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각하, 눈보라가 심합니다. 이만 병참으로 돌아가는 게 어떠십니까?”
휘오오오.
매서운 눈보라에 목소리가 묻혔다. 루이비드는 뒤따라오는 단장 자르가의 말에 침묵한 채, 말을 타고 마물의 뒤를 추격했다.
다그닥, 다그닥!
집채만 한 크기의 블랙 보어를 바짝 따라잡은 루이비드는 놈이 속도를 더 내기 전에 창을 던졌다.
창이 정확히 블랙 보어의 목덜미에 박히며, 쿠웅 하고 커다란 덩치가 둔탁하게 쓰러졌다.
그제야 루이비드가 말이 멈추더니, 내려서 창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자신조차도 버거운 마물을 단숨에 죽이는 모습을 보니, 자르가는 루이비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한 마법사와는 다르다.
타고난 골격부터가 전사의 것에 가까웠고 기민함과 완력, 기량을 충분히 훈련했더라면 검술은 자신보다도 더 뛰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러니 더욱 두려운 상대였다.
특히 상대를 제압하는 저 살기는 인간이든 마물이든 바짝 얼어붙게 만들었다.
자르가는 상대를 죽인 주군의 붉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괜스레 오한이 들곤 했다.
웬만한 날고 긴다는 장수들은 전부 만나 본 그였음에도 말이다.
하여, 주군은 자르가가 두려워하는 두 명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길리아트지만, 냉혹한 성정으로 미루어 본다면 공작 쪽이 더 두려웠다.
그러나 실력과 반비례해 벨슈타인에서 가장 소문이 느린 그인 만큼 이제야 소문을 들었다.
‘단장님, 그거 아십니까. 우리 각하께서 완전 며느리 바보랍니다. 아가 마님만 보면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활짝 웃기까지 하신다는데요?’
그때는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이미 그를 뺀 기사단의 검은 날개들은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자르가.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나?”
“옛? 아, 아닙니다. 각하.”
저토록 살벌한 위인이 며느리와 함께 계실 적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기에, 그도 내심 궁금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던 터였다.
아무래도 병참으로 돌아가서 엘링턴 부관에게 슬쩍 물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던 차에 루이비드가 외투의 깃을 세우며 말했다.
“나는 한 바퀴 더 돌아볼 테니, 먼저 귀환하도록.”
“……각하, 하지만!”
“기사단을 이끌고 귀환해.”
“……알겠습니다.”
명령에 불복종할 수는 없었다. 자르가와 함께 검은 날개의 망토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자 루이비드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이동했다.
“하.”
루이비드는 새하얀 설원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주기적으로 한 번씩 와서 찾아보곤 하지만, 이 드넓은 설원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벌써 이 년이나 되었나.’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되뇌었다. 기껏해야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마지막으로 떠나던 그 모습이 눈에 선연한데.
그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아니,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당신에겐 미안해. 애들에게도 미안하고.’
깊이 묻어 둔 목소리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가 들어간 자유 길드 연합 토벌대가 마지막으로 휩쓸었다는 곳이 이 북부의 피네 설원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것이 넉 달 전.
샅샅이 뒤진 결과 토벌대가 이미 해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연락 한 번이 없다.
통신구는 물론이고, 루이비드가 선물한 액세서리―추적 마법이 걸린―까지 모든 것은 남겨 두고 간 그녀였다. 정말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검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 토벌대에서 인생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단지 마물 토벌이 목적이었다면, 벨슈타인에 남아 검은 날개를 이끄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뭔가 있다. 다른 이유가.’
* * *
“아가 마님.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큰 마님과 함께 외출을 다녀와야 해요. 레오니 도련님과 식사를 드시겠어요? 사샤에게 식사 시중을 부탁해 놓았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오전부터 두 사람은 외출복 차림으로 루시엘 앞에 나타났다.
“응.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봐, 허리끈도 혼자 묶었는걸.”
혼자 옷 갈아입고 밥 먹기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오늘 입은 옷은 병아리처럼 노란 드레스 위에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귀여운 원피스였다.
루시엘은 두 사람에게 뒤돌아서 혼자 허리끈을 맨 걸 보여 주었다.
“정말 리본을 대칭으로 예쁘게 잘 매셨는데요?”
베시가 루시엘의 리본 묶기 실력에 감탄했다.
“정말? 다행이다.”
루시엘이 보조개가 폭 패도록 활짝 웃었다.
“흑, 그렇게 귀여우시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잖아요. 아가 마님.”
로즈가 루시엘을 안아 주며, 혹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 물었다.
루시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하나 떠오른 게 있었다.
