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82화 (282/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82화

EP 44–개문開門

사람의 가치는 평등하지 않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고, 덜 중요한 사람이 있다.

그건 폭탄이 터졌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각하! 각하! 괜찮으십니까!”

“대통령님! 아이고, 대통령님……!”

경호원들은 육편이 된 시신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대통령을 찾아 나섰고, 의료진 또한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다.

물론 이타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오히려 무의식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폭탄이 터졌을 때, 몸이 저절로 먼저 움직여 피채원을 껴안고 엎드렸다.

얼마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엎드리면서 의자 모서리에 이마가 긁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의, 의원님! 이, 이마가……!”

“괜찮아. 괜찮아.”

그 탓에 귀빈석에 멀찍이 앉아 폭발을 구경했던 주제에, 무슨 테러 한복판에 휘말린 것처럼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나였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는, 뺨을 가로질러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피를 줄줄 흘리며 폭발 현장에 다가가니 온갖 사람들이 기겁하며 다가왔다.

“이, 이게 무슨……! 많이 다치셨습니까?!”

“하, 한승문 시장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지나가며, 이 상황에서 가장 쓸모있는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하얀 양복 앞주머니에 달린 실드코어를 작동시키고, 자기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나른하게 웃고 있는 싸이코 천 사장. 불합격.

국방당 민주당계 의원들과 함께 황망한 기색으로 귀빈석에서 차근차근 대피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 양판석. 불합격.

넋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는 압구정파 출신 B급 염동술사 김태임 씨.

합격.

“이봐요, 김 헌터. 나 누군지 알죠?”

“한 의원님?! 바, 방금 저기서 폭발이……!”

“잠깐 능력 좀 빌립시다.”

반강제로 어깨동무를 하니 푸른 마력이 느껴지면서 몸과 마음이 안정됐다. 비유하자면 맨몸뚱이로 야생 정글에 있다가 기관총을 얻은 듯한 느낌이다.

나도 나름 베테랑이라 접촉만 해봐도 대충 이 인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힌다. 출력은 좀 약하지만 마나 응집력이 높다.

그럼 염력을 총알처럼 모아서 쏠 수도 있고, 얇은 발판을 만들어 허공에 날아오를 수도 있으며, 몸 전체를 감싸는 건 무리지만 한쪽 방향에 벽을 만들어 유사 배리어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컨트롤만 잘 하면 돌덩이 몇 개 치우는 데도 지장은 없을 터.

나는 아비규환이 된 테러 현장에서 잔해에 깔린 사람을 빼내고 부상자 이송을 도우며 사람 몇 명을 살렸다.

그러나 사람 몇 명 더 살린다고 해결될 사태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 * *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은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 국가가 있지만, 어쨌든 세 나라가 공들여 준비한 잔칫집은 폭탄 한 방에 초상집으로 변했다.

가장 앞에서 연단을 구경하던 각국의 고위 관료도 여럿 죽었고, 취재진과 통역가를 포함한 보좌 인원도 폭발에 휘말렸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사망자 명단에 국가수반들이 포함되지는 않았다.

중국의 자오펑 총통은 폭발에 휘말리기 직전, 국가안전부의 순간이동 능력자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대피시켰다.

원옥분 대통령은 폭발을 견뎠다.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헌터들의 필수품, GS 실드코어가 피격을 감지하고 배리어를 시전한 덕분이다.

하지만 러시아 극동군벌의 빅토르 리 상장은 폭발을 피하지도, 폭발을 견디지도 못했다.

그는 폭발에 휘말렸다.

“수혈팩! 수혈팩 가져와!”

“포션 붓지 마! 파편부터 제거해야 돼!”

“감염은 나중에 힐러 부르면 되니까 출혈부터 막읍시다.”

비각성자였다면 수술대에 오르기도 전에 산산조각났겠지만, 빅토르 리는 강체술사였다.

