리아트의 기분 좋은 격려에 에레스는 다시금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그런 다음 길리아트는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루시엘, 아주 침착하게 잘 움직였다. 사실 나는 단순히 네가 강한 마력을 타고나서 그걸로만 승부를 볼 줄 알았는데, 대처도 잘했다.”
할아버지의 칭찬에 루시엘은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슬리프 마법은 연습할 때에도 잘 이용하더니, 흐름을 잘 이끌어 냈다. 하지만 마법을 몸으로 회피하기보다는 방어 마법을 익혀서 이용하자.”
“네, 할아버지!”
이어서 두 아이에게 사람들이 말을 걸기 위해서 다가오려고 했지만, 길리아트가 조용히 해산시켰다.
승리한 아이는 자칫 우쭐해지고 진 아이는 자신감이 하락할까 봐 배려한 터였다.
길리아트는 조심스레 에레스에게 말했다.
“에레스, 자주는 아니지만 마탑에 들르게 되면 가끔 마법을 봐 주마.”
“저, 정말요?”
그 말은 제자로 받아 준다는 뜻이었다. 에레스는 감동했는지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진짜로 열심히 해서 꼭 길리아트 님처럼, 아니 스승님처럼! 대마법사가 될 거예요!”
“하하, 기대되는 말이군.”
“그리고 너희 둘 다 순간이동 마법부터 익히는 게 좋겠구나.”
“네!”
루시엘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 내면서 대답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 * *
“아가 마님.”
오늘은 루시엘을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푹 쉬게 하라는 길리아트의 명령이 있었다. 덕분에 다들 놀러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무도 루시엘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로즈와 베시만이 루시엘의 고단함을 풀어 주려고, 아이를 커다란 욕조 안에 앉힌 후 달콤하고 상큼한 꽃잎과 향유, 입욕제를 퐁당 넣어 주었다.
루시엘이 헤엄치고도 남을 정도로 아주 커다란 욕조였다. 황성의 황녀가 쓸 법한 우아하고 새하얀 도자기와 금빛 장식이 고급스러웠다.
사실, 루시엘은 모르고 있었지만 솔리아페가 보내 준 선물이었다.
우유처럼 뽀얀 루시엘이 하얀 욕조 안에 들어가니, 영락없이 아기 백조 같았다.
“잠시만요, 머리를 올려 드릴게요.”
처음 벨슈타인가에 왔을 때는 어깨를 살짝 넘기던 머리 길이가 어느 틈에 쑥쑥 자랐는지, 이제는 등을 가득 덮을 정도가 되었다.
“머리가 정말 많이 기셨어요. 우리 아가 마님. 이제 며칠 있으면 정말로 새 신부님이 되시겠네요.”
베시가 루시엘의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수건으로 말아 올린 다음, 예쁘게 묶어 주었다.
앞머리와 옆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린 루시엘은 동그란 이마가 보이자, 아이임에도 숨길 수 없는 미인 티가 났다.
목 뒤에 보송보송 난 잔털까지도 귀여워서 베시는 어린 루시엘이 제 친동생처럼 어여쁘고 소중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예쁘시니, 어른이 되면 우리 루시엘 아가씨가 제국 제일가는 미녀가 될 거예요.”
루시엘은 그저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베시의 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웃어넘겼다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내가 정말 예뻐?”
“그럼요. 누가 뭐래도 우리 아가 마님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베시가 루시엘의 손을 가져가 주물러 주며 말했다. 마법 대련을 하면서 긴장으로 굳어졌던 목이며, 어깨, 팔, 발바닥까지 마사지를 해 주자 몸도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린 루시엘은 문득 볼이 발그레해졌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키제프도 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멋대로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욕조 안 투명한 수면 위로 둥실둥실 떠 오던 분홍색 홍학 모양의 인형이 루시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터였다.
“자요, 여기 타 보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로즈가 어렵게 공수해 온 거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루시엘은 예쁜 홍학의 긴 목을 껴안고는 올라탔다.
말랑말랑하고 폭신폭신, 매끈한 인형의 감촉은 물론이고 탑승한 기분은 그야말로 구름 위에 동동 떠 있는 것처럼 좋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면 호수에서도 물놀이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재미있겠다.”
“네. 그땐 같이 놀아요. 여름이 되면 정원 분수도 전부 개방할 거예요.”
홍학 인형에 아늑하게 올라탄 루시엘의 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로즈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베시가 그사이 가져온 하얀 트롤리를 루시엘의 욕조 옆으로 옮겨 주었다.
“여기 마실 것도 있어요. 그럼 놀고 계세요.”
“응!”
벨슈타인의 여름.
봄이 끝난다는 사실은 아쉬웠지만, 여름은 어떨지 기대되었다.
여름에는 변화가 생길 터였다.
우선 키제프가 오고, 루시엘도 결혼을 하게 될 테니까.
계약 결혼이라 큰 변화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꾸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 설레는 건 사실이었다.
루시엘은 트롤리로 손을 뻗어 잔을 움켜쥐었다. 자두와 얼음을 갈아 넣은 에이드를 마시면서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좋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한껏 참아 두었던 감정들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퐁당, 퐁당.
욕조 안으로 빛나는 보석들이 빠지면서 소릴 냈고, 루시엘은 노곤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행복해.”
루시엘은 방긋 웃으면서 홍학 인형에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