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루시엘은 에레스를 보며 부러운 투로 말했다.
“대단하다.”
“나는 불 속성이 좋았는데, 뭐. 땅 속성도 괜찮지. 땅 속성은 성장은 느리지만, 나중에는 아주 강력한 마법도 할 수 있거든.”
“그렇구나. 에레스는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야.”
어느새 우쭐한 눈빛이 된 에레스가 말했다.
“그래, 이 몸은 대마법사가 될 거니까 잘 봐 둬. 애송이.”
에레스가 입고 있던 망토를 한번 펄럭이더니 잘난 척을 했다.
“대마법사?”
“그래, 마탑의 주인이 되는 거지.”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뭐지?’
열두 살 아이다운 그 모습에 루시엘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 너도 실력을 키워서 나를 돕도록.”
에리카가 옆에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길리아트 님의 제자는 루시엘 아가씨란다, 에레스.”
“쳇, 그러게 말이야. 너는 무슨 속성을 발현할 거 같아?”
그 질문에 루시엘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어쩌면 속성을 발현하지 못할지도 몰라…….”
에레스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왜? 무려 길리아트 님의 제자인데?”
“저번에 어떤 도구로 알아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 게 나왔었어. 그게 무속성이래.”
그러자 에레스가 루시엘을 살짝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무속성이 젤 구린데.”
“구…… 려?”
“별로 안 좋다는 뜻이야.”
루시엘이 눈을 끔벅거리며 알아듣지 못하자, 에레스가 하고 알려 주었다.
“어휴, 에레스 이 자식. 입 험한 것 좀 봐.”
에리카가 가자미눈을 하고는, 에레스를 나무랐다.
“아, 왜! 전부 누나한테 배운 말이거든?”
“……마탑 돌아가서 보자. 에레스.”
에리카가 에레스를 향해 무시무시한 눈웃음을 지었는데, 왠지 살기가 끼쳤다.
루시엘은 그저 두 사람의 아웅다웅도 사이좋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발현해 봐야 아는 거잖아. 무속성이 아닐지도 몰라. 힘내라!”
에레스가 루시엘의 자그만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제 딴에는 격려를 해 주었다.
“……그렇게 별로야?”
“어. 무속성이 제일 뭐가 없는데. 말 그대로 무속성이니까.”
직설적인 에레스의 말에 루시엘도 고민이 되었다.
길리아트 할아버지나 이론서에서도 무속성 마법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고 그러셨지만, 한계가 있다는 건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엘에겐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보석의 힘을 쓸 수 있으면, 땅 속성이든 불 속성이든 부럽지 않을 터였다.
“난 괜찮아. 다른 방법을 찾을 거니까.”
“다른 방법? 그게 뭔데?”
“아직은 말할 수 없어.”
곁에서 잠자코 둘을 지켜보던 에리카가 말했다.
“맞아요. 다른 방법들은 많아요. 주문서로 마법 속성을 부여하는 경우도 많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루시엘 아가씨. 무려 길리아트 님께서 인정하신 분이잖아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고마워요, 에리카.”
루시엘의 눈에 에리카의 가방에 달려 있는 작은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귀여워라. 직접 만든 거예요?”
에리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귀여운 걸 좋아하거든요.”
‘인형 좋아하는구나.’
그녀의 순수한 취미에 루시엘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꼭 아이만 인형을 좋아하라는 법은 없지.
루시엘도 귀엽고 몰랑몰랑한 인형을 만지거나 껴안으면 저절로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에리카에게 살짝 귓속말을 했다.
“에리카, 인형 좋아하면 제 양말 놀이방에 같이 구경 가실래요? 인형 많아요.”
“저, 저, 정말요?”
에리카가 볼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열여덟 살 먹고 인형을 좋아하다니…… 쯧쯧.”
퍼억!
에리카가 웃으면서 에레스의 등짝을 때렸다.
“우아악! 괴물!”
“에레스, 나 대신 정리 좀 하고 있어.”
에리카가 눈빛으로 심한 욕을 하고는 루시엘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말했다.
“가요, 루시엘 아가씨.”
“네!”
루시엘이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에리카도 귀여운 구석이 있네.’
루시엘은 에리카를 양말 나무가 있는 방으로 데려가서 색색의 양말로 만들어진 인형들과 프린세스 래빗 성, 아직 채 풀어 보지도 못한 동물 인형들까지 보여 주면서 아끼는 인형들을 소개해 주었다.
“인형이 인형을 소개하네요. 너무 귀여워서 현기증 나요!”
하나씩 보여 줄 때마다 에리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해졌다.
루시엘은 그녀에게 선물로 어떤 인형을 줄까, 고민에 빠졌다.
한편 에리카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보드랍고 귀여운 고급 인형들과 장난감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덧 구경을 다 마치고 나서 에리카가 말했다.
“루시엘 아가씨. 덕분에 좋은 구경 했어요.”
“에리카.”
루시엘은 아기 알파카 인형을 하나 집어 들었다. 몽글몽글한 알파카의 털을 그대로 구현해서 무척이나 고가의 인형이었다.
“이건 선물로 줄게요. 가져가요.”
“저, 정말이에요? 무척 비싸 보이는걸요.”
“괜찮아요. 여기 똑같은 쌍둥이 인형이 있거든요.”
목에 매단 리본의 색깔만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달랐고 외견은 똑같이 생긴 인형이었다.