총알을 튕겨내는 무적은 아니었을지언정 폭발에 휘말리고도 즉사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리고 그 차이가 그를 살려냈다.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괴수 안전지대고, 수많은 외국의 부호들이 망명한 국가이며, 그들은 지난 몇 년 동안 건강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자본은 고스란히 제주도의 초상연구단지로 흘러가 초상의료기술에 투자되었고, 의료진은 신기술의 도움을 받아 기어코 반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빅토르 리 상장은 살아있다.

의식을 되찾진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 * *

여의도에서 터진 폭탄은 한국 경제까지 터뜨려버렸다.

애초에 이번 정상회담은 잔치에 가까웠다.

실무진이 모든 논의를 끝낸 뒤, 즐겁게 샴페인을 터뜨리며 전 세계에 자랑하는 행사였단 말이다.

그러니 관계 당국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매스컴을 끌어들였고, 언론 또한 오랜만의 빅 이벤트에 광고를 끼워 팔아먹기 위해 전 세계에 생중계를 돌렸다.

하나 기대감에 젖은 전 세계의 시청자들이 보게 된 거라고는 희망찬 내일로의 발걸음이 아니라 사상 초유의 폭탄 테러.

코스피 그래프가 지하로 꼴아박고 해외 투자금이 후다닥 도망치며 유재경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 오늘도 연전연승을 이어가는 풋쟁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천금순.

만주 탈환이 망하는 데 올인한 승부사였다.

‘흐음. 원래 몇 달 정도 지나고 헌터들끼리 지리멸렬하게 싸우다가 망할 줄 알았는데……’

장기적인 안목으로 한-중-러(극동) 협력이 언젠가 대차게 꼴아박을 것으로 예상한 그녀였으나,

설마 시작하자마자 폭발사산하리라고는 그녀의 천재적인 두뇌조차 예상치 못했다.

어쨌거나 베팅에 성공해 돈을 갈퀴째로 쓸어담고 있었으니 아무렴 좋다.

만주 탈환에 실패하면 식량 가격이 폭등하게 마련. 호주에 조성된 대규모 농업단지를 웃돈 주고 사들였던 그녀의 판단은 적중했다.

“사장님, 카길 앤 드미트리오스에서 저번에 판매했던 브릿지타운 플랜트를 재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뉘앙스를 보니 재판매를 거부하면 계약을 아예 무효로 돌릴 것 같습니다만……”

“카퍼스 총독한테 전해요. 올겨울에 전부 굶어 죽기 싫으면 처신 똑바로 하라고.”

“농장에 병력을 파견할까요?”

“그런 식으로 일일이 지키면 끝이 없어요. 열 받아서 불 지를 거면 맘대로 하라 그래요. 우리는 보복만 제대로 하면 돼요. 그것만 똑똑히 알려주면 앞으로는 편할 테니까…….”

“드미트리오스 회장에게 사람을 붙여두겠습니다.”

오늘도 성실하게 사업에 열중하는 천 사장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그녀의 소울 프렌드인 한승문이었다.

늘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그리고 사실 진짜로 피곤한) 절름발이 정치인은 터덜터덜 사장실에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천 사장님.”

“왜요?”

“코스피 꼴아박는 와중에 공매도 거셨습니까?”

“들켰네.”

“야- 이 정신 빠진 인간아!”

한승문은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선보이며 (물론 오랜 의족 생활에 익숙해진 것뿐이겠지만) 천 사장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대충 나라가 힘든 와중에 왜 자꾸 나라 망하는 데 돈을 걸어서 나라를 더 힘들게 하냐는 이야기였다.

“으음…….”

하지만 천금순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허상에 속아 귀중한 노동력을 ‘돈도 안 받고’ 갖다 바치는 행위를 금붕어 수준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승문 또한 가끔 금붕어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오히려 원옥분이 실드코어 덕분에 살아남으면서 공짜 광고를 전 세계에 뿌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살짝 좋았지만, 하나뿐인 친구를 잃는 건 그녀에게조차 조금 무서운 일이었으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하지만 한승문은 언제나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는 뒤늦게나마 천금순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꺼냈다.

