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83화
EP 44–개문開門(2)
혁명의 수도, 평양은 그 별명에 걸맞게 최근 두 차례의 혁명을 거쳤다. 리용수의 군사혁명과 시민군의 민주혁명.
혁명은 피를 부르는 법이었으니 평양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가로등은 사람 거치대가 되었고, 밤에는 정치깡패로 전직한 인민군 잔당이 숙청과 약탈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 있는 폭력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러나 그런 평양도 오늘만큼은 그 옛날 김일성 생일 퍼레이드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말끔한 외관을 되찾았다.
가로등은 사람 목 걸이가 아니라 가로등으로서의 본분을 되찾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던 정치깡패들도 조용했다. 정치깡패보다 무서운 군사깡패들이 평양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거기. 여긴 연합사령부다.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전차에 깔리기 싫으면 얼씬대지 말고 비켜! 이제부터 치안은 우리가 통제한다! 전투식량을 나눠줄 테니 당장 어린애부터 데려와!”
한-중-러(극동)의 정규군과 세계 굴지의 헌터 길드, 그리고 주한미군까지.
맘만 먹으면 그 드넓은 만주를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일부나마 평양 연합사령부에 있었다.
그 덕에 평양 시내는 조용했지만 연합사령부 내부는 시끌벅적했다. 당연히 좋은 일로 시끄러운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만주로 진격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본국에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는데 우리끼리 멋대로 군을 움직이자는 겁니까?”
“왜 영어로 대화하는 거요? 중국 땅에서는 중국어로 대화하는 게 맞지 않소? 미국은 아직도 영어가 국제어라고 생각하는가?”
“여긴 평양입니다만……?”
“……흥.”
만주 탈환을 위한 연합사령부는 인종의 용광로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구성원을 가지고 있었다.
잡탕이라는 뜻이다.
“비상한 시국에는 권도를 취해야 하는 법인데 지도부가 지리멸렬하게 움직여서야…….”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세금과 기름이 낭비되고 있단 말이오!”
“누가 뭐래도 상장께서 의식을 되찾으시기 전까지 우리는 평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군대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국제개발 이슈부터 먼저 논의하는 건 어떠신지?”
“후우, 역시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우리 일본이 중재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중국 국가안전부 부장과 블라디보스토크 군벌 사령관, 미국 PMC 총수부터 한국군 장성, 그리고 어떻게든 숟가락 얹고 싶은 일본 외교관들.
여기에 그들의 보좌관과 통역관들까지 끼어드니 큰맘 먹고 지어놓은 으리으리한 사령부 건물도 시장통 같았다.
물론 이렇게 사람이 많다지만 어디까지나 군사작전이니 최고 결정권자는 결국 장군들이다. 그들끼리 합의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하나 군인들도 결국에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 존재.
빅토르 리 상장은 의식불명이고, 중국 총통은 본국으로 돌아가 각지 군벌들을 불러모아 대책회의를 하고 있으며, 원옥분 대통령은 테러 당시 넘어져 꼬리뼈에 금이 가는 바람에 병실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는 상황.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며칠 전에 북진을 시작했어야 할 군대는 폭탄 테러 한 방에 돈좌되어 무의미한 기싸움이나 벌여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와중 연합사령부에 방문한 서울시장은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 * *
인류 평화와 공존을 위한 평화의 첫 발걸음이니 뭐니 야부리는 잘 털었지만 <북부 방위선> 계획을 막상 까보면 생각보다 별거 없다.
만주로 진격해 북부 방위선을 세우는 것.
그게 전부다.
물론 군인들이야 군대와 헌터가 한데 모여 대규모 제병협동작전을 개시하는 것 자체가 군사학적으로 아주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건 김두식 국무총리와 유현종 강원도지사 같은 전직 장성들이나 손에 땀을 쥐며 흥분할 일.
반면 정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북부 방위선> 계획은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대규모 토목사업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서울시를 통째로 갈아엎으며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발 전문가가 되어버린 내가 보증한다.
작전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1. 군인과 헌터들이 철거 용역이 되어서 만주에서 설치는 괴수들을 싹 다 밀어버린다.
2. 만주를 안정화시킨 다음에 농사와 재건을 진행한다.
하지만 두 사업이 별개일까?
