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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69)화 (69/282)

<69화>

날개 열쇠를 사용하자 찰그락 문이 열렸다.

아주 비밀스러운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서는 듯한 상황에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꼴깍 삼켰다.

이벨린이 루시엘의 어깨를 살짝 짚고는 말했다.

“가자, 루시엘.”

“네, 할머니.”

자갈돌이 깔린 잔디밭에 하얀 별채 건물이 드러났다. 하얀 대리석 기둥에는 여기저기 천사들의 석상이 있었다.

아치형 입구를 통과해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바닥에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안에는 벨슈타인가의 가족과 최측근 몇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단다. 자격이 없으면 마법진이 튕겨 내지.”

이벨린이 마법진에 먼저 올라서더니 기록 상태로 구동시켰다.

“루시엘, 너도 마법진에 등록해야 하니 여기 잠시 서 보렴.”

“네, 할머니.”

초록빛으로 깜빡이며 회전하던 마법진 위로 루시엘이 긴장한 채 올라섰고, 마법진은 비로소 하얗게 빛나며 루시엘을 무사히 들여보내 주었다.

안도하는 루시엘을 보곤 이벨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엘, 이 성에서 네가 갈 수 없는 곳은 없을 거란다. 넌 우리 가족이니까.”

이벨린의 다정한 말에 루시엘은 마음이 놓였다.

천사궁은 지하까지 합쳐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보석고는 금화 금고, 보물고와 함께 지하에 있었다.

보석만 가득한 창고 방이 세 개나 있었고, 그 방은 루시엘이 지내는 방보다 족히 두 배는 넓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부에 루시엘은 눈이 번쩍 뜨이고 말았다.

또 어떤 방에는 여러 개의 보석장이 가득했는데, 유리장에 진열해 두어 안에 어떤 보석이 들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벨린이 웃으며 가장 앞에 놓인 에메랄드 보석장의 서랍을 열었다. 검은색 벨벳으로 감싸여진 상자 위에 에메랄드가 한 움큼씩 보관되어 있었다. 같은 에메랄드라고 하더라도 빛깔과 크기가 아주 다양했다.

이벨린이 큼지막한 에메랄드 하나를 루시엘에게 쥐여 주었다.

“정말 영롱하지 않니?”

“……예뻐요. 근데 왜 이렇게 보석이 많나요?”

“벨슈타인이 소유한 보석 광산도 있고, 내가 괜히 드래곤이겠니. 내 레어에서 가져온 것들도 꽤 된단다. 드래곤은 보석과 황금을 좋아하거든.”

“아…….”

‘새로운 걸 알았다.’

루시엘은 벨슈타인이 왜 제 보석에 크게 탐을 내지 않는지, 직접 겪어 보니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이 에메랄드. 내가 만든 거랑 조금은 다른 것 같아.’

루시엘은 에메랄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이벨린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할머니, 여기요.”

“그건 보석고 방문 기념으로 하나 가져가렴.”

“……그, 그래도 돼요?”

루시엘이 조심스레 묻자 이벨린이 뺨에 뽀뽀를 쪽 해 주었다.

“물론이지, 우리 귀여운 루시엘. 네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를 거란다.”

이제는 루시엘이 없었던 벨슈타인 공작성은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벨린에게 루시엘은 이 모든 순간을 느끼게 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기약 없던 긴 잠에서 깨워 주었으니까.

루시엘은 뺨에 닿는 부드러운 애정 표현에 기분이 좋아서 손으로 살짝 감싸며 얼굴을 붉혔다.

“할머니이.”

루시엘도 이벨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엄청났다.

“어차피 이게 다 네 거가 될 건데.”

“네엣?!”

다음 순간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아, 아뇨. 솔리아페 님도 계시고, 할머니도 계시잖아요.”

“그래, 정확히 따지자면 우리 것이라고 해야겠구나. 후후, 하지만 우리 루시엘이 갖고 싶다는 것은 뭐든 줄 거란다.”

그날 이벨린과 함께 둘러본 것은 보석고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다 둘러보지 못했다. 결국 왕관이나 액세서리로 세공된 것들 중에서도 더 대단한 것들은 나중에 구경하기로 했다.

둘러보면서 루시엘이 제 눈 색과 꼭 닮은 루비 목걸이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이벨린은 슬쩍 그것을 챙겨 두었다. 세트인 팔찌도 함께.

루비, 사파이어, 토파즈,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페리도트, 가넷, 아쿠아마린, 자수정 같은 루시엘이 처음 보는 보석들도 많았다.

실물을 직접 보니 보석들의 종류나 모양, 이름 같은 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천사궁을 나오면서 루시엘은 기념으로 받은 에메랄드를 품에 넣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섰다.

‘내가 만든 거랑 비교해 봐야지.’

어쩌면 자신이 보석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일말의 희망과 기대가 자꾸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할머니, 오늘 구경시켜 주셔서 감사했어요. 벨슈타인에 대해 제가 모르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냥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부자였어요……!”

“나야말로 루시엘에게 금고를 보여 줄 수 있게 되어서 기쁘구나. 아직 보여 줄 게 많으니, 기대하렴.”

“네에.”

“갖고 싶은 것이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이거 주셨잖아요. 감사해요, 할머니.”

루시엘이 그녀가 준 에메랄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벨린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직은 결혼 전이라 네 몫의 개인 예산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예산이요?”

