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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57)화 (57/282)

<57화>

루시엘은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는 공작의 모습을 창문에서 내려다보았다.

영영 안 돌아올 것도 아닌데 괜히 염려가 되었다. 불안한 건 레오니도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졸음이 가신 대신에 풀이 죽은 아이가 루시엘에게 답싹 안겼다.

“괜찮아. 금방 돌아오실 거야.”

루시엘은 제게 안긴 레오니를 작은 손으로 보듬어 주었다.

복도를 돌다가 아이들을 발견한 에바가 둘을 불렀다.

“도련님, 아가 마님. 초코 우유 좀 드시겠어요?”

“좋아요. 레오니도 같이 먹자. 저거 엄청 맛있어.”

“으응. 시러.”

달달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니까 레오니도 먹여야 하는데 아버지가 없어서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안 계시면 이렇게 풀이 죽어 있구나.

하긴, 루시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든든한 벽이 사라졌으니까.

루시엘은 문득 키제프 걱정이 또 들었다. 열세 살이니 영혼은 성인인 자신보다는 한참 어릴 텐데도, 묵묵히 아카데미에서 홀로 잘 견디고 있었다.

‘키제프, 별일 없는 거지?’

* *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들이었다.

요즘에는 부엉이가 더는 날아오지 않았다. 키제프는 수업 중간에도, 잠을 자다가도 가끔씩 창문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지난번의 사건 이후로 아카데미는 조용했다. 막시무스와 그 패거리도 키제프를 건드리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고, 이제는 몇몇 남자아이들이 말을 걸기도 했다.

그래도 친구가 없다는 점은 변함없었지만.

봄날의 끝.

아이들이 서서히 반팔 교복으로 갈아입고, 날씨는 점점 더워졌다. 키제프도 오늘은 반팔을 챙겨 입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날도 있었다. 이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끔은 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루시엘의 편지가 생각이 났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생각이 났다. 왜 안 올까? 딱히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안 오니까 또 궁금하기도 하고.

어느새 일상에 파고들었던 무언가가 사라지니까 허전했다.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과 해맑게 미소를 터트리던 아이의 모습.

‘괜히 아카데미에 왔나?’

한 달이면 짧으니 금방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달은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

아버지와는 그 이후로 통신구를 한 적이 없었고, 키제프는 수업이 끝난 후 엘링턴에게 연락해 보았다.

―아아, 아가 마님 말씀이십니까? 공작성에 잘 계실 겁니다. 지금 야외에서 이동 중이라, 통신은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도련님.

‘잘 있구나.’

방금 어쩐지 안심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키제프는 푸스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고 있을 때 아주 오랜만에 부엉이가 날아왔다. 키제프는 놀랍고도 반가운 눈으로 벨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 주었다.

벨을 쉬게 해 주고, 급하게 편지를 열어 보았다.

「안녕.

잘 지내고 있어? 오늘은 성이 텅 빈 느낌이야. 공작님도 안 계시고, 키제프도 없어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니 테드라는 이름 대신 루시엘로 보내는 첫 편지잖아. 아, 뭔가 부끄러운데?

얼마 전에는 가족의 날이었는데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어. 나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알 거 같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키제프 선물은 없지만, 대신 이거 보여 줄게. 자작시야.

머나먼 시간을 건너

그대를 다시 만난 건 운명일까.

그대는 내게 오직 별이었네.

나에게 희망을 주는 별.

나 오직 소망이 하나 있다면

나 역시 그대의 별이 되었으면.」

아홉 살짜리 아이가 썼다기에는 깊은 감정이 담긴 글이었다. 인생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애절한 편지 같기도 했다.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역시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고 애틋한 기분이지?

마치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눈을 마주했을 때처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키제프를 덮쳐 왔다.

키제프는 편지의 추신에 붙은 말들을 보고는 픽 웃었다.

「생각해 봤는데 나 먹고 싶은 거 있어!

로즈가 그러는데 수도에는 명물 디저트들이 한가득 있대.

초코 마들렌이랑, 동물 솜사탕, 조개 마카롱.」

말만 들어도 설탕 가득한 디저트들이었다. 그 아이처럼 달콤하고 말랑한.

‘설마 이걸 전부 다 사 오라는 건 아니겠지?’

“몹시 귀찮네.”

그렇게 곤란하단 얼굴로 말은 했지만 키제프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 * *

“……프엥취!”

코끝과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기침을 터트린 루시엘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베시가 따뜻한 물을 한잔 건네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감기에 걸리신 걸까요?”

“감기……?”

창밖의 바깥 날씨는 온화하고 화창한데, 감기에 걸릴 일이 뭐가 있을까.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사샤가 헐레벌떡 달려와 방문을 두드렸다.

“큰일이에요. 레오니 도련님이 열이 펄펄 끓고 계세요.”

