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루시엘은 피닉스의 장미를 놓은 화병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안녕하세요.”
루시엘이 조심스럽게 인사하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귀엽구나. 드래곤 마나 때문에 숨이 막혀서 혼났단다.
불의 제단에 있어야 할 피닉스의 목소리가 어떻게 장미에서 들려오는 걸까?
루시엘은 눈이 댕그래져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내 영혼의 조각 일부가 피닉스의 장미에 담겨 있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거란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피닉스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나의 부활을 도와줄 수 있겠니?
“어떻게 하면 되나요?”
―피닉스의 장미를 흙으로 옮겨 줘.
피닉스의 부탁에 루시엘은 곧장 온실 정원이 떠올랐다.
“마침 온실 정원이 있어요.”
―좋아. 그리로 안내해 주렴.
어쩐지 그동안 피닉스가 새침데기가 된 것 같다고 느끼면서 루시엘이 피닉스의 장미를 들고, 실내 정원으로 향했다.
황금 모종삽으로 땅을 파고, 피닉스의 장미를 줄기부터 심은 다음, 황금 물뿌리개로 물도 주었다.
다행히도 까탈스러운 피닉스의 취향에 잘 맞는 곳인 모양이었다.
―으음, 물맛이 좋구나. 이런 최신식 시설이 있었다니…….
피닉스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시엘은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다 됐나요?”
―마지막으로 햇빛이 필요하단다.
스위치를 눌러 햇빛도 잘 들어오게끔 창문을 열었다.
장미잎이 몸을 바르르 떨면서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했다.
―이제 루시엘, 너의 마나를 한 모금 나누어 주지 않을래?
루시엘은 쪼그려 앉아서 잠시 생각했다.
어쩐지 피닉스를 이제 자주 돌봐 주게 되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좋은 기회가 아닐까?
피닉스는 누구나 탐낼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존재이니까, 친구가 되어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루시엘이 잠시 망설인다고 느낀 것인지 피닉스가 말했다.
―나의 부활을 도와준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피닉스의 부활을 도와주는 대가로 소원이라,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피닉스는 불사조다. 그렇다는 건 불의 힘과 부활의 힘,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피닉스님의 부활을 위해서 제 마나를 매일 한 모금씩 드릴게요.”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이니?
피닉스의 물음에 루시엘은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소원은 하나지만, 루시엘이 피닉스에게 원하는 힘은 두 가지였다. 두 가지 힘을 다 얻기 위해서는.
조금 어려운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몰랐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당신이 완벽하게 부활하신 다음에 말이에요.”
그렇게 대답한 루시엘이 피닉스의 장미의 잎에 대고, 마나를 끌어모아 흘려보냈다.
루시엘의 마나를 머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장미의 녹색 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땅속에 뿌리를 뻗어 나갔다. 덕분에 화단의 흙이 살짝 들렸다.
아직 줄기의 위쪽이나 꽃봉오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들려온 목소리가 힘찼다.
―뿌리가 제대로 안착했단다. 고맙다.
온실을 빠져나온 루시엘이 다시 동관에 다다랐을 때는 공작성은 전날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사용인들 모두가 이른 시각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님이 성으로 귀환하신 게 사실입니까?”
“……네.”
“그럼 제게 바로 연락을 주셨어야지요. 각하께서 그동안 얼마나 찾으셨는데…….”
에바와 엘링턴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진 듯해 루시엘은 조용히 지나가려 했지만 엘링턴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내 두 사람이 대화를 중단하고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가 마님,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네에, 잠시 온실에 다녀왔어요. 엘링턴이 온 걸 보니, 시아빠께서 돌아오신 거죠?”
“예, 조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길리아트 각하께서도 귀환하시면 다 같이 만찬을 준비하라고 하셨으니, 이따 뵐 수 있을 겁니다.”
“네…….”
그 말은 지금은 시아빠에게 찾아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중을 나오지 못해 찾아뵐까 했는데 루시엘은 방으로 올라갔다.
마침 동관에 머무르고 있는 솔리아페의 방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문 앞에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옷도 채 갈아입지 않았는지, 두꺼운 외투와 갑옷을 입은 그대로였다.
공작이 문을 쾅 두드렸다.
“이야기 좀 하지. 내게 할 말이 아주 많을 텐데 말이야.”
“……돌아가 줘.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난생처음 보는 답답하고 애가 타는 듯한, 그러면서도 분노에 찬 공작의 모습이었다. 공작 부부의 싸움에 끼어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루시엘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지나갔다.
겨우 계단을 올라 제 방에 도착하자 베시가 루시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 마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에요?”
“으응? 아, 그냥 온실 정원에.”
“시장하시진 않으세요? 아침 식사를 가져다드릴…….”
