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벨슈타인의 핏줄은 본래 강한 마력과 동시에 튼튼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기에 레오니도 지금까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무탈하게 잘 자라 주었다.
키제프는 제 몸에 비해 강한 마력 때문에 몇 번 고생을 했지만, 마찬가지로 잔병치레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체구도 작고 유약해 보이는 루시엘을 보니 걱정이 드는 게 당연했다.
‘무엇이든 잘 먹이고 보듬어서 아프지 않게 잘 키워야 할 텐데.’
한 가지 마음이 놓이는 것은 루시엘이 음식을 골고루 잘 먹는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이 또 무척 귀여워서 자꾸만 뭔가를 먹이게 만들기도 했다.
루시엘이 오물거리면서 초콜릿을 먹는 걸 본 루이비드가 피식 웃으며, 서랍장에서 또 비스킷 하나를 꺼내 왔다.
“루시엘. 이거 봐라.”
동물 모양 비스킷이었다. 토끼, 개, 사자, 곰의 얼굴 같은 동그란 비스킷.
“으으, 너무 귀여워서 못 먹을 것 같아요.”
“심약하긴.”
공작의 배려 덕에 루시엘은 푸짐한 간식은 물론, 그날 오후 에바에게서 약초 묘목과 씨앗, 양분이 가득한 흙을 받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에바. 잘 기를게요.”
“마법 도구들이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온실 정원에 있는 도구들은 거의 마법이 걸려 있어 아이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에바가 싱긋 웃으면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때마침 시클라인이 헐레벌떡 하얀 가운을 입은 채로 달려왔다.
“아가 마님! 늦어서 죄송해요. 기사단원들의 영양 체크를 하느라.”
“응? 시클라인은 소아과 담당이 아니에요?”
“맞아요. 그렇지만 아이라고 해 봐야 공작성엔 도련님과 아가 마님 두 분밖에 없으니까요. 기사단 쪽은 항상 의료 인력이 부족하거든요. 거친 훈련을 하시느라 타박상도 잦은 편이고요. 그래서 간편하게 환부에 붙일 파스를 만들고 있어요.”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요?”
루시엘이 눈동자를 크게 뜨고 묻자, 시클라인이 생긋 웃었다.
“그럼요, 아가 마님이 심으실 루가 나무가 주 재료인걸요! 사실 고르신 약초 모두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약초 세 가지라서 놀랐어요.”
“그렇구나. 그럼 시클라인은 약초를 배합해서 약을 만들 수도 있겠네요?”
“물론이에요.”
자신 있게 대답하는 시클라인을 보며 루시엘은 속으로 옳거니 싶었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날 뻔했다.
‘생각보다 마나 영양제를 빨리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근데 왜 그러세요, 아가 마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선은 이거 심을까요?”
“좋아요.”
두 사람은 소매를 슥슥 걷고 화단 앞 간이 테이블에 놓인 준비물들을 바라보았다.
타테아와 티에리는 씨앗, 루가 나무는 묘목이었다.
“어디 보자. 우선 화단을 삽으로 푼 다음 루가 나무 묘목부터 심어야겠어요.”
“그럼 모종삽부터 찾을게요.”
두사람은 화단을 파헤치기 위해서 도구함에서 모종삽을 찾아냈다. 도구함에는 삽과 물뿌리개, 가위가 있었는데 전부 금빛이 둘러져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값비싼 원예 도구들은 처음 봐요. 실은 이 온실 정원도요. 정말 근사해요.”
루시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여기에서 약초가 잘 자랄까요?”
“네!”
시클라인은 한눈에도 이 온실 정원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루시엘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꺼내 보았다.
“시클라인 선생님, 여기 화단 꽤 넓으니까 선생님 심으실 약초가 있으면 함께 써요.”
“……그래도 될까요?”
루시엘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공작님께 허락은 받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대신에 제 약초도 돌봐 주시고, 또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아가 마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요.”
“히히.”
‘이제 약초가 잘 자라기만을 기다려야겠어.’
“아, 이쪽부터 파 보세요.”
“네!”
루시엘이 웃으면서 삽으로 흙을 파내려는데 삽이 허공 위로 둥실 떠올랐다.
“앗.”
“마법이 걸려 있으니 명령을 내리시면 될 거예요!”
“이리 와! 여기 파 줘!”
루시엘이 작은 키로 발돋움을 하며 손을 흔들자 모종삽이 놀리듯 더욱 위로 올라갔다. 루시엘이 안타까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내 말 안 듣네……. 이럴 때 지팡이를 갖고 있으면 마법을 쓸 텐데…….”
그러나 시클라인이 명령하자 높이 솟아오르던 삽이 움찔 반응했다. 그러곤 얌전히 사뿐사뿐 내려와 화단 위로 앉았다.
까딱 몸을 움직인 삽이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두 사람의 치마에 묻은 흙이 후두둑 떨어지긴 했지만 이제야 진행이 착착 되는 듯했다.
“이제 거의 다 됐어요.”
루시엘은 씨앗과 묘목을 다 심고 몇 번이나 토닥토닥 다독거렸다.
쏴아아.
마법이 걸린 황금빛 물뿌리개를 가져와 물도 주었다. 어딘가 허전해서 앞에 이름표까지 붙여 주었다.
아직 시작일 뿐이지만 그럴듯한 화단이 완성되었다는 게 몹시 기뻤다.
“다 했다. 시클라인 선생님 덕분이에요!”
루시엘은 어느새 방울방울 맺힌 땀을 닦아 내면서 바닥에 앉아 미소 지었다.