키제프가 이별 선물로 주었던 그 몽글몽글 구름 같고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그것.
“그럼 솜사탕 하나만 사다 줘. 딸기 맛으로.”
“솜사탕이요? 그건 수도에만 파는 것 같은데…… 한번 찾아볼게요.”
“응. 그럼 아무거나 사다 줘도 돼.”
루시엘은 두 사람을 배웅해 주고 나서 공작님이 주신 비스킷 상자를 열었다.
고소한 내음이 확 나서 한 열 개쯤은 먹고 싶었지만, 식사를 해야 하니 세 개만 먹기로 했다.
요즘 들어 이벨린 할머니의 부름으로 에바와 베시, 로즈까지 전부 바빴다. 네 사람은 어딜 그렇게 다녀오는 건지, 다녀올 때마다 마차 가득히 물건을 사다 날랐다.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중얼거렸다.
“또 축제 준비로 바쁜 걸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다.
보석의 힘을 각성한 뒤로 루시엘은 사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틈만 나면 뭉클한 감동과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는 벨슈타인가 사람들 덕분에 심장이 몽글몽글해진 건 물론이고 보석 만들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감정이란 건 억누를 수 없는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루시엘은 비스킷을 한 개만 더 먹고는 책상 서랍으로 다가갔다.
벌써 보석을 넣어 둔 상자가 꽉 차 버려서 이제는 새로운 상자를 하나 더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다이아몬드는 불의 제단에서 만들었던 것 그대로 여전히 하나였다.
지난번 시아빠가 보여 주신 무지개처럼 온갖 색이 다이아몬드 속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영롱하고 투명함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다이아몬드를 손안에 꼭 쥐어 보았다.
그러자 마나와는 다른 커다란 힘이 느껴졌다.
‘이건 뭐지?’
마치 물을 퍼 올리듯 솟아나는 힘이었다. 생명력이라고 해야 할까. 팔딱팔딱 뛰는 것만 같은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따스하고 감미로웠다.
루시엘은 다이아몬드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떤 힘을 가진 걸까?’
다이아몬드가 그랬듯, 다른 보석들도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루시엘은 서둘러 토파즈부터 손에 쥐어 보았다. 눈을 감고 보석이 품은 기운을 느껴 보았다.
하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에메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토파즈와 에메랄드는 제법 묵직해질 정도로 개수가 많아졌다.
그 정도로 감동적이고, 기쁜 순간들이 많았다는 증거였기에, 루시엘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보석의 크기와 투명함, 반짝임도 미세하게 달랐다.
아마도 감정의 크기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과거에는 만들자마자 루시엘의 손에 닿기도 전에 빼앗겨서 보석들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그 보석이 루시엘의 것이 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루시엘은 새삼 벅차올랐다. 이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지킨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건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엔 일렀다. 아무리 벨슈타인가의 모두가 상냥해서 보석을 탐내지 않더라도, 숨길 수 있다면 계속 숨겨야 한다.
게다가 외부 사람과 접촉하거나 외부 장소에 나갈 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보석을 만들 때마다 여기저기 숨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안전하게 보석을 만들 방법을 찾아보자. 루시엘은 보석보다도 더 반짝이는 눈을 댕그르르 굴리며, 곰 인형을 들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응?”
곰 인형에게 물어도 답은 안 나왔지만, 대신 루시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텔레포트.”
길리아트 할아버지처럼 순간이동을 한다면, 보석을 만들기 전에 바로 혼자만의 장소로 이동해서 보석을 만들 수 있다.
지금은 보석이 서랍장 하나도 채우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부족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벨슈타인가 사람들 덕분에 보석이 엄청나게 쌓일 것 같았다.
“보석을 만들 안전한 나만의 공간도 필요해. 그러면 바로 그 공간으로 텔레포트를 하면 되니까.”
나만이 알고 있는 장소…….
숲속 나무 구멍? 빈집? 땅속?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깥은 위험한데……. 게다가 텔레포트를 익히기 전에는 루시엘이 자주 들여다볼 수 없을 것이다.
‘의외로 등잔 밑이 어둡다고 공작성 내부가 가장 좋을지도 몰라.’
루시엘은 공작성을 탐방하며, 적절한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동관은 이미 다 파악했고 본관은 외부인이 너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서관도 지난번에 구경했는데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북관은 행정관으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안 되고, 그렇다면 남은 건 남관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건 평소에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조사 차원으로 가 보자.’
문이 영영 열리지 않는 건 아닐 테니, 언제 문을 개방하는지 지켜봐야겠다.
어쩌면 언락(Unlock) 마법으로 해제가 될지도 모르고.
루시엘은 가방에 간식을 넣어서 둘러매고는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