“귀여워라. 그렇다면 소중히 잘 받을게요, 루시엘 아가씨.”
“네.”
루시엘이 말갛게 웃고 나서 알파카 인형으로 놀이하듯, 인형의 팔로 에리카의 손을 톡 건드렸다.
“에리카, 이제 제 편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자 에리카도 자신의 알파카 인형 손으로 루시엘의 인형과 손을 맞잡았다.
“저는 평생 루시엘 아가씨의 편 할게요! 이 언니랑 계속 놀아 주세요. 아, 앞으로는 언니라고 편히 불러 주세요.”
“네, 에리카 언니!”
“아악, 귀여우셔!”
에리카는 심장을 폭행당한 얼굴로 알파카 인형과 루시엘을 함께 폭 끌어안았다.
인형 하나로 제국 최고의 황실 마도사라는 인재를 얻는 순간이었다.
* * *
루시엘은 에리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서랍장의 상자에서 보석을 하나 꺼냈다. 그런 다음 에리카가 돌아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에리카 언니, 있잖아요.”
“네?”
“만약에 보석에도 어떤 힘이 들어 있다면 주문서처럼 물건에도 그 힘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에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아직 그런 특별한 보석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만약에 그 특별한 보석이 있다면요?”
루시엘이 눈을 빛내면서 다가갔다. 에리카는 그 순간, 루시엘의 눈동자가 정말 보석처럼 홀릴 만치 예뻐서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시 이성을 되찾고는 말했다.
“그런 보석을 보게 된다면 꼭 한번 연구해 보고 싶네요. 아주아주 특별한 일이 될 거예요. 하지만 특별한 보석이라면 구하는 것도 힘들 테고, 무엇보다 무척이나 비쌀 거예요.”
“실은요. 저에게 특별한 보석이 있는데 그 안에 어떤 힘을 품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그런 보석은 어떻게 가지게 되신…….”
“훔친 건 아니에요.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해 줄 수가 없어요. 저를 믿어 줄 수 있어요?”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선한 분이란 걸 알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알지요?”
“루시엘 아가씨 얼굴에는 착하다고 다 쓰여 있어요.”
에리카가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일부 고위 귀족들은 마탑 출신을 얕잡아 보는 기색이 있었다.
마탑에 귀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분보다 마법 실력이 우선시되는 곳이라 귀족과 평민 사이의 예의나 격식을 크게 따지지 않았다.
사실 차림새만 봐도 에리카와 에레스가 귀족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에리카가 더 유심히 본 것은 루시엘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주치는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 다 인사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
달콤한 디저트가 생겼다고 한걸음에 달려와서 같이 먹자고 하는 다정함.
인형을 좋아한다는 말에 예쁜 인형까지 구경시켜 주고 선물해 주는 곱고 선한 마음 씀씀이까지.
외모만 천사처럼 예쁘고 깜찍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소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랑스러움 그 자체랄까.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마법사들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동경하는 길리아트 님의 제자라니.
그녀가 조그만 손을 내밀면 기꺼이 잡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버릇없고 말썽만 부리던 남동생 에레스만 보다가, 이렇게 포실포실 바라보기만 해도 귀여운 여자아이를 보니 자연히 흐뭇해지고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에리카 언니, 저를 믿어 주신다니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그럼요. 저는 루시엘 아가씨 편이에요!”
루시엘이 진홍빛 눈을 반짝이며,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 보석에 어떤 힘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루시엘은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에리카 언니, 당신의 손에 많은 것들이 걸려 있어요.’
이 일이 제대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루시엘 자신도 다른 원소 마법의 힘을 쓸 수도 있다.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어 본 에리카는 깜짝 놀랐다.
“아주 맑고 영롱한 에메랄드네요.”
에리카는 이처럼 귀한 보석을 만져 본 적이 없어서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루시엘 아가씨. 저를 뭘 믿고 이렇게 귀한 물건을 덜컥 맡기세요. 제가 이걸 가져가서 영영 돌려드리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그럴 거였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가져갔겠죠? 에리카 언니가 나를 믿어 주었듯이 나도 믿어요.”
루시엘이 귀엽게 윙크를 했다.
“이 연구를 잘해 주기만 한다면 더 좋은 보상을 드리겠다고 약속해요.”
“아, 아뇨. 보상을 바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보석의 힘을 알아보려면 마탑의 연구소에 가져가야 할 것 같아요. 측정 도구들이 전부 거기에 있거든요.”
“응, 당연히 그렇게 해요.”
“그,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네. 연구하기 좋은 환경에서 해야 할 테니까요.”
루시엘의 그 말은 에리카에게는 남다른 울림을 주었다. 에리카는 마탑에 들어가기 전, 한 귀족의 밑에서 마정석의 마력을 측정하는 일을 했었다.
그는 에리카의 집에 연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저택에 머물게 했다. 그녀를 믿을 수 없단 뜻이었다.
결국 그 귀족의 집에서는 에리카가 마정석을 빼돌렸다는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서 제대로 된 노동의 값을 치르지 않았고, 실컷 두들겨 맞은 뒤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 귀족의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던 에리카에게 루시엘의 믿음은 더 열심히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만들었다.
“꼭 좋은 성과가 있으면 좋겠어요.”
“나도요. 그치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루시엘은 말갛게 웃어 보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너무 큰 부담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성공하면 좋겠는데. 아니, 성공할 것이다.
비록 나쁜 주군을 만났지만, 그녀의 연구 실력은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믿어요, 에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