“빨리 싹이 나서 쑥쑥 컸으면 좋겠어요.”
“분명 그럴 거예요.”
시클라인도 웃으면서 화단을 바라보았다.
“앗, 저 이제 그만 가야겠어요. 약초학도 공부해야 하고, 말린 약초들도 걷어야 해요! 아가 마님, 또 뵈어요!”
시클라인이 후다닥 정원을 나갔다. 그녀는 정말 바쁘게 사는구나 싶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야. 잘됐으면 좋겠다.’
루시엘은 그녀를 도울 일이 뭐 있을까 생각하면서 응접실로 돌아왔다. 마침 성안의 커튼을 보면서 다른 시녀들과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에바와 눈이 마주쳤다.
“아가 마님, 약초는 잘 심으셨어요?”
“네!”
“부드러운 색으로 커튼을 바꾸려고 해요. 아가 마님께서는 혹시 어떤 색이 좋으세요?”
에바가 자그만 세 가지 천의 견본을 내밀었다. 하늘색, 분홍색, 연한 코코아색이 있었다.
전부 예뻤지만 중후한 공작성의 분위기와는 코코아색이 가장 조화로워 보여서 루시엘은 그것을 집었다.
“코코아색에 아이보리색 레이스 커튼이 같이 있으면 예쁠 것 같아요.”
“우리 아가 마님께서는 보는 안목이 있으신 것 같네요. 의견 감사해요.”
“천만에요.”
천진난만하게 웃는 루시엘이 귀여워서 에바는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다.
“혹시 시장하시진 않으세요? 쿠키와 우유를 가져다드릴까요?”
“그럼 부탁할게요.”
루시엘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이방에 가서 쉬고 계시면 가져다드릴게요.”
“네!”
루시엘은 양말 놀이방으로 쪼르르 올라갔다. 여기만 들어오면 마음의 행복이 찾아왔다.
양말과 폭신폭신한 인형들, 래빗 성까지. 루시엘이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 있으니까.
루시엘이 양말과 인형 속에 파묻혀서 누워 있을 때 달콤한 향기와 함께 에바가 들어왔다.
“오늘은 그냥 우유가 아니라 특별한 우유인데 한번 드셔 보세요.”
“특별한 우유요?”
루시엘이 귀를 쫑긋 세우며 몸을 일으켰다. 인형들 사이에서 가장 귀여운 인형이 쏙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에바가 트레이에서 음료와 쿠키 접시를 테이블로 옮겼다.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에바는 아이의 귀여움에 심장이 일렁거렸다.
“보세요. 우유에 초콜릿이 퐁당 빠져서 초코 우유가 되었대요.”
“……에바?”
에바가 저렇게 애교스럽게 말하는 건 처음 본 것 같아서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바는 부끄러움에 잠시 몸이 굳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아가 마님. 제가 주책맞게……. 초코 우유라고 하네요.”
“아하! 제가 좋아하는 두 개가 만났네요. 에바, 방금 너무 귀여우셨어요!”
루시엘이 에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작고 오동통한 손으로 자신을 잡으면서 귀여운 아이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에바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가 마님이야말로 정말로 사랑스러운 분이에요. 자요, 어서 드셔 보세요. 요즘 날이 제법 포근해져서 시원하게 가져왔어요.”
루시엘이 유리잔에 꽂힌 유리 빨대를 쪽쪽 빨았다. 이내 입안으로 들어온 달콤한 초코와 우유의 부드러운 조화란.
루시엘의 눈이 더욱 커지게 만드는 맛이었다.
“여름에 먹는 코코아인가 봐요!”
“네, 맞아요. 당분간은 이걸로 가져다드릴게요.”
루시엘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역시 벨슈타인 사람들은 루시엘을 폭신한 케이크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기분 좋게 해 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건 아주 특별하고 소중해지는 느낌이었다. 에바가 나간 후, 루시엘은 놀이방에서 달달한 휴식을 만끽했다.
한참 동안 루시엘이 인형에 파묻혀서 새근거리다 잠이 들자, 찾아온 이들은 모두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돌아갔다.
아이가 푹 잘 수 있도록.
* * *
제국을 다섯으로 쪼개면 그중 하나가 벨슈타인 공작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공작가의 영지는 드넓었다.
북부의 끝 경계선 너머 피네 설원부터 제국의 수도와 잇닿아 있는 무역과 와인의 생산지인 리카르도, 서쪽 해역의 시작인 스텔라 섬까지.
영지만 드넓은 것이 아니라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도 컸다. 전쟁 때는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서 마법 병력을 지원했고, 제국을 위해서 때로는 거액의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도시 간의 이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이동 게이트 사업 역시 막강한 마력과 마정석을 지닌 벨슈타인이 없었다면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족의 핏줄이 섞였다는 이유로 두려움의 대상이 된 벨슈타인과 척을 지는 귀족들이 많았다. 두려움을 주는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곧 만인의 적이 되었고 악당이 되었다.
황가와는 아직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언제 귀족들의 편을 들어 줄지 몰라 위태로웠다.
황제와 초대 가주인 길리아트의 사이 역시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떠돌았고, 실제로도 교류가 뜨막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실은 벨슈타인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었다.
수도 아르테에서는 그런 벨슈타인 공작가에 들어간 어린 며느리를 두고 소문이 무성했다.
먼 이국에서 볼모로 잡아들인 아이라는 이야기부터 공작의 사생아라거나, 새롭게 딸로 입양한 아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것을 전부 전해 들은 루이비드의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마지막 건 진짜 염두에 두고 있는 건데,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