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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40)화 (40/282)

<40화>

「아카데미에 관련된 정보를 알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빠를 거야. 일단 네가 궁금해하던 약초에 대한 답은 줄게.

타테아는 감기, 몸살. 루가 나뭇잎은 염증, 통증 완화. 키에리 열매는 해열에 좋아. 키우는 법은 ……(중략)……. 주변에 약제사나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수월할 거야.

근데 너 남자 맞아?」

쌀쌀맞은 답장이긴 했지만 약초에 대해서 정성껏 적어 준 것 같았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혹시 내가 보냈다는 걸 벌써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까지 했었으니까, 들키면 정말 창피해질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 막시무스까지 있으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루시엘은 다음 편지에서는 더욱 열심히 남자애인 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침대 옆에 놓인 곰 인형을 키제프라도 되는 양, 쳐다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무 빨리 나인 걸 눈치채진 말아 주라.”

루시엘은 키제프가 보낸 편지를 다시 한번 슥 읽어 보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채웠다.

꼼꼼하게 채워진 편지 내용은 무척이나 유려한 필체를 가지고 있었다.

“글씨도 잘 쓴다.”

계약일 뿐이지만 남편에게 받은 첫 편지라서일까.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남편이라는 호칭을 떠올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런 거 귀찮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성실하게 답장도 해 주고.”

어쨌든 약초 정보를 알게 되었으니까 다음은 시클라인을 찾아가 봐야지. 그녀는 현재 소아 주치의로 일하고 있지만, 약초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루시엘은 과거 황태자와 시클라인의 대화를 듣게 되었던 일을 떠올렸다.

‘레니트 선생의 딸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약초 학술원에 다니게 해 주겠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고 황성 약제사가 되어 내 힘이 되어 주도록.’

‘저,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약초 학술원에 들어가 황성 약제사가 되는 건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녀의 원래 꿈은 아버지인 레니트 선생을 따라서 약초 학술원에 들어가 훌륭한 약제사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죽은 레니트 선생은 딸이 약제사가 되는 걸 반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왜 반대했을까.’

어쨌든 시클라인은 황태자의 후원을 받으면서 황성 약제사로 한동안은 승승장구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은 길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서 황제가 먹는 약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반란 주동자로 거론된 후작과 함께 사형되었다는 소식만을 들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황성의 약제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런 결말은 피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그런 결말을 맞이할 줄 짐작했던 걸까? 이번 생에서는 그녀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면 좋겠어.’

그렇게 다음 움직일 계획을 짜던 루시엘은 곧 새근새근 잠들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루시엘은 시클라인을 찾아갔다. 마침 시클라인은 자그만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표정은 정말 애정이 담뿍 담긴 얼굴이라 보는 루시엘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아가 마님. 어서 오세요.”

“엇, 선생님도 식물을 기르시는 거예요?”

“네, 요즘 약초학 책을 보고 있는데 약초로 약을 만들어 보려고요.”

루시엘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실은 선생님께 이 약초들 기르는 방법을 물어보려고 왔어요. 약초에 대해 잘 아시는 거죠?”

“네, 아는 선에서 알려드릴게요.”

루시엘은 아이다운 감탄을 하면서 약초 이름을 적어 온 쪽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시클라인의 눈이 커졌다.

“타테아, 루가 나무, 티에리 열매까지. 다들 실제 약재로 많이 쓰이는 것들이에요. 약초는 왜 기르시려고요?”

“빈 화단이 생겼는데 기왕이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식물을 기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기특하고 대견한 생각을 하셨네요.”

시클라인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약초 기르는 법을 자세히 적어 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루시엘이 배시시 웃으면서 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약제사가 되고 싶진 않으세요?”

루시엘을 바라보던 시클라인의 눈동자가 이내 흐려졌다. 어두운 얼굴이 되고 말았다.

“황성 약제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돈도 많이 들고, 너무 어려우니까요. 당장 먹고 살아야 해요.”

“그렇구나. 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꾸준히 하셨으면 좋겠어요. 꼭 황성에만 약제사가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다른 길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꾸준히 공부해요!”

루시엘의 위로에 시클라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려서부터 약초를 보고 자랐고, 만드는 것도 사람을 돕는 것도 좋아요. 아가 마님 말씀이 맞아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겠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나중에 부탁 하나해도 되지요?”

“네, 물론이에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시클라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저는 약초를 사러 가 볼게요.”

“네, 나중에 도우러 갈게요.”

루시엘은 시클라인이 적어 준 메모를 들고 구겨지지 않도록, 가져온 책에 곱게 끼운 다음 종종종 달려갔다. 다음으로 에바를 찾아가려다가, 방향을 바꾸었다.

“시아빠께 직접 말씀드리면 기뻐…… 하시지 않을까?”

