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5)화 (25/282)

<25화>

“고, 공작…… 아니, 아버님.”

루시엘의 호칭이 공작님으로 회귀할 뻔하자, 그의 가지런한 금빛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시……시아빠님. 죄송해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요.”

루시엘은 자못 긴장해 여러 번 호칭을 정정했다.

“공작님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군. 요즘 아버지께 마법은 잘 배우고 있나.”

다행히 루시엘이 잘 대답할 수 있는 주제였다.

“재밌게 배우고 있어요. 아직은 마법을 발현하진 못했지만요. 할아버지께 시아빠님은 물과 얼음 속성을 타고나셨다고 들었어요.”

자그만 아기 새가 재잘거리듯, 루시엘은 쉼 없이 말했다.

“정말로 멋진 것 같아요.”

자신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루시엘에게 한 걸음 다가온 공작이 아이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너도 곧 마법을 발현하게 될 거다. 기대하고 있다.”

그 말에 루시엘은 기합이 살짝 들어가선 힘줘 말했다.

“넷,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 점은 높이 사도록 하지.”

공작의 커다란 손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체온이 가슴 안쪽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앗, 칭찬받았어……. 기분 좋아.’

“오늘은 나와 갈 데가 있다.”

공작은 늘 정무로 바빴기에 루시엘은 자못 궁금해졌다.

“네? 어디인가요?”

“조금 먼 여정이 되겠군. 수도 아르테까지 가야 하니까.”

“……수도까지요?”

“그래, 황립 아카데미에 갈 거다.”

“……!”

루시엘의 눈동자가 몹시 커다래졌다. 황립 아카데미라면…… 키제프가 다니는 곳이었다.

‘드디어 키제프를 만나게 된다.’

회귀 후 첫 만남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어떨까. 기분이 들떠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둘러 준비하도록 해.”

공작이 뒤에 있던 베시에게 명을 내렸다.

“예, 주인님. 이제 아가씨의 머리만 만지면 끝이랍니다.”

거울을 본 루시엘이 그녀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베시, 나 예쁘게 해 주세요.”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러우세요, 아가씨. 키제프 도련님에게 잘 보이고 싶으신 거지요?”

루시엘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끄덕였다.

“파혼당하면 안 되니까요.”

어딘가 결연함까지 엿보이는 말이었지만, 베시와 공작 모두 루시엘이 하는 말이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베시가 루시엘의 작은 어깨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럴 리 없으니 걱정 마세요.”

“적어도 얼굴로 파혼당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마라. 루시엘.”

그만큼 루시엘이 예쁘고 귀엽다는 뜻으로 공작도 한마디 덧붙였다.

베시가 루시엘의 머리를 조심조심 빗질해 준 뒤, 반 묶음을 해서 깜찍하게 하얀 리본을 매 주었다.

“준비는 다 된 것 같으니, 이만 떠나자. 이리 와.”

공작이 루시엘을 가볍게 안아 들더니 물었다.

“요즘 식사량이 늘었나?”

“조, 조금요.”

“깃털에서 솜인형 정도로 승급시켜 줘야겠는걸. 잘했다.”

가까이에서 공작이 나붓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동관의 층계를 천천히 내려가던 공작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더니, 루시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오니 깨기 전에 어서 가자.”

“네.”

그건 루시엘도 동의하는 바였다.

레오니가 알게 된다면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졸라 댈 것이 분명했다.

에바가 마차에 바구니를 실어 주면서 루시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루시엘 아가씨, 배고프실 때 드세요. 조심히 다녀오시고요.”

“고마워요, 에바.”

“그리고 여기 양털 담요도 두르고 계세요. 장벽 안은 마법 때문에 기후도, 온도도 따뜻한 편이지만 너머는 아직도 살짝 추우니까요.”

“아, 네.”

그러고 보니 그때도 할아버지가 담요를 챙겨 주셔서 따듯하게 올 수 있었다.

마차 안은 루시엘을 배려해서 좌석에 푹신한 방석이 깔려 있었고, 검은콩 같은 눈코입이 콕콕 박힌 귀여운 갈색 곰 인형도 있었다. 그리고 루시엘이 좋아하는 곰 젤리가 든 유리병도 두 개나 있었다.

“곰 인형이랑 곰 젤리예요.”

루시엘은 인형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젤리를 챙겼다. 공작은 루시엘의 옆자리에 앉아서 양털 담요를 아이의 무릎에 덮어 주곤, 슬쩍 모른 척을 했다.

“시아빠님이 갖다 주신 거예요?”

루시엘이 젤리와 인형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달리 누가 있지?”

“아……. 감사해요. 사실 오늘 젤리를 다 먹어서 얻으러 가려고 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이거 드리려고 했어요.”

루시엘이 당근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눈꽃 자수가 놓인 하늘색의 크고 포슬포슬한 양말과 곱게 접은 분홍색 편지.

“이거 예쁘고 따뜻해요. 신고 자면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이걸 나더러 신으라고?”

“네.”

그는 양말을 보고 잠시 당혹스러웠지만 곧 미소가 벙싯 번졌다. 그러곤 긴 다리를 들어 신발을 벗더니 루시엘이 준 양말로 갈아 신었다. 공작의 눈이 가느다랗게 휘었다.

‘꼭 자기 같은 것을 주는군.’

“포근포근 따뜻하죠?

