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92화
EP 44–개문 開門(11)
비가 내렸다.
비에도 종류가 있다.
아침 안개에 섞여 내리는 이슬비였다.
밝아오는 여명이 하늘 한편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는 가운데 부슬부슬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은, 늘어지는 첼로보다 경쾌한 피아노가 어울리는 빗줄기였다.
생명력을 담은 물방울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토지를 보드랍게 붙이고, 자전거 도로 가장자리의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새싹을 축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옛날처럼 그 비를 즐기지 못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검은 장우산을 들고 지하철역에 들어가는 직장인도, 촌스러운 꽃무늬 우산을 들고 마트로 가는 아주머니도, 투명한 비닐우산을 들고 학교로 뛰어가는 학생도 찾아볼 수 없다.
요즘 들어 매달 과로사로 한두 명씩 실려나간다던 기상청이 우천雨天을 예보했기 때문이었다.
텅 빈 거리에 장갑차 한 대가 지나간다.
장갑차 꼭대기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다.
[계엄사령부에서 알립니다. 호우가 끝나고 정오까지 대대적인 방역 점검이 있을 예정입니다. 군경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사오니,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안심하시고 긴급재난문자의 안내를 받아 생활수칙을 준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계엄사령부에서 알립니다…….]
* * *
단둥 사태의 피해는 광범위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침식하는 괴수가 핵폭탄에서 살아남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낙진과 함께 동북아시아 일대에 확산된 것이다.
“베이징과 남한까지 검은 괴수가 들이닥친다면 동북아시아가 통째로 무정부지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엔군을 증원해서 어떻게든 사태를 진압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염확산이 그 지경까지 간다면 순차적인 후퇴 작전을 수립해야 하오! 마침 일본의 인구가 상당히 줄었으니 한국인들을 일본 열도로 이주시키는…….”
“일본도 위험합니다. 낙진이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검은 괴수가 단둥에서 보여준 전염성이 일본에서도 온전히 발휘된다면… 동북아시아는 끝장입니다.”
모든 전문가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봉쇄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괴수가 핵폭발의 상승기류를 타고 대류권까지 올라갔을 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북아시아의 멸망을 점쳤다.
그러나 확산은 생각보다 더뎠다.
핵폭발이 직격한 대부분의 괴수가 검은 비가 되어 지상으로 쏟아졌다. 평안도와 랴오닝 일대에 검은 괴수가 출몰하며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문제는 낙진이다. 먼지에 묻은 침식형 변이체가 어디로 향할지는 그 누구도 예상이 불가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운명이 인류의 손을 들어주었다.
편서풍偏西風이 분 것이다.
그 덕에 낙진은 베이징과 평양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북서쪽으로 향했다.
백두산을 둘러싼 장백산맥 혼합림이 초토화되고,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군벌의 수많은 전초기지가 무력화되었지만, 이 또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한반도 북부의 대수림이 통째로 죽음의 숲으로 변함에 따라 지역 형세에도 변화가 생겼다.
“괴수가……! 괴수가 숲에서 끝없이 튀어나옵니다!”
“압록강에 검은 물이 죄다 퍼졌습니다. 물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연변의 중국인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의 일부 세력이 숲에서 튀어나오는 괴수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지난 수년 동안 무정부지대에서 생존한 자들이었고, 함경도의 공업단지에서 생산된 마약과 총기를 양손에 쥐고 있었으며. 남한 정부의 통제를 따를 생각이 전무했다.
따라서 그들의 피난은 사실상 침공에 가까웠다.
“무기 버려! 이 얼류즈 새끼들아-!”
“이 반짱깨새끼들이 우리한테 산 총을 가지고……!”
“자선사업이라도 한 것처럼 굴디 말라. 돈다발 따박따박 받아 챙겼으면서 무엇이 그리 억울하니?”
평양의 유엔군 사령부가 서울로 후퇴하면서 그들을 막을 군사집단은 북한에 전무했다. 총을 든 약탈자들이 함경군벌을 가볍게 꺾어버리고 함경도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이 평양까지 진주할 수는 없었다. 징집령을 내린 평양의 민주화 혁명정부가 시민군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강원도에는 사실상 국군에 가까운 강원군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장백산맥 혼합림을 집어삼킨 검은 괴수는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도 물러설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충돌은 필연적이다. 군벌들이 그걸 깨달은 순간 시민들은 회유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치안이 무너지고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하면서 난민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북한의 주민들은 이제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이라며 온종일 선전을 뿌려대던 남조선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부활한 휴전선의 철조망이었다.
* * *
한국은 대통령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통치는 자본가와 법률가가 중심이 된 ‘사회지도층’이 학벌과 혼맥으로 엮인 거미줄에서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평범한 대다수 국민들의 강력하고 단일된 의견이 정치적 지도자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때는 성난 민심의 파도가 대한민국은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기가 선거철이 아니라면 국민의 요구는 간단히 꺾이게 될 것이고, 선거철이라면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치는 다시 그들만의 리그로 변한다.