베시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루시엘이 그녀의 치마폭에 안겼다.
“아니, 아니. 나 배 안 고파.”
“응? 아가 마님? 갑자기 왜 그러셔요?”
“그냥. 피곤해.”
“아직 더 주무셔야겠는데요?”
베시가 웃으며 루시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으응. 어쨌든 나 배 안 고프니까, 절대 아래층 내려가지 마. 알았지?”
“왜요?”
왜냐면, 아래층 지금 분위기가 장난 아니거든.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루시엘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화가 난 시아빠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솔리아페 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한데…… 계속 숨기기만 하시니 알아내기 어려웠다.
그날 저녁 만찬 장소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루이비드와 솔리아페 두 사람은 아직도 오해가 풀리지 않은 것인지 장내 분위기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은 자리라, 식사 도중 체할 것 같았다.
“시아빠, 무사히 다녀오셔서 기뻐요. 북부 설원은 아주 춥다던데 괜찮으셨어요?”
“……괜찮았다.”
평소라면 루시엘이 말을 걸어 주면 흐뭇한 얼굴로 받아 주었을 그인데, 오늘은 짧은 대답이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면서 그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던 솔리아페가 결국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몸이 안 좋아 이만 먼저 일어날게요.”
“…….”
공작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달라붙었지만, 솔리아페는 미련 없이 떠났다.
“……오랜만에 만나도 한 치 변함이 없군.”
공작이 낮게 중얼거리자, 이벨린이 말했다.
“뒤쫓아 가 보렴.”
“……솔리아페는 저와 대화하기를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 볼게요.”
루시엘이 간다고 해서 솔리아페가 달라질 것 같진 않았지만, 루이비드는 그러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은 총총걸음으로 솔리아페의 뒤를 쫓았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그녀가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잠시 멈춰 서더니, 기침을 쿨럭쿨럭 크게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또다시 한 차례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솔리아페가 손수건을 몰래 버리고 그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루시엘은 눈을 의심했다.
‘저건…….’
피가 묻은 손수건이었다.
‘정말이었어. 솔리아페 님은 큰 병에 걸리셔서 그동안 숨기고 숨겼던 거야…….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큰 병.’
이렇게 숨기시는 걸 보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걸까?
루시엘은 놀람과 동시에 그녀의 슬픈 운명에 심장이 욱신 아파 왔다. 심장으로 모여드는 마나가 크게 일렁이며, 사파이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루시엘은 얼른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떨어지는 사파이어를 손으로 붙잡은 루시엘은 솔리아페를 뒤쫓았다.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서 이름을 불렀다.
“솔리아페 님.”
솔리아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루시엘? 네가 무슨 일이지?”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신 거예요. 그 피 묻은 손수건은…… 혹시 아프신가요?”
“……별거 아니란다. 그만 만찬장으로 돌아가렴.”
솔리아페가 건조하게 말했지만 루시엘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심각한 병이 있으신 거죠? 그래서 이 년 동안이나 벨슈타인을 떠나 계셨던 거예요? 가족 모두를 속이면서?”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아뇨, 저는 솔리아페 님을 잘 모르고, 솔리아페 님도 저를 잘 모르시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상관없는 일은 아니에요. 이제 저도 벨슈타인의 가족이니까요.”
이대로 둔다면 솔리아페의 죽음으로 인해 세 사람이 미쳐 버리는 결말로 흐르게 될지도 몰랐다.
기껏 힘들게 지켜 온 벨슈타인 가문이 흔들리는 걸 손 놓고 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벨슈타인가는 루시엘에겐 새로운 가족, 새로운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이 잘못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솔리아페 님과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막아야 해. 솔리아페 님의 병이 나을 방법이 없을까.’
피닉스의 강한 생명력이 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루시엘이 잠시 그런 생각에 젖어 있는 것도 모르고, 솔리아페가 숨을 내쉬듯 말했다.
“……제발 모른 척해 줘.”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게요. 대신에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제 도움을 받아 주세요.”
루시엘은 맑은 눈동자로 호소했다.
솔리아페는 이 작은 아이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나를 도울 방법은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솔리아페 님, 그럼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 주세요.”
루시엘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솔리아페 님의 비밀을 하나 알았으니까, 제 비밀을 알려 드릴게요. 들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꿈에서 미래를 볼 줄 알아요. 그래서 분명히 기억해요.”
루시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솔리아페는 그런 아이를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쉬이 믿을 수 없는 말이기에.
“……솔리아페 님의 병이 늦게 밝혀질수록 시아빠와 키제프, 레오니 세 사람에게 그 영향이 더 크게 갈 거예요. 그것도 매우 안 좋은 쪽으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