절대 아니다.
사업가들은 이미 유력한 사령관이나 길드장과 접촉해 라인을 터놨을 것이다. 건설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다. ‘민’이 돈을 먹는 일이지만 배가 아픈 ‘관’이 깽판치면 말짱 도루묵이 되니까 ‘민’이 미리미리 ‘관’한테 기름칠도 하고 샤바샤바도 해둬야 나중에 통수 맞고 피눈물 흘릴 일이 없는…… 그런 일이다.
그러니 만주 탈환에 관련된 실무자들.
즉, 군인, 정치인, 헌터, 건설사는 별개로 생각하면 안 되는 하나의 거대한 운명공동체였다.
따라서 만주 진격작전이 시작부터 좌초되자 가장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은, 대체로 사업을 말아먹기 직전의 CEO와 비슷한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나랏일이 망해서 비통한 게 아니라, 내가 쏟아부은 돈이 날아가면 한강, 혹은 양쯔강 가야 한다는 그 불안감.
나는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이건 명백한 모스크바의 무력도발입니다!”
단상 위에 서서 이렇게 말했을 때, 처음에는 아무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연합사령부에 참석할 정도면 다 알 만큼 아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전부 한국 정치인이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지랄한다는 표정이었다.
“한승문 시장, 냉정하게 말해서 범인이 북한인지 모스크바인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저희도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북한의 반정부 단체가 테러를 일으킨 것이라면 한국 정부는 외교적인 책임을 져야 마땅할 겁니다.”
중국 측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아무래도 벌써 모스크바와 접촉해 자기네는 절대로 안 했다는 맹세를 들은 모양.
하지만 그건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우매한 발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모스크바에 똬리를 튼 악의 축은 이미 우리를 상대로 선전포고에 준하는 성명까지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향한 전진은 멈춰서는 안 됩니다!”
나는 베를린이 함락되었을 때, UN 회의에 출석해 눈물을 흘리며 온 유럽의 결사 항전을 선언하던 뤼미에르의 연설 영상을 보며 연습한 영어 솜씨를 한껏 뽐냈다.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블라디보스토크의 선량한 난민들이 만주에 자리를 잡고 번성함으로서, 모스크바 정부가 성급하게 시베리아의 모든 국민을 버린 끔찍한 판단이 결국 틀렸다는 진실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중국이 유라시아의 새로운 조정자가 되어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양분하던 국제사회에 중국이 러시아 대신 올라가 합리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게 모스크바입니다.”
“그러니 만주 탈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고자 한 모스크바의 뱀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메리칸, 아니, 만주리아 드림을 꿈꾸는 사업가들의 밥그릇을 지켜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시켜주니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각성자가 아님에도 초대형 헌터길드를 일궈낸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PMC 대표가 가장 먼저 눈치채고 기립박수를 쳤다.
“마이어 한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모스크바의 테러리스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겁니다! 당장 원래 계획대로 만주로 진격해야 합니다!”
“……!”
그렇다. 모스크바가 범인일 수도 있는 게 아니다.
모스크바가 ‘범인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 만주로 가야 하니까.
나는 지금 본국의 지령이 떨어지기 전에, 일단 여기 모인 연합사령부에서 자체적으로 진격을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 모인 군인과 헌터, 그리고 사업가와 정치가가 모두 끈적끈적하게 엮인 이해당사자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러분, 저들이 어째서 북한을 가장해 테러를 저질렀겠습니까? 이건 냉전 시기 KGB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주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내분 조장입니다. 만약 저들의 의도에 휘말린다면 우리는 만주로 나아가기도 전에 좌초되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동맹에 대한 신의를 지켜냈습니다. 테러로 중상을 입은 빅토르 상장을 한국의 의료진이 살려냈고, 중국의 총통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 대규모 협력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만주로 갑시다! 게이트 너머에서 온 침략자들을 무찌르고, 씨를 뿌리고 벽돌을 올립시다! 평화와 공존을 향한 발걸음은 결단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만주로 진격해서 뭐라도 해야 만주 재개발이 기정사실이 된다는 이야기를 연합사령부의 모든 수뇌부가 알아먹었다.
