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8)화 (8/282)

<8화>

벨슈타인 공작가의 입장에서 자신은 끌리는 정혼 상대는 아니겠지만, 루시엘은 기죽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 벨슈타인 가문은 건드릴 수 없는 악당과도 같은 이미지였으니, 사실 결혼 시장에서 딸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에게는 최적의 상대가 아니었다.

여자아이를 마왕에게 제물로 넘길 거라는 끔찍한 소문까지 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루시엘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문인지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면 바로 이혼할게요. 제국법상, 가능한 일이란 걸 아실 거예요.”

타이라 제국의 혼인법은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한 경우, 성인이 되어 타당한 이유가 생기고 아이가 없다면 합의 이혼이 가능했다.

그런 이혼은 귀족 사회에서 자주 있었기에 서로 명예가 깎이는 일 없이 새로운 결혼이 가능했다.

이야기를 듣고 잠자코 생각에 젖어 있던 길리아트는 그제야 루시엘이 왜 벨슈타인 가문을 찾았는지 의문이 풀렸다.

우선은 루시엘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이 결혼 찬성한다. 아, 물론 되도록 이혼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면 좋겠지만 말이다.”

“아버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루시엘은 백작가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 그 일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군.”

“……맞아요. 제겐 보호해 줄 가문이 필요해요.”

덤덤하게 말하는 루시엘의 태도가 공작은 거슬렸다. 아주 당연하다는 걸 말하는 듯, 아이는 일말의 슬픔조차 없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자식일 테지.’

그 정도는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백작가의 여식이 남의 가문까지 찾아와서 보호해 달라고, 본인의 인생을 걸려고 하고 있었으니.

“네 입으로 거래라고 말했지 않은가. 조건을 듣지.”

“……아.”

“서로가 합당한 것을 교환해야 거래가 성립한다.”

공작의 물음에 대비해, 준비해 둔 대답이 있었다.

“공작가에 필요한 물건을 드릴 수 있어요.”

듣고 있던 공작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를테면?”

“마정석을 구해다 드릴 수 있어요.”

루시엘의 보석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보석 안에는 강한 마력이 머금어져 있었다.

마력이 담긴 돌, 마정석은 비싸긴 하지만 쉽게 통용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루시엘의 보석은 마정석보다 훨씬 강하고 많은 양의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고급 마정석이라고 둘러대면, 아무도 루시엘이 만든 보석이라는 의심은 하지 못할 것이다.

벨슈타인 가문은 마법에 능한 가문이니 그 쓰임이 많을 테고, 공작에게도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거래 조건이었다.

공작과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말을 듣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리아트가 물었다.

“마정석을 어떻게 구할 수 있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마정석이 묻힌 곳을 제게 알려 주셨어요.”

루시엘이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공작은 되었다는 표시로 손을 들었다.

“벨슈타인에서는 마정석을 추출하는 곳이 따로 있지. 그러니 네가 구해 줄 필요는 없다. 그 밖의 물질적인 어떤 것도 필요 없어. 벨슈타인의 금고는 차고 넘쳐.”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그의 오만한 표정에 루시엘은 다소 풀이 죽고 말았다.

‘어쩌지? 이 방법으로는 안 되는 걸까.’

그런 한편 물질적인 것을 거절하는 공작의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부유한 벨슈타인 공작이라면 제 보석을 탐내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황태자도 처음에는 티를 내지 않고 다가왔었다.

‘안심하긴 일러. 실제로 내 보석을 보게 된다면 탐을 낼지도 몰라. 모두 그랬으니까.’

루시엘은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없나?”

공작이 힐끔 루시엘의 눈치를 살폈다. 얄밉게도 그의 말이 정답이었다.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힘이 센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루시엘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는 벨슈타인이 마음에 들어요. 제게는 드릴 만한 귀한 물건도,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시켜 주시면 무엇이든 할게요.”

“흐음…… 그래서?”

공작은 여전히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루시엘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루시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미래를 아는 것.

루시엘이 눈을 빛내며 입술을 열었다.

“저는 벨슈타인을 지킬 방법을 알고 있어요.”

공작이 그 말에선 눈빛이 바뀌었다.

“뭐?”

루시엘은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떠올렸다. 벨슈타인에 큰 영향을 미칠.

루시엘이 각성을 갓 마치고 유리관에 갇혀 있을 무렵.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라파예트 산에 산사태가 났대요.’

‘어쩐지 폭우가 내리기 이틀 전 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던데. 우우웅, 쿠구구궁 하는 소리 말이야.’