이처럼 권력이란 살아있는 생물 같은 것이라, 시기와 형세에 따라 국가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이들이 휙휙 바뀌곤 한다.
지금의 지도자는 명약관화했다.
공포.
공포가 국가를 다스리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생필품은 충분히 있습니다! 모두 질서를 지키며 배급을 받아가십… 으악! 밀지 마십시오!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제발 열어주세요! 우리 애라도 남쪽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발!”
“문 열어라 종간나 새끼야! 여 있는 사람 모두 씨몰살을 당하게 생겼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언제는 북남이 하나라고 지껄이더니 전부 거짓부렁이었냐!”
“군관 동지, 제가 이렇게, 이렇게 싹싹 빌겠습니다, 제발 남쪽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 같은 조선민족 아닙니까. 어찌 이리 모질게 인민을 막아세운단 말입니까……!”
서울의 상실 이후 충청방어선에서 주둔하던 국군은 아주 오랜만에 휴전선이라는 전통적인 주둔지로 돌아왔다.
인민군이 아니라 인민을 막기 위해서였다.
김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를 선택한 20세 청년 김혜민은 단둥 사태가 터지는 순간 군생활이 좆됐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본인의 직감과는 달리, 김혜민의 군생활은 괴수와의 전투가 아니라 낡고 허물어진 휴전선의 군 시설을 복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삽질이 좀 빡세긴 했지만 목숨 걸고 총질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일이다. 개문 사태 당시 군에 있었던 부사관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생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으니까.
“제발 우리를 들여보내…….”
“남조선 정부는 당장…….”
“이 나쁜 새끼들아……!”
온종일 휴전선에서 들려오는 난민들의 함성 소리도 이젠 적응했다. 평소에도 저 소리 들으면서 일과하고, 잘 때도 저 소리 들으면서 잔다.
그러나 김혜민의 선임인 박정민 상병은 성격이 좀 예민했다. 원래부터 불면증이 있는 사람이 소음으로 잠을 못 자게 되었으니 그가 품은 난민을 향한 증오는 알 만했다.
같이 경계근무를 서게 되면 몇 시간 동안 빨갱이 척살 어쩌고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씨-팔 빨갱이 새끼들 오늘도 또 지랄이네…….”
오늘도 또 시작이었다. 김혜민은 최대한 박정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성심성의껏 말끝에 추임새를 넣었다.
“오늘도 시끄럽지 말임다.”
“저, 씨빨 새끼들 개성에 있는 인민군한테는 찍 소리도 못 하면서 국군한테만 와서 배 놔라 감 놔라 밥 달라 똥 치워 달라 이 지랄하는 거 한 번 따발총으로 긁어줘야 해. 그러면 아가리를 처 다물 텐데…….”
“맞슴다. 난민들이 좀 강약약강이지 말임다.”
“강아지가 왜 나와?”
“…….”
“농담이야, 씨팔……. 누굴 븅신 보듯이 쳐다보고 있어.”
가끔 난민들이 (구)비무장지대에서 지뢰 밟고 사고치는 것 빼면 별일 없는 군생활이었다.
철조망 뚫고 들어오는 거수자도 두더지 잡기 하듯이 잡아서 북으로 돌려보내면 아무 문제 없다.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김혜민은 원래부터 무던한 사람이었다. 마인드 컨트롤이 된다 이거다. 밥맛 없는 군생활도, 북한 난민들의 참상도, 박정민 상병의 끊임 없는 투덜거림도,
언젠가는 다 지나갈 일이다.
“빨갱이 새끼들……. 나라에서 별문제 없으니까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여까지 기어들어 와서 데모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러나 평온한 김혜민의 인생에 못 지나갈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휴전선 너머에서 난민들에게 생필품을 지급하던 군인들에게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아줌마! 그러지 마요!”
“막아! 막아! 씨발, 막으라고 저거!”
“어어! 안 돼! 아아! 안 돼!”
박정민 상병이 망원경을 들어 전방을 살폈다.
“뭐야, 씨발.”
김혜민도 망원경을 들어 전방을 살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
오랫동안 씻지 못해 얼굴이 꼬질꼬질한 여자가 철조망 너머로 무언가를 올렸다. 포대기에 고이 싸인 무언가였다.
대체 무엇이 그리도 절박했는지, 여자는 한참이나 까치발을 들며 포대기를 철조망 위로 밀어넘기려다가.
자신의 키가 작은 탓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며 포대기를 던졌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경악하는 군중들,
호선을 그리는 포대기,
그리고 낙하의 순간.
김혜민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 *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신뢰다. 군인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 화폐에 가치가 있다는 신뢰.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그리고 그 신뢰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건, 국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난민들이 몰려오면서 군사분계선 인근의 소요 사태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강원군벌에 흡수시켜.”
“원산이 이미 포화상태라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우리 측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쯧, 국정원장 잠깐 오라고 해봐. 또 보고할 거 있어?”