북한이 진범으로 밝혀지면 연합이 깨질 수도 있으니, 만주 탈환이 매끄럽게 이어지려면 모스크바가 범인으로 몰리는 쪽이 우리 입장에서 편하다는 이야기도 잘 알아들은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연합사령부의 모든 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칠 리가 없다.
“북으로 진격해서 인류를 구한다!”
“휘이이익-! 휘익-!”
“가자 북으로!”
국적과 인종을 막론하고 하나가 되어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에 보답하기 위해 정중히 인사하고서 단상에서 내려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한국 측 외교관들이었다.
“시, 시장님……!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저희와 상의도 안 하시고…….”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어깨를 잡고서 귓속말을 속삭였다.
“VIP하고 이야기 다 됐으니까 일단 만주 진격 시작한다고 브리핑부터 때리세요. 만주에 탱크 들어가는 순간부터 범인이 누군지는 안 중요해지니까…….”
“이야기가 이미 되셨다고요……?”
“이거 맨 처음에 시작할 때부터 여당이 못하는 일 생기면 내가 대신 질러주기로 했으니까. 일단 만주 땅부터 밟으시라고요.”
“……제가 지금 화내면 되는 상황입니까?”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마자 외교수석이 목청을 높이며 내 어깨를 살짝 밀쳤다.
“이게 대체 무슨……! 야당이 이렇게 정부랑 상의도 안 하고 막 지르면 어떡합니까!”
다른 외교관들이 달려와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진상 아저씨처럼 나를 끝까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야! 한승문! 너 그렇게 살지 마!”
“테러도 제대로 못 막은 정부가 무슨 국제협력을 한다고! 당신네나 똑바로 해!”
“서울시장이면 서울이나 챙길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겐세이를 하냐고!”
“나 전직 WPO 부의장입니다. 잊으셨어요? 거, 참…….”
사소한 소란이 있었지만 연합사령부는 원래 며칠 전에 시작되어야 했던 만주 진격작전의 개시를 선언했다.
며칠 동안 뻗어 있던 전차 엔진이 우렁차게 진동하며 군인들이 북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건물 옥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게 중국 국가안전부의 리슈잉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래서 진범은 누구입니까?”
“조사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조사 중이죠?”
“모스크바를 배후로 짐작하고 조사 중이지만 북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네요.”
“야당이셔서 그런가 정보가 확실하지 않으시군요.”
“그런 편이죠.”
“그럼 차후에 테러의 원흉이 모스크바가 아니라고 밝혀져도 우리는 한국의 야당 정치인이 흘린 잘못된 정보에 속았을 뿐이겠지요?”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 아닙니까. 이런저런 가짜 뉴스가 돌긴 해도, 어쨌거나 테러범이 원하는 대로 만주 탈환이 좌초되면 국제사회가 폭력과 테러에 굴복한 게 됩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오늘의 담화는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물론 테러범이 원하던 게 만주 탈환의 저지였는지, 아니면 북한의 독립이었는지는 모른다. 결국 대충 기워붙여서 만들어낸 핑계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에게는 가끔 진실이 아니라 핑계가 필요한 시점이 온다. 나는 그걸 짚어줬을 뿐이다. 옛날에 서울에서 요트를 타고 탈출하면서 강석호를 버렸을 때처럼.
썩 좋은 기분은 아니라서 무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으니, 리슈잉은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물러갔다.
나는 오랜만에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푸른 하늘에 검은 연기가 섞여 들어간다.
* * *
수뇌부의 마비에도 불구하고 연합사령부의 재량으로 만주 진격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후.
중국의 자오펑 총통이 몸소 뉴욕에 있는 UN 본부에 출석해 ‘모든 종류의 폭력과 테러에 대한 반대 연설’을 했다.
모스크바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현장에서 목청을 높이고 마이크를 두드리며 훼방을 놓았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그리고,
검찰 대통령의 암살 미수에 눈이 돌아간 검찰은 테러와의 총력전에 나선 끝에 강남 지하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8명가량의 북한이탈주민 테러 조직을 발견했다.
그들은 유튜브에 어떤 영상을 살포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으나, 체포 도중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군 특수부대에 전원 사살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영상과 연설문은 현장에서 전부 소각되었으므로, 그 테러범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는 영원히 역사의 사토 속에 묻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