“한마디로 네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금이란다.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살다 보면 돈이라는 게 쓸 데가 있단다.”

“……네.”

“무엇보다 돈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꽤 크지.”

할머니 말씀이 맞다.

돈이 없다면 불안해지기 마련이었다. 돈도 하나의 힘이다. 자신도 만약을 대비해서 자금을 마련해 두려고 했었지.

이벨린이 루시엘의 손에 가죽으로 만든 작고 동그란 빨간색 지갑 하나를 건네주었다.

“할머니?”

“혹시 모르니 비상금 용도로 갖고 있거라. 이 할미가 주는 첫 용돈이란다.”

“첫 용돈이요?”

루시엘이 머리에 물음표를 매달고 있자, 이벨린이 하얀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귀여운 손주 며늘아기에게 까까 사 먹으라고 주는 돈이란다. 넣어 두렴.”

딸깍 소리와 함께 금속 똑딱이 잠금쇠를 열자 안에는 1만 틸링짜리 금화가 어림짐작으로 열 개 정도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1만 틸링부터 금화였다.

과하긴 했지만 벨슈타인의 부유함으로는 적당한 용돈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른에게 받는 첫 용돈이라니, 기분이 좋았다.

“감사해요, 할머니. 아껴 쓸게요.”

루시엘이 이벨린의 품에 폭 안기면서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그런 아이가 귀여워 코를 톡 건드린 이벨린이 말했다.

“오냐. 좋은 하루 되렴.”

“네, 할머니도요.”

제 방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마침 마주친 베시와 로즈에게 지갑을 보여 주었다.

“할머니께 용돈 지갑 받았어.”

“귀여워라.”

“많이 받으셨어요?”

로즈가 장난스럽게 묻자 루시엘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금화 열 개.”

“……후후,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지만 축하드려요, 아가 마님.”

“응……? 아닌데.”

로즈는 루시엘이 귀엽다는 듯 웃으면서 베시와 함께 침구를 정돈해 주고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루시엘이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지갑을 다시 열어서 금화를 하나씩 꺼내 보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열 개를 꺼냈는데도 안의 금화가 줄어들지 않았다.

“어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루시엘이 자그만 지갑을 뒤집어 보았다.

금화가 끝도 없이 짤랑 소릴 내면서 침대 위로 떨어졌다.

“할머니…… 뭘 주신 거지?”

루시엘은 기쁘다기보다는 다소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금화가 더 안 나오게 되었을 때는 침대에 수북하게 쌓인 후였다.

그것도 모르고 이 큰 것들을 냉큼 받아 버렸다니……. 루시엘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단 생각에 멍하니 있다가 얼른 금화를 다시 지갑 안에 넣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책상에 앉아 빨간 노트를 펼쳐 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루시엘이 혼자가 될 것을 대비해서, 지금 벨슈타인에 지낼 때 달성해야 할 계획 목록이었다.

물론 그때는 파혼을 대비하기도 했었지만, 무사히 성혼을 하게 된 지금도 여전히 계획은 잔뜩이었다.

마법 배우기.

자금 만들기.

벨슈타인가와의 돈독한 인연 쌓기.

보석의 힘 연구하고 그 힘을 활용하기.

나만의 아지트 마련하기.

믿을 만한 호위 구하기.

내 사람 만들기.

마나 영양제 얻기.

벨슈타인의 발전에 도움 주기.

이브나크의 유리공예 살리기.

피닉스 부활 돕기.

어머님의 건강 되찾아 주기.」

중간중간 사라지거나 수정한 것도, 이미 달성하거나 아직 진행되고 있는 계획도 있었다. 어느새 노트는 너덜거렸지만 그럴수록 루시엘의 계획도 착착 진행되었다.

벨슈타인에 도움 주기 같은 경우는 세부적인 것이 많아 다 적지는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해낸 것도 슬슬 생겨 가니 뿌듯했다.

보석을 보관하는 공간도 시아빠께서 아기 영지를 마련해 주신다고 하니 해결이 되었다.

에리카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마탑에 있을 줄이야. 이제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되면 좋으련만.

리스트를 훑어보던 루시엘은 무엇보다도 가장 잘 진행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벨슈타인가와의 돈독한 인연 쌓기.」

이제는 단순한 인연을 넘어서 가족이 되었다. 벨슈타인의 울타리 안에서 루시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고 행복했다.

오르비아 백작가, 카빌 후작가, 황성.

그 어느 곳도 안전하고 든든한 집이라고, 그들이 가족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었다.

슬프고 괴로운 기억뿐이었으니까.

루시엘은 과거를 생각할수록, 현재의 벨슈타인이 소중해졌다.

처음 만난 따뜻함. 혹여나 나중에 벨슈타인에서 떠나 살게 되더라도 이곳에서 보낸 행복한 일상과 가족들의 따뜻함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 보고 싶을 거야.”

루시엘은 웃으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루시엘은 또다시 심장으로 모여드는 마나를 느꼈다.

파앗.

노란색 토파즈가 또로롱, 맺혔다.

루시엘은 그걸 상자에 보관하면서 에메랄드를 꺼냈다.

그리고 아까 주머니에 챙겨 왔던 것을 꺼냈다. 할머니가 보석고에서 주신 에메랄드.

두 개의 에메랄드를 나란히 꺼내 놓고 보니, 둘 다 아름답게 빛나고 영롱해서 육안으로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루시엘이 만든 보석은 마나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 마나에 반응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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