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63)화 (63/282)

<63화>

솔리아페는 제국의 명문가 중 하나인 랜버트 후작가 출신이었다.

먼 과거에 황후를 배출했던 랜버트 후작가.

그러나 향후 다른 가문에게 밀려 더 이상 황후를 배출하는 일은 없었다. 솔리아페의 남동생 유리스만이 황실 기사로 임명되어 황실과 가느다란 끈을 이어 오고 있었고 여동생 라리에트가 사교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 황후를 셋이나 배출한 힐스 후작가의 입김 한 번이면, 랜버트는 흔들릴 거라는 말들이 많았다.

솔리아페의 부모인 랜버트 후작가 내외도 그녀가 황후가 되길 바랐다. 모든 것은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황후 수업이라는 이름 아래, 엄격한 교육을 강제로 받아야만 했다. 솔리아페는 그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황태자비 경연에 나간 적도 있었으나, 숨 막히는 황실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스스로 포기를 선언했다.

그때부터 몰래 동경하던 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 그녀에게 벨슈타인 공작가는 최적의 상대였다.

사교계에 억지로 진출하지 않아도 되었고, 가문과 가문과의 결합으로 봐도 이상적이었다.

벨슈타인 공작 부인이 되자 부모님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 솔리아페는 즐거웠다.

애정 없는 결혼으로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함께 검술과 마법을 익히며 한결 가까워졌다.

우정과 비슷한 것이었고 키제프를 가지면서 그 감정은 사랑으로 변했다.

그러나 레오니를 낳고, 아이가 이제 막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 솔리아페는 의사에게서 병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누구보다 스스로 육체를 굳게 단련해 온 그녀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겨우 가진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 의사에게서 말이 새어 나갈까 봐 큰돈을 주어 내보냈다.

루이비드가 이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솔리아페가 과거를 회상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레오니는 아까 그녀의 손으로 직접 자장가를 불러 재워 주고 돌아왔는데.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이 병에 걸려 죽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불치병입니다. 현존하는 치료제도, 치료 마법도 소용없을 겁니다.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하시지요.’

의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북부에서 마물 토벌에 참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었다.

구할 수 있는 약은 모조리 먹어 보았고, 토벌대 동료였던 사제에게 치유 마법도 받았지만 소용없었다.

하프 드래곤인 이벨린에게 도움을 요청할까도 싶었지만…….

그녀는 오래전 길리아트와 함께 벨슈타인 가문을 세울 적 이 공작성의 영지 위에 드래곤의 가호를 내리기 위해서 과도하게 마법을 쓰다가 힘의 일부를 소실했다고 들었다.

만약 이벨린에게 알린 후에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가족에게 상처만 입히고 떠나게 될 터였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어차피 떠날 생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렇게 죽고 싶었다.

* * *

루시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고 문이 열리지도 않아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밤이 늦었으니까 주무시는 건지도 모른다.

왠지 마음이 답답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지나가던 베시가 루시엘에게 곰돌이 귀가 달린 담요를 머리부터 폭 덮어 주었다. 담요에 구멍이 나 있어서 마치 케이프를 두른 것 같았다.

“아가 마님. 큰 마님께서 테라스로 잠깐 오라고 하시던걸요. 주실 물건이 있다고요.”

“주실 물건이요?”

루시엘은 담요로 몸을 감싼 다음, 종종종 테라스로 나가 보았다.

분홍색의 편안한 원피스를 입은 이벨린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루시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루시엘은 이벨린 앞으로 포르르 다가갔다. 반가움에 눈을 반짝이는 손주 며느리가 귀여워서 이벨린은 루시엘의 하얀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음…… 생각이 많아져서 아직 잠이 오지 않는구나. 게다가 나는 인간식 수면법은 어색해서 네 시간 이상 못 자겠거든.”

“……앗, 피곤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렇지 않아요. 이 할미는 지난 수년간 기운을 많이 축적해 두었거든. 사실 안 자도 끄떡없을 거란다.”

“그렇구나.”

루시엘은 속으로 드래곤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졸릴 테니 빨리 용건부터 해야지.”

“……아뇨, 안 졸려요.”

루시엘이 고개를 젓자, 땋아 내린 은발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혹시 밤늦게까지 안 자는 건 아니지? 어린이는 한참 자라야 하잖니.”

이벨린의 애정 섞인 잔소리에 루시엘이 배시시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벨슈타인 남자들이 전부 자리를 비웠구나.”

“그러게요. 그렇지만 이벨린 할머니와 솔리아페 님도 계셔서 성이 빈 느낌은 들지 않아요.”

“그러게. 솔리아페가 돌아왔을 줄은 예상 못 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지. 잘된 일이야.”

루시엘은 문득 루이비드의 생각이 났다. 누구보다 솔리아페 님이 돌아오신 걸 가장 기뻐하실 테니까.