“레오니가?”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레오니는 말짱했는데. 루시엘은 사샤와 함께 아이의 방에 다가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이의 잔뜩 부푼 새빨간 뺨, 이마는 뜨거운 열이 가득했다.

루시엘은 레오니를 내려다보며 짐작했다.

“몸살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사샤는 어서 시클라인 선생님을 불러…….”

“이미 다녀왔는데 아직 출근 전이라 자리에 안 계세요.”

사샤가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했다.

“그럼 다른 주치의 선생님이라도 불러야 해.”

“다른 선생님도 아직…….”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거 같아. 우선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서 이마의 열 좀 내리게 해 줘.”

“네!”

루시엘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시클라인은 출근하기 전에도 온실 정원에서 들렀다가 온다고 했으니까,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선 여기서 기다려 줘.”

루시엘은 그리 말한 뒤 총총 달려 나갔고, 뒤따라온 베시는 자신이 대신 다녀오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 * *

완연한 봄이기 때문일까.

한결 싱그럽게 물이 오른 약초들은 쑥쑥 자라만 갔다. 약초를 돌보는 시클라인의 손끝이 야무졌다.

루시엘에게 온실 정원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들은 후로, 그녀는 거의 매일 이곳을 제집같이 드나들었다.

“흐아아암.”

시클라인이 길게 하품했다. 밤에는 약초학을 공부하고, 낮에는 근무하면서 약초까지 돌보려니 잠이 부족한 탓이었다.

‘선생님이 주신 파스가 너무 시원해서 그런데, 하나만 더 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어제는 기사에게 그런 기분 좋은 말도 들었다. 참으로 뿌듯했다. 아가 마님 말씀대로 약제사라는 꿈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온실 정원에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헉헉!”

루시엘이 숨을 한참 몰아쉬었다. 시클라인이 반가운 얼굴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아가 마님, 안 그래도 방금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큰일 났어요. 레오니가 아파요.”

“네에? 이런,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요?”

“열이 펄펄 끓고,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몸살감기인 것 같아요.”

“하지만 만들어 놓은 감기약이 없을 텐데…….”

시클라인의 말에 루시엘이 약초들을 가리켰다.

“저기에 재료가 있잖아요. 타테아가 감기, 몸살에 좋다고 했으니까요, 그쵸?”

“맞아요. 내 정신 좀 봐. 그럼 아가 마님의 타테아를 조금 빌리도록 할게요.”

“물론이에요. ……프엥취!”

“어머, 아가 마님도 감기에 걸리신 모양이에요.”

“그러게요, 날도 따뜻한데 이상해라.”

시클라인은 타테아의 잎을 따서 빻고는 즙을 낸 후, 오래도록 졸였다. 그러자 녹색의 감기약이 완성되었다.

“자아, 이걸 어서 도련님께 먹여야겠어요.”

두 사람은 감기약을 가지고 어서 레오니의 방으로 달려갔다.

“사샤, 이 약을 하루 세 번 끼니 후에 도련님에게 드리면 될 거예요.”

“감사해요.”

사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스푼 가득히 녹색 약을 따라서 아이의 입에 흘려 주었다.

결론적으로 감기약을 이틀 동안 먹은 레오니는 씻은 듯이 나았다. 물론 감기가 조금 나았을 때부터 녹색 약이 맛없다고 도망 다녀서 애를 먹었지만.

“고마쑴미다, 근데 담에눈 초코맛으로 만드러 주데요.”

레오니가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루시엘도 하필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레오니가 아파서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덜었다.

“시클라인 선생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아가 마님도 이 약 드셔야 해요.”

시클라인이 웃으면서 루시엘에게도 감기약을 건넸다.

“저는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프엥치!”

“그것 보세요. 가볍게 계속 재채기하시잖아요.”

“알겠어요.”

루시엘은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받아서 복용했다. 효과가 제법 좋았다. 재채기가 사라진 건 물론이고, 따끔거리던 목의 증세까지 전부 사라졌다.

그건 루시엘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다른 감기약보다 훨씬 잘 듣는 것 같아요.”

루시엘에게 감기가 옮은 베시도 그렇게 말했다.

시클라인이 만든 약은 효과가 탁월했다. 같은 재료로 만든 약이라도 효과가 다를 수 있구나.

루시엘은 보석의 힘을 각성한 뒤로는 시클라인에게 하루빨리 자신의 마나 영양제를 만드는 일을 맡기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실 정원의 약초들, 티에리의 열매까지 완벽하게 맺혀야 할 터였다.

과거 그녀는 황태자에게 고했다.

‘마나 영양제는 직접 재배한 신선한 약초들로 정성 들여 만들어야 효과가 가장 좋답니다.’

루시엘은 약초를 돌보기 위해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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