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6)화 (26/282)

<26화>

“식사가 아주 맛있었던 모양이군.”

공작의 시선이 루시엘의 스커트 단에 닿았다. 열심히 식사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루시엘도 그제야 알아챘다.

“앗, 언제 소스를 흘렸지.”

공작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닦았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차 속도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번화가인 샤를로테 거리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와 분수가 쏟아지는 광장,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음유시인, 화가와 꽃을 파는 상인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루시엘은 거리를 오가는 화사하고 세련된 차림의 신사 숙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샤를로테 거리는 제국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쇼핑지로도 유명했다. 이국의 왕족이나 귀족들도 꼭 한 번씩 다녀갔을 정도였다.

공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곤 루시엘에게 권했다.

“루시엘, 플로린 부티크에 들러서 말끔한 옷으로 입고 가는 건 어떠냐?”

플로린 부티크라면 공작이 루시엘에게 사 준 아동 의류점이었다.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옷가게가 여기 있나요?”

“지점이 두 개니까. 벨슈타인 지점과 수도 본점.”

그 이야기를 듣고는 루시엘의 귀가 쫑긋 섰다. 지난 생에선 감옥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탓에 시내를 구경하거나 쇼핑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직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여유가 있으니 들르지. 잠깐이면 되니까.”

“좋아요!”

루시엘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공작은 눈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면서 눈망울이 커진 루시엘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며느리와 쇼핑이라…….’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문에는 익숙했지만 이렇게 거리로 나와서 직접 옷을 고르는 일은 처음이었다.

평소엔 저택에서 카탈로그를 보고 고르면, 최고의 디자이너와 재단사가 그의 마음에 들 때까지 작업해 대령했다. 그러니 이런 경험이 없을 수밖에.

흰색과 분홍색이 조화로운 건물 앞에 마차가 다다랐다. 플로린 부티크라는 갈색 간판이 있었다.

제법 인기가 많은 모양인지 루시엘과 루이비드가 들어서기 전에도 가게를 드나드는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상류층 자제인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머! 벨슈타인 공작님!”

가게 점원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이 마차의 문장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부티크의 소유가 벨슈타인으로 바뀐 이후, 공작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벨슈타인 공작이 예상보다 더 젊고 잘생겼다는 사실에 그녀의 얼굴은 잠시 상기되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에 루시엘은 마음을 빼앗겼다.

일 층은 여자아이의 옷이었는데 새하얀 토끼와 양, 곰, 말 인형들 사이로 인조 화단이 꾸며져 있었고 어린이 마네킹에는 화사하고 앙증맞은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다.

반짝이는 나비 모빌들이 팽그르르 돌았다. 루시엘이 빙글 몸을 돌려 공작에게 물었다.

“예쁜 가게네요.”

“그리고 네 것이지.”

공작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 점장에게 말했다.

“여기 이 아이가 입을 옷이 필요한데.”

여 점장은 다른 직원들에게 서둘러 손짓했다. 루시엘은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직접 골라도 될까요?”

몇 벌의 드레스를 꺼내 오려다가 루시엘의 말을 듣고 다들 동작을 멈췄다.

“아이가 직접 고르겠다는군.”

“그럼 편안히 둘러보세요, 아가씨.”

“루시엘, 얼마든지 골라라.”

“네.”

루시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홍조 가득한 얼굴로 가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공작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떤 차를 드시겠습니까?”

“레몬 진저 티.”

가게의 한쪽 구석에는 차와 달콤한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티룸까지 함께 있었다. 공작은 점장의 안내로 따라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옷을 고르던 루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공작은 너그러운 미소를 보냈다.

어느새 주변의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아이들의 드레스를 함께 고르러 오는 아버지들이 잘 없었거니와 베일에 싸인 벨슈타인가의 공작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벨슈타인 공작 각하. 이곳에서 다 뵙네요. 저는 벨리타 후작 부인이랍니다.”

딱히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기에 공작이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3초도 머무르지 않았다.

“안녕하시오, 부인.”

짧게 답한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제국의 신문을 곧장 펼쳐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당했다면 무례하다 말했을 일이었지만 벨리타 부인은 물러가지 않고 어렵사리 다시 입술을 뗐다.

“……아아, 그런데 따님을 두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듣기에 따라서 무례한 질문으로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아니오.”

그의 대답에 벨리타 부인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럼 아까 저 아이는 대체…….”

“……그 질문에 내가 대답할 의무가 있소?”

“호호,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귀찮게 굴던 여자는 물러갔지만 루시엘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편 루시엘은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찾았다.

나비의 날개처럼 얇고 보드라운 망사로 이루어진 하얀 레이스 원피스였다. 하늘하늘한 케이프가 어깨를 감싸 주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예쁘다.”

이걸 입고 키제프를 만나러 가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도 같이 예쁘게 보여서 결혼을 허락해 줄지도 몰라.’

“저기…….”