화단까지 선물해 주셨고, 그는 내내 루시엘이 무얼 심을지 궁금한 눈치였다.

루시엘은 공작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갈 때마다 바짝 긴장이 되지만.

어느새 집무실 문까지 다다랐다. 원형 패를 보니, 검은 드래곤 쪽으로 걸려 있었다.

‘안에 계신다.’

루시엘이 자그만 주먹을 쥐어 문을 두드렸다.

“시아빠. 저예요.”

“루시엘?”

문이 열리면서 공작이 반가운 낯으로 루시엘을 맞았다.

“어서 와라. 그래, 뭘 줄까?”

공작이 자연스럽게 달콤한 간식이 잔뜩 있는 서랍장으로 루시엘을 안내했다. 루시엘은 그가 꺼내 주는 초콜릿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곧 입을 열었다.

“저, 드디어 화단에 심을 식물을 정했어요.”

“무엇이지?”

공작이 소파에 걸터앉으며 묻자 루시엘도 쪼르르 다가와 소파 위로 올라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키가 작은 루시엘이 혼자서 올라가기엔 소파가 높았다.

공작은 그런 루시엘을 번쩍 안아 들어 소파 위에 앉혀 주었다.

그 행동이 너무도 다정해서 루시엘은 기뻤다. 이럴 때마다 공작이 친아버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었다.

“약초를 심으려고요.”

루시엘의 말을 경청한 공작이 느긋하게 말했다.

“에바에게 약초 시장에서 사 오라고 해 두지. 어떤 약초를 심을 거지?”

“이것들이에요. 타테아, 루가 나무, 티에리. 전부 일상에서 유용한 약초들이래요.”

“그렇군. 한데 약초에 관심이 있었던가?”

공작이 의외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자 루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둘러댔다.

“기왕이면 벨슈타인에 도움이 되는 식물을 심고 싶어서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 약초들은 마나 영양제로 쓰이지 않고 각각 훌륭한 약재로도 쓰이는 것들이니까. 아픈 사람들에게는 약으로 쓸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벨슈타인에는 소속된 약제사가 없었다. 치료를 받으려면 의사나 치료 사제를 통해야 했다.

“벨슈타인에도 약제사가 있으면, 병사들의 부상이나 잔병은 금세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런 루시엘을 보던 공작도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괜찮은 생각이군.”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공작이 턱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전문 약제사는 아니더라도 주치의는 있으니 그들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루시엘은 자연스럽게 떠올린 척 말했다.

“그럼 시클라인 선생님한테 부탁할래요. 지난번에 코코 시럽을 만든 걸 보니까 약도 잘 만들고 약초학에도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새로 들어온 주치의 말인가?”

“네. 약제사가 꿈이래요. 그쪽으로 공부를 하면 훌륭한 약제사가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요. 온실 정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약초를 가꾸어도 될까요?”

“네가 원한다면.”

“감사해요, 시아빠!”

기뻐하는 루시엘을 지그시 바라보던 공작이 말했다.

“약초를 심겠다니 기특한 생각이다. 아파도 걱정이 없겠군.”

공작이 손을 뻗어 루시엘의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시엘은 그 손길과 한마디 칭찬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오르비아 백작에게선 아무리 보석을 만들어 갖다 바쳐도 들을 수 없었던 말.

그래서일까.

그만큼 시아빠인 공작의 칭찬은 아무리 들어도 달콤했다. 그가 주는 초콜릿이나 젤리보다도 더.

그래서 욕심이 났다.

‘더 칭찬받고 싶어.’

‘더 사랑받고 싶어.’

루시엘은 문득 마음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는 몰랐던 마음의 목소리였는데, 여기 벨슈타인에 와서는 하나둘씩 일깨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묻어 둔 마음들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언니에게는 칭찬을 듣긴 했지만, 어른에게는 듣지 못했다.

어린 시절 루시엘의 언니는 늘 병약했다.

어쩌면 보석을 뽑혔기 때문에 더욱 몸이 약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런 언니는 가벼운 감기나 두통에도 심하게 앓곤 했다.

루시엘은 아무것도 몰라 바르르 몸을 떠는 언니를 곁에서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너무 싫으니까요.”

“……?”

공작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루시엘이 저보다 네 배는 커다란 공작의 손 위로 살포시 자그만 제 손을 올렸다. 그러곤 강아지처럼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염려했다.

“그러니까 시아빠는 아프시면 안 돼요.”

“내가 말이냐.”

루이비드 폰 벨슈타인의 인생에서 아파서 앓았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타인을 앓게 하거나,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든 적은 있어도.

공작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자신을 걱정하는 아이가 귀여워 보드라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야말로 아프지 마라. 연약해서 늘 걱정이군.”

공작의 눈길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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