“시아빤 잘 계시겠지요?”

“걱정 말렴. 말로는 시찰이지만 아마 마물 사냥이 한참일 게다. 어쩌면 지금쯤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단다.”

“아하, 솔리아페 님이 오셨으니 어서 두 분이 만나시면 좋겠어요. 시아빠께서 안 계시니까 적적하기도 하구요.”

공작이 성을 비운 지 고작 삼 일인데, 그를 걱정하는 어린 루시엘이 기특했다.

‘루이비드가 며늘아기 하나는 잘 들였구나.’

루시엘을 제외한 벨슈타인의 아무도 영지 시찰을 떠나는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성에 있어도 한 달 정도 안 만난 적도 있을 정도로 서로 소홀한 편이었다.

루이비드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아이였다. 손안에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아이.

루이비드는 드래곤의 이능을 이어받지 않았지만, 그 피는 강하게 발현되어 뛰어난 마법의 재능과 강한 신체를 가졌다.

사실 그녀의 고향인 드래곤의 땅 드라칸에서는 아직도 이벨린의 아이를 데려오기를 원하고 있었다.

핏속에 흐르는 드래곤의 이능을 깨우치게 하려고 말이다.

하지만 이벨린은 아들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 전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놓고 드래곤의 핏줄을 거부하는 건 아니었지만, 드래곤의 세상에 편입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의중을 품고 있었다. 애초에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벨린은 잠시 상념을 떨쳐 버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흰 상자를 루시엘 쪽으로 밀었다.

“루시엘. 아무래도 이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겠구나.”

“이게 뭐예요, 할머니?”

“열어 보렴.”

상자를 연 루시엘의 눈이 반짝 뜨였다. 새빨갛게 핀 장미꽃에 금빛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루시엘이 이벨린을 깨우기 위해서 구해 왔던 바로 그 피닉스의 장미였다.

“할머니, 이것을 왜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네가 힘들게 구해 왔으니까, 네가 갖는 것이 마땅한 것 같다. 나는 이제 완전히 수면기에서 깨어났으니까 더는 쓸 일도 없고 말이지.”

“아…….”

“내가 다시 잠들면 그걸 다시 사용해 주렴.”

이벨린이 농담처럼 말했다.

“감사히 받을게요, 이벨린 할머니.”

루시엘은 피닉스의 장미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참, 생각난 김에 말해 보거라. 결혼식과 동시에 네 생일이지 않니? 생일 선물로 무얼 줄까?”

“평소에도 잘 챙겨 주셔서 필요한 건 없어요.”

“그래? 우리 루시엘이 달콤한 디저트를 무척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귀여운 인형도 좋아하고?”

“……그건 사실이지만 괜찮아요.”

“정말? 그럼 아직 시간이 있으니 생각해 오도록 해라. 알았지?”

“네.”

“잘 자렴, 루시엘.”

이벨린이 웃으면서 손을 들자, 루시엘의 머리 위로 별 가루처럼 부서지는 빛들이 사르륵 스며들었다. 잠시 그녀의 드래곤 마나가 느껴져서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이에요?”

“그래. 드래곤의 가호란다. 악몽을 물리쳐 주지.”

“그런 것도 있구나. 근사해요. 감사해요, 할머니.”

“꿈꾸지 말고 푹 자렴.”

이벨린은 루시엘을 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맑고 투명한 마나는 본능적으로 모든 존재들을 끌어당기곤 했다.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만 정령들이 루시엘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마나가 너무 깨끗해서 그런지 몰라도 쓸데없이 저 아이를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구나.’

루시엘은 방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계획을 짜 놓은 빨간색 노트를 펼쳤다.

거기에 새로운 리스트들을 추가했다.

보석을 숨길 공간 찾기.

텔레포트 마법 배우기.

마도사 에리카 찾기.

보석을 각성하면서 새로운 할 일들이 많이 늘어났다.

생각보다 보석을 생성하는 일이 더 즐거웠지만 보석에 숨겨진 원소의 힘을 어서 찾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마법의 능력도 한층 강해지리라.

‘강해져야 해. 힘을 얻어야 해.’

루시엘의 눈이 별빛처럼 총총히 빛났다.

베시에게 부탁해 예쁜 화병에 피닉스의 장미를 꽂아 두었는데,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가루가 루시엘의 방 안을 은은히 비추어 주었다.

이벨린 할머니가 걸어 준 드래곤의 가호를 받아서일까.

루시엘은 정말 꿈꾸지 않고 편안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루시엘의 머릿속에 울렸다.

―요정의 아이야. 일어나 보렴.

“우움…….”

―얘야. 나는 피닉스란다.

그 말에 루시엘은 잠이 번쩍 깨고 말았다.

“피, 피닉스……? 정말 피닉스 당신인가요? 여긴 어떻게……?!”

루시엘이 놀라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야. 어제 받은 피닉스의 장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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