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무탈히 다녀오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보다시피.”
길리아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눈부신 금발 아래,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굴렀다. 루시엘을 본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를 찾는 손님이 오셨다고?”
정말 키제프 폰 벨슈타인과 판박이처럼 닮은 남자였다.
루시엘은 숨이 멎을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이분이 바로…….’
현 벨슈타인 공작.
위압감과 카리스마 역시 루시엘이 죽기 전 만났던 키제프의 것과 비등하다. 할아버지 공작님과는 다른 강함이 느껴졌다.
잘 벼려진 칼날을 보는 것처럼 상대를 긴장하게 만든달까.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이야.’
루시엘은 겁먹을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그만 손에는 땀이 맺혀 옷자락을 슬쩍 쥐었다.
“예, 가주님.”
에바가 고개 숙여 고했고, 곁에 있던 길리아트가 나섰다.
“그래, 이 아이가 벨슈타인의 가주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다.”
‘벨슈타인의 가주가 아무나 만나는 자리입니까.’
‘믿을 만한 아이야. 내가 직접 데려온 아이다.’
두 부자간의 암묵적인 눈빛 대화가 그리 오가고 있었다.
공작의 눈이 흘긋 루시엘을 훑었다. 솜털 하나까지 바짝 세우게 만드는 긴장감이 또 한 번 루시엘의 몸을 흔들었다.
“벨슈타인 공작님을 뵙습니다. 저는 오르비아 백작가의 루시엘이에요. 사생아이긴 하지만, 저에게도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예전에 언니가 말하길 노예가 되기 전 가문이 있는 귀족이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다.
인사를 겨우 마쳤다. 애써 기죽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맹수 앞에 놓인 사냥감처럼 절로 몸이 떨려 왔다.
“…….”
“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루시엘은 숨을 꼴깍 삼키고 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은 대답 대신 에바에게 명령했다.
“에바, 손님을 서재로 안내하지.”
“예, 가주님.”
그리 말한 그는 드넓은 어깨 위에 걸친 남색 코트를 휘날리면서 층계 위로 다시 올라갔다.
공작이 떠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로 쓰러졌다. 루시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은 분이야.’
그런 루시엘을 바라보던 길리아트가 아이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말했다.
“얘야, 루시엘.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 할아버지가 함께 따라갈 테니까. 나는 네가 무척 마음에 든다.”
길리아트가 루시엘에게 찡긋, 윙크를 보냈다.
“……할아버님, 고마워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웃음이 오갔고, 길리아트가 에바에게 손짓으로 마실 것을 요구했다.
에바가 알아듣곤 루시엘 앞으로 와서 물었다.
“실례지만 아가씨, 어떤 음료로 준비해 드릴까요?”
“네?”
당황해 반문하던 루시엘은 힐끔 할아버님을 바라보았다.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저는.”
루시엘이 볼을 물들이며 수줍어하자 길리아트가 대신 답했다.
“달콤한 것 중에 뭐가 있나?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거로 갖다 주게.”
“음…… 그렇다면, 딸기 파르페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마침 농장에서 싱싱한 딸기를 수확해 왔다고 합니다.”
‘딸기’라는 두 글자에 루시엘의 진홍빛 눈망울이 토끼처럼 잔뜩 커다래졌다.
“그렇군. 그럼 나도 같은 거로 한 잔.”
그 말을 들은 에바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큰 주인님께서 딸기 파르페를 말입니까?”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인님. 그럼 서재로 먼저 모시겠습니다.”
“루시엘은 내가 서재로 데려갈 테니, 자네는 딸기 파르페부터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 * *
탁.
길리아트와 함께 루시엘은 에바가 건네준 푹신한 하얀 슬리퍼로 갈아 신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엘은 말라 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코트를 벗어 둔 공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길이 나란히 사이좋게 들어선 두 사람에게 향했다.
“낯선 그림이로군요.”
공작이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서류에 마저 서명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그림이지. 자, 앉자.”
길리아트가 루시엘과 함께 중앙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건너편에는 공작이 걸어와 앉았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길리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루시엘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그것보단 날 찾아온 손님의 용건이 무엇인지 더 궁금하군요.”
공작의 붉은 눈이 루시엘을 주시했다.
“아…… 저는.”
똑똑.
루시엘이 입술을 달싹이자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바가 쟁반에 딸기 파르페 두 잔과 얼그레이 티를 받쳐 들고 왔다.
파르페 위에 아이스크림과 딸기, 과자가 얼마나 높이 쌓였던지, 루시엘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아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에바는 능숙하게 가져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길리아트와 루시엘의 파르페, 마지막은 공작의 얼그레이 순서로.
루시엘의 둥그런 진홍색 눈동자가 온통 딸기 파르페로 쏠리는 모습을 보자, 길리아트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은 느른한 자세로 턱을 괴고 앉아, 아이를 관찰했다.
아이의 맑고 달콤한 눈망울이야말로 딸기색에 가까웠다.