루시엘이 드레스를 입어 보기 위해 점원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총총 다가왔다. 루시엘 또래의 상류층 소녀인 듯했는데 표정이 무척이나 자신만만했다.

다른 드레스도 많은데 굳이 루시엘이 보고 있는 마네킹 앞으로 다가오면서 루시엘을 슥 밀쳤다.

“……무슨 짓이야?”

소녀는 자신보다 작은 루시엘의 차림새를 훑어보곤 입꼬릴 말아 올렸다.

“너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보여서 말이야.”

“…….”

밉살스러운 미소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에 초록 눈을 가진 예쁘장한 소녀였다.

“마리안 부인, 이 원피스 좀 꺼내서 보여 줘요! 이 하얀 원피스 말이에요.”

소녀를 따라 잿빛 머리의 중년 부인이 느긋하게 들어왔다.

“페넬로페, 뭐가 그렇게 급하니?”

“어머니, 이 원피스 좀 보세요. 제게 딱이겠죠?”

두 모녀와 마주치는 순간 루시엘은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페넬로페 폰 카빌은 카빌 후작가의 금지옥엽 막내딸이었다. 카빌 후작의 나이 쉰 살이 되었을 때 품 안에 들어온 늦둥이인 데다, 자신을 쏙 빼닮은 외모를 가진 데다 영악하고 셈이 빨라서 장사에도 소질이 있는 아이라고 보물처럼 아꼈다.

루시엘이 카빌 후작가에 처음 갔을 때 페넬로페가 초록색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이 아이예요? 살아 있는 보석 광산이?’

말할 것도 없이 루시엘이 만들어 낸 보석들은 페넬로페의 사치를 감당하는 데 충당되었다.

혹은 그녀의 드레스를 장식하는 데에도 쓰이곤 했지만, 그 당시 루시엘은 고통과 슬픔, 분노에 의한 보석들만 만들었다. 옵시디언이나 사파이어, 루비 같은 것들.

‘빨간 루비는 지겹고 파란 사파이어는 더 지겨워. 검은색 옵시디언은 왠지 기분 나빠. 새언니, 다른 보석은 못 만들어?’

‘…….’

루시엘의 다른 감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페넬로페는 가짜로 친절을 베풀어 에메랄드를 얻어 낼 만큼 교활한 아이였다.

17살 루시엘과 동갑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후작가의 모녀를 바라보던 루시엘은 고통스러운 과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골 고객인 페넬로페의 부름에 점장 마리안은 냉큼 달려왔다.

“카빌 후작 부인 그리고 카빌 영애, 어서 오세요.”

“이 원피스 입어 볼래요.”

페넬로페는 고집스럽게 원피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루시엘이 빤히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본 점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 하지만 먼저 오신 고객님께서 살펴보시던 옷이라서…… 먼저 의향을 여쭈어보겠습니다.”

단골이니 당연히 제 편의를 먼저 봐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말에 페넬로페가 인상을 팍 썼다.

“뭐라고요? 내가 골랐다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다른 걸 볼게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루시엘이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진 공작이 훤칠한 몸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도 단숨에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는 일부러 들으란 듯이 점장에서 루시엘로 시선을 넘기며 말했다.

“그 원피스, 포장해 주도록. 아니, 그냥 입고 가겠니, 루시엘?”

“……!”

루시엘이 말을 고르고 있을 때 페넬로페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먼저 골랐단 말이에요.”

페넬로페가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그럴수록 루이비드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무례는 그쯤 하지?”

“네? 무, 무슨…….”

“내가 우리 새아가를 30초마다 쳐다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드레스를 먼저 고르고 있던 아이를 밀친 것도, 드레스를 새치기한 것도 영애이질 않나?”

루이비드가 줄이 달린 회중시계를 꺼내 보였다. 돼먹지도 않은 아이를 상대하는 건 퍽 귀찮은 일이었으나 루시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유치해질 수 있었다.

“이 아이, 옷을 보여 달라고 말도 하지 않았는걸요. 먼저 말한 건 저예요.”

“나는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건 봐주지 않아, 카빌 영애.”

공작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페넬로페, 드, 드레스는 많잖니…….”

뒤늦게 공작의 정체를 알아챈 페넬로페의 어머니, 카빌 후작 부인은 딸을 말렸다.

“싫어요. 저게 꼭 입고 싶단 말이에요. 얘, 네가 대답해 봐. 그렇지?”

페넬로페가 심술궂은 얼굴로 루시엘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었다.

‘보석 좀 더 만들어 봐, 새언니. 응?’

천진난만한 척 웃음 지으면서 보석을 졸라 대던 열일곱 살 페넬로페와 눈앞의 어린 페넬로페의 얼굴이 그대로 겹쳐졌다.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얼굴이 구겨졌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제 저 아이는 나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대답해 보라니까?”

“페넬로페, 그만하렴.”

루시엘은 감았던 눈을 뜨고 페넬로페를 응시했다. 그러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례하게 굴었잖아.”

“뭐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