토사가 무너져 내려 마차 보행로도 막히고, 벨슈타인 영지의 농가까지 피해가 속출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던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냥 말하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때 거짓말처럼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레구나. 이 폭우가 내리고 나면 산사태가 날 거야.’

“모레 라파예트 산에 큰 산사태가 있을 거예요. 인근 영지의 농가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셔야 해요.”

루시엘의 말에 공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산사태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루시엘이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비가 오니, 산이 알려 줄 거예요. 이따가 산 근처로 사람을 보내서 기이한 소리가 나는지 확인해 보세요.”

“기이한 소리?”

“네, 흙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요. 산의 지반이 약해지면 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단단히 받쳐 줄 흙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요.”

루시엘의 말에 길리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 확실하게 확인이 가능하겠군.”

공작은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침묵했다. 길리아트가 공작의 팔을 붙잡았다.

“나는 루시엘의 말을 한번 믿어 보는 게 좋겠구나. 저 아이는 거짓말로 우리에게 피해를 줄 아이가 아니다. 게다가 이곳에 오던 중 해가 진 어둠의 숲에서도 가시덤불이 저 아이에게만은 길을 터 주었지.”

“……그게 사실입니까?”

공작은 루시엘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숲의 주인은 요정이었다는 이야기는 길리아트가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래. 신비로운 경험이었지. 난 저 아이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 거라 믿는다. 만약 저 애 말대로 산사태가 진짜라면?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다.”

“…….”

길리아트의 가정에 공작은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한번 믿고 대비책을 세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공작은 골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두드리면서 잠시 서성거렸다. 그사이 길리아트는 루시엘과 눈빛을 교환했다.

공작이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루시엘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영애 말대로 산사태가 일어나는지 확인해 보겠다.”

루시엘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루시엘과 길리어트의 얼굴이 동시에 밝아졌다.

공작이 서둘러 동그란 통신구를 꺼내곤 명령했다.

“정찰 C, D조. 긴급 명령이다. 지금 당장 라파예트 산 근방으로 접근한다. 산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는지 관찰해.”

곧 삼십여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찰조의 보고가 들려왔다.

―정찰 D조. 폭우 때문에 자세히 들어야 하지만 산으로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립니다.

―정찰 C조. 산과 인접한 길목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에 공작이 어딘가로 통신해 ‘비상사태’라 전하며 상황을 통솔했다. 곧 통신구를 꺼 버린 공작이 소파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다 다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오르비아 영애. 네 말이 사실인 것 같군.”

“……믿어 주셔서 기뻐요.”

루시엘이 허름한 원피스 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언니에게 배운 예의는 몸에 밴 채였다. 오래전 언니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우린 귀족이었다고.’ 공작의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어떻게 산사태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벨슈타인을 지키겠다고 했지.”

“네, 저는 미래를 볼 수 있어요.”

“예지 능력?”

“정확히는, 예지몽을 꾸는 것 같아요.”

“……미래를 보는 꿈이라. 거기서 뭘 봤길래 벨슈타인을 지키겠다는 것이냐?”

공작이 한 발 다가서며, 루시엘을 다그쳤다.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염려가 되어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아이가 겁을 먹겠군.”

그러나 루시엘은 고개를 저으며, 도리어 공작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꿈의 일부만 기억하지만, 검은 장벽이 무너졌어요.”

검은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에 공작과 길리아트는 충격을 받아 동공이 흔들렸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자가 벨슈타인을 친다는 것이지?”

공작의 미간이 무섭게 구겨졌지만 루시엘은 지금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꿈을 조각조각 기억해서 지금은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약속드릴 수는 있어요. 벨슈타인이 무너지지 않게 제가 도울게요.”

아이의 샛말간 눈동자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지만 공작은 잠시 고민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예지몽을 꾼다는 아이의 말을 믿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전의 일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공작은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르비아 영애의 제안, 일단은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완벽한 계약 성립은 아니야.”

공작이 팔짱을 끼곤 루시엘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영애는 아직 결혼할 나이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네?”

“제국법상 결혼을 하려면, 10살이 지나야 한다. 게다가 네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혼인이 가능한 나이지. 아직 몇 년은 남았겠군.”

“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전 열 살이 될 거예요.”

공작과 길리아트가 동시에 루시엘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아홉 살이라고?”

아홉 살이라기엔 한참 어려 보이는 작은 체구와 얼굴.

“그 몸의 어딜 봐서 아홉 살이라는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루시엘, 여섯 살 아기가 아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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