“양이 조금 많지요? 주방장 세스가 오랜만에 만들어 보는 디저트에 신이 나서 이렇게 파르페 탑을 만들어 주었네요.”
“아뇨, 다 먹을 수 있어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킨 루시엘은 한 입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눈앞에 벨슈타인 공작님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파르페가 나온 후로는 온통 정신을 빼앗긴 루시엘의 모습에 길리아트가 제안했다.
“용건을 듣는 건 티타임 뒤로 미루는 게 어떤가, 공작.”
“……그러죠. 맘껏 들도록.”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시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볼에는 발그레하게 홍조까지 올라왔다.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파르페 탑의 가장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딸기를 포크로 폭 찍었다. 입안에 넣자 과즙이 터졌다.
‘와, 정말 상큼하고 달아.’
다음은 여러 겹의 얇은 페이스트리와 하얀 크림을 번갈아 쌓아 직사각형으로 자른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
루시엘은 순간 제 입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크림 웨하스가 아주 맛있구나.”
길리아트도 한 입 베어 물며 답해 주었다.
“아, 크림 웨하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면서 웨하스를 씹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맛과 바삭한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다음은 길쭉한 막대 모양의 갈색 과자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한 입 먹자 악마처럼 달달한 맛이 입안을 감쌌다. 루시엘은 막대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건 초코 웨이퍼 롤이라는 과자란다.”
루시엘이 열심히 파르페를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먹는 모습은 길리아트는 물론, 공작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루이비드는 속으로 의구심을 품었다.
‘대체 저렇게 열심히 먹을 일인가. 종일 굶고 온 건가?’
그러면서도 루이비드는 저도 모르게 루시엘이 먹는 모습을 계속해서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었다.
‘토끼처럼 잘도 먹는군.’
저대로라면 곧 말라깽이 같은 아이의 몸도 통통해질 듯 보였다. 길리아트가 슬쩍 루이비드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어떠냐, 귀엽지 않으냐?’
그러나 루이비드는 그 눈빛을 거부한 채, 다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애를 굶기기라도 한 겁니까.”
“핫핫, 그럴 리가. 잘 먹으니 보기 좋지. 많이 먹어라, 루시엘.”
“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도요.”
파르페. 웨하스. 초코 웨이퍼 롤.
어려운 이름이었지만 매우 맛있어서 루시엘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새겼다.
루시엘의 스푼이 아이스크림으로 향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시원하고 달콤한 맛에 루시엘은 딸기색의 둥근 눈동자를 크게 깜빡였다.
“이건…….”
“아이스크림이란다.”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에요.”
동시에 세 사람의 대답이 들려와 루시엘의 눈동자가 더욱 토끼 눈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아이스크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들 제게 신경 써 주는 것이 느껴져 조금 기뻤다.
‘아이스크림이 좋아질 거 같아.’
“맛있어요. 눈송이를 한 움큼 먹는 기분이기도 하고…….”
“이렇게 달콤한 눈이 내린다면 아이스크림 가게는 문을 닫겠구나, 루시엘.”
루시엘의 천진난만한 표현에 길리아트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군.’
공작 루이비드도 그답지 않은 감상을 가졌다. 차디찬 큰아들과 떼쟁이 작은아들만 있었던 그에게 나타난 루시엘은 새로웠다. 어깨까지 흐르는 하얀 은발에 분홍빛 눈, 보송한 털을 가진 눈토끼가 따로 없었다.
연약한 외양에 하는 행동까지도 하찮고 우스웠다. 그럼에도 아이의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게 된달까.
파르페를 오물오물 욕심껏 먹는 아이를 보던 제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는 걸 깨달은 루이비드가 문득 헛기침하며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들어 볼까, 오르비아 영애.”
루시엘은 양 볼 가득히 파르페를 먹다가 아차 싶었다. 지금 공작은 무척 성가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앗, 파르페에 홀려서 그만 바쁜 분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어. 밉보이면 안 돼. 잘하자, 루시엘.’
루시엘은 대단한 결심을 한 듯, 파르페 잔을 스윽 밀어 놓았다. 그러곤 눈을 더욱 또렷하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벨슈타인 공작님께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요.”
아이의 반짝이는 두 눈에 결연한 무언가가 들어찼다. 대담한 구석이 있군, 생각하면서도 그는 관심 없는 척 태연하게 말했다.
“……거래라고? 난 꼬마 숙녀님과 장난할 시간 없는데.”
그렇게 읊조린 공작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조금의 흥미나, 기대라곤 없는 표정.
예상한 일이었다. 지금 루시엘은 빈털터리였으니. 그러나 루시엘은 기죽지 않고 생각해 둔 말을 고했다.
“공작님께 제 또래의 아드님이 있는 걸 알아요. 공자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결혼으로 저를 보호해 주세요.”
편한 자세로 이야기를 듣던 공작이 몸을 일으키고 턱을 괴었다. 다소 기가 찬 모양인지, 그의 붉은 눈이 루시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