“……그렇군.”

공작성의 누군가가 봤으면 경악할 일이었다. 공작은 얌전히 양말의 포근함을 느끼며 루시엘의 편지를 읽었다.

「그거 아세요?

시아빠님에게서 벽이 느껴져요.

완.벽.」

그걸 읽자마자 공작의 입술에서 풉, 하고 바람 빠지듯 웃음이 터졌다. 능글맞은 듯하면서도 자신을 칭찬하는 내용이라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루시엘,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냐.”

“……헷. 그냥요. 시아빠님 보면 생각나는 단어였어요.”

루시엘이 쑥스럽게 웃자, 공작이 잠시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완벽한가?”

루시엘은 양털 담요를 조용히 얼굴까지 끌어 올렸다. 민망하니 잠시 자는 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장벽의 문을 거치면서 루시엘은 담요와 곰 인형의 포근함에 정말로 잠이 사르르 오고 있었다.

발이 닿지 않는 루시엘을 위해서 푹신한 발 받침대도 아래에 놓여 있었다. 루시엘은 구두를 벗고 양말만 신은 채로 발을 올렸다. 그야말로 잠자기에는 안성맞춤인 환경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내달렸을까.

어느새 두 사람 모두 포근한 양말을 신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다각다각, 한참을 달린 마차는 수도 아르테에 무사히 도착했다. 루이비드는 제 무릎에 누워 잠든 아이의 어깨에 담요를 조심스레 올려 주었다.

은빛 속눈썹이 이따금 움찔거리는 것 외에 루시엘은 아기 동물처럼 쿨쿨 잘 자고 있었다.

잠투정이 심한 레오니나 예민한 키제프에 비교하면 참으로 순하기도 했다. 뭐, 그것은 루이비드 본인의 핏줄이기에 그러했지만.

그 자신도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 탓에 저렇듯 깊게 자 본 일이 거의 없었다.

몰랑몰랑한 밀가루 같은 뽀얀 볼은 아까 만졌는데도 자꾸 만지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누구 마음대로 결혼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제가 아버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조건 좋은 영애도 아니잖습니까. 가문을 위해서라면 적어도 왕녀쯤은 데려오실 줄 알았는데요.」

키제프의 반항기 가득한 서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더욱 일정을 당겨서 아카데미로 가는 것이지만.

‘이 아이를 만나면 녀석도 조금은 마음이 달라지겠지.’

공작은 루시엘이 자는 모습을 감상하다가 중얼거렸다. 파닥이던 날개를 고이 접고 잠깐 잠이 든 아기 새 같달까.

무엇이든 호기심을 보이는 면도 이제 갓 부화해 처음 세상을 접한 어린 새 말이다.

여리고 작아서 만지는 것조차도 조심스럽다. 루이비드는 루시엘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차를 몰라고, 마부에게 나직이 명했다. 마차는 더 느릿하게 움직였다.

* * *

까무룩 잠들었던 루시엘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포근하고 아늑해서 마차인 줄도 모를 만큼 푹 잠들고 말았다.

벨슈타인의 마차에 타기만 하면 이렇게 잠드는 것 같았다. 그만큼 푹신하고 편안한 착석감을 자랑했다.

그런데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쿠션 등받이를 베고 잤는데, 일어나 보니 공작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

화들짝 놀란 루시엘이 살금살금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묵직한 손이 루시엘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빠처럼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공작이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열었다.

“괜찮으니 편하게 있어라.”

“……앗, 아니에요. 다 잤어요.”

루시엘이 팔을 버둥거리며 일어나자, 공작도 느른하게 눈을 뜨더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뭔가 아쉬운 듯 손을 거두어 가는 공작을 보면서 루시엘이 종알거렸다.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뚝 끊겼다. 루시엘은 어색함을 피해 곰 인형을 끌어안고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반짝반짝한 강물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이 비친 강물은 보석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입을 벌려 감탄하고 있자 루시엘을 힐긋 살피던 공작이 물었다.

“배가 고프진 않고?”

“……조금 고파요.”

루시엘이 혀를 쏙 내밀자, 공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바가 챙겨 준 도시락 바구니의 뚜껑을 열었다.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 도시락을 하나씩 열어 주었다.

“우선 이걸로 간단히 요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레스토랑에 들르지.”

공작은 그리 말했지만 루시엘에게는 아주 풍성한 식사였다.

싱그러운 청포도와 빨갛게 익은 체리, 게살을 발라 만든 샌드위치와 조개를 넣은 수프, 시원한 사과 주스, 한 입 크기의 베이비슈까지. 아주 완벽한 한 끼였다.

루시엘의 입술은 쉼 없이 분주하게 음식을 삼켰다. 식사하는 동안 진홍빛 눈동자는 행복감에 젖어 사르르 녹아내렸다.

문득 저만 열심히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루시엘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샌드위치만 한 조각 먹고 다른 것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루시엘은 그의 몫으로 준비된 체리를 포크로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체리에 달콤해지는 마법이라도 걸렸나 봐요.”

“……음?”

그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루이비드는 결국 포크를 받아 체리를 입안에 넣었다.

지켜보던 루시엘의 눈이 생긋 웃었다.

“제 말이 맞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조용히 루시엘이 건네준 포크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훗날 루시엘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먹을 것을 챙겨 준 날을 기념하기 위해, 포크는 액자에 넣어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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