“현재 미국의 기업가들이 연방정부에 만주 탈환에 투자한 자금을 강제로 반환시키켜 달라는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반쯤 IMF인데 여기서 외화가 더 나간다고? 원딸러 박살나면 에너지빠떼리도 박살나는 거야. 무조건 막아.”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만 국내 이슈가 진정되기 전까지는 로비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면구스럽습니다…….”
“하아…….”
원옥분 대통령은 망하기 직전의 나라를 어거지로 다스린 적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지금 상황은 그 시절과 비슷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는 모두가 제 앞길부터 살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존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어떻게든 국가에 대한 신뢰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다.
단둥 사태 당시 핵폭발의 상승기류를 타고서 퍼져나간 괴수들은 몇 주 사이에 대부분 비가 되어 떨어졌지만,
아주 작은 부스러기에 담겨 대류권까지 올라간 경우, 향후 10년 동안 하늘에 머물다가 비에 섞여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강원도 남부, 거의 경상도와 맞닿은 부분에서까지 검은 괴수가 출현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그 탓에 비가 올 때마다 전 국민의 출입을 통제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을 벌이고, 이따금 각지에서 나타나는 검은 괴수를 즉시 제압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지만…….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결국 모든 조치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북한의 군벌을 무장시키는 것도, 언론을 통제하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것도, 주식 시장의 붕괴를 막아내는 것도, 헌터들을 사방에 뿌려 검은 괴수의 침식을 저지하는 것도…….
이건 적의 본거지를 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마지막 결전까지 국가를 유지시켜야 했다.
* * *
검은 괴수를 무력화시킬 용해액이 개발된 건 첫눈이 내릴 무렵이 되어서였다.
UN을 지지하는 모든 헌터들이 비장한 각오로 부산에 마련된 제2사령부로 모여들었다.
노아 뤼미에르는 황량한 서릿발이 내리는 부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때 수많은 자동차와 활기 넘치는 행인들의 생명력으로 그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나던 도시는 온데간데없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시민들은 혹시 함박눈에도 검은 괴수가 묻어 있을까 두려워하며 집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얇게 쌓인 눈에는 검은 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밟을 때마다 발자국만 슬며시 남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눈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뤼미에르는 그렇게 유령도시를 걸었다.
그조차도 그녀가 초상능력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투명한 역장이 그녀의 몸에 눈 한 송이도 닿지 않게 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헌터들이 모이기로 약속한 건물에 거의 도착했을 때, 뤼미에르는 건물 앞에 있는 한승문을 발견하고 기겁하며 달려갔다.
부쩍 수척해진 한승문이 지팡이를 짚고 건물 앞에 서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장관!”
“아, 뤼미에르.”
“왜 눈을 직접 맞고 있습니까! 침식이 시작되면 어쩌려고요!”
그는 괜찮다는 듯이 처연하게 웃었다.
“국민들한테는 생업에 종사하라고 윽박을 질러 놓고서 저만 눈을 피하고 있으면 안 되죠. 사실 눈에 맞고서 검게 침식될 확률은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보다 낮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전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남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장관……!”
한승문은 무언가 놓아버린 사람처럼 껄껄 웃다가 뤼미에르에게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왜 장관이라는 호칭을 고집하시는 겁니까? 전 이제 시장인데요. 마이어보다는 미니스터가 어감이 더 좋습니까?”
뤼미에르는 갑자기 다가온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살짝 민망한 말투로 답했다.
“그야…… 장관이 본인을 장관이라고 소개했으니까요.”
“아.”
한승문은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즐거운 듯 웃더니, 손님을 맞이하는 호텔리어처럼 뤼미에르의 앞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만 들어가시죠. 다들 국경없는 기사회의 총재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왔습니다만.”
“우리 헌터들 사이에서는 기사회 총재가 더 끗발이 좋습니다.”
“장관도 오늘은 서울시장이 아니라 헌터로서 오신 겁니까?”
한승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언제까지나 반반일 겁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건물에 들어선 한승문의 뒤를 따라 뤼미에르가 UN군 제2사령부에 들어섰다.
부산의 유명 호텔을 통째로 빌려 개장한 건물에는 수많은 고위 헌터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많은 헌터들이 모인 것을 본 건 뤼미에르조차 몇 번 없었다.
그 헌터들이 모두 뤼미에르를 보고서는 바다가 갈라지듯이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줬다.
정중하게 묵례하는 헌터도 있었고, 반갑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드는 헌터도 있었다.
노아 뤼미에르는 그들의 환영을 받으며 회의장 가운데의 연단에 올라가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 경은 왕립 공군 조종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들의 노고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틀렸습니다. 참고로 제가 프랑스인이라서 영국 위인을 폄훼하는 건 아닙니다.”
장내에 모인 헌터들도 뤼미에르의 당돌한 농담에 맞추어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뤼미에르는 회의장 안에 있는 헌터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이제부터 동북아시아의 시민이 아니라, 모든 세계 시민들을 위해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