“지금 원옥분 대통령 야마 돈 거 몰라요?! 안 그래도 미친 테러범이 주체조선이니 조선독립이니 지껄이는 바람에 문제가 심각해졌는데, 자꾸 불난 데 부채질을 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치만…… 농장을 더 사고 싶은데 돈이 부족했단 말이에요…….”

“돈벌이고 뭐고 저번에 정권에 찍혀서 날라갈 뻔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네. 이번에 금감원에서 조지려는 거 내가 간신히 막았습니다. 다들 예민한 상황이니까 자꾸 건드리지 마세요.”

“하지만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은 헌법상 권리인데…….”

“노조 활동도 합법인데 왜 해산시키셨어요?”

“그 이야기는 이쯤 하죠.”

천금순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항복하자 한승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털어놓았다.

“저번에 제가 만주에 헌터 보내지 말라고 했었지요? 그 이야기를 번복하려고 왔습니다. 만주에 골든실드에서 관리하는 헌터들을 좀 파견해줬으면 합니다.”

“왜요……?”

“빅토르 리 상장이 의식불명 상태가 되면서 러시아 쪽 헌터들이 전부 빠졌어요. 극동군벌 간부들은 이번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 모스크바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는 중입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만주에서 괴수나 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거겠죠.”

폭탄 테러범, 그러니까 대통령 경호처장은 ‘주체조선’과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폭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무려 대한민국 대통령 경호처장이나 되는 사람이 주체사상에 빠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서울 토박이였으며, 사회생활을 대통령 경호처에서 시작해 수십 년 동안 국가에 봉사한 애국자다.

갑자기 사회주의 빔을 맞고 세뇌된 게 아닌 이상 주사파가 되어 미쳐 날뛸 일은 없다.

농담이 아니다. 이게 각국 정부의 공식적인 판단이다.

“우리는 대통령 경호처장이 모종의 수단으로 세뇌되었다고 확신하는 중입니다. 지금 분위기가 아주 엄혹해요. 또 누가 세뇌되었을지 모르니까…….”

천 사장이 문득 소리쳤다.

“내가 천 회장이 아니라 천 사장인 이유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매번 이유가 바뀌는데.”

“진짜 몰라요?”

“……천 회장이 싫어서.”

“내가 아는 자기 맞네요.”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얌전히 좀 들어요. 어쨌든 누군가 대통령 경호처장을 세뇌해서 주사파 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테러를 일으켰고, 만주 탈환을 준비하던 연합사령부는 범인을 모스크바 정부로 추측하는 중입니다.”

한승문의 설명이 끝났다.

천 사장은 만주에 갈 헌터가 부족한 건 알겠는데 왜 내가 우리 회사 헌터들을 보내야 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만주 탈환을 위한 연합사령부가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 구성원이 누구이며 누굴 포섭해야 일이 편해지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빙긋 웃으며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

“근데 진범이 누구예요?”

“…….”

“자기는 알고 있을 것 아니에요.”

* * *

“북한 맞아요…….”

“이런, 씨발……”

사회적 위치가 높아질수록 욕설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멀어지던 나였지만, 피채원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진실을 털어놓으니 시발소리가 절로 나왔다.

전라북도 전주, 철통같이 경비 중인 양판석의 본가에 잠시 머물기로 한 우리는 도청 걱정이 없는 안전가옥에서 밀담을 나눴다.

“잠깐만. 세뇌되었다고 했잖아. 그럼 그 사람은 진짜로 자기가 북한을 위해 테러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 아냐.”

“맨 처음에는 저도 세뇌된 표층 심리만 읽었는데, 자세히 파고들어가니 그 사람의 본심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본심은 북한을 원망하고 있었고요.”

“……그럼.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북한 사람인 척 경호처장을 납치해 세뇌했다면?”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죠. 하지만 전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잠깐이나마 경호처장이랑 똑같은 마음을 느껴봤고, 그것 때문인지 아직도 북한이 싫네요.”

며칠 사이에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온 피채원은 손끝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을 때 느끼는 마음. 아주 오랜만에 느껴봤어요.”

“……그래. 많이 힘들 텐데 자꾸 추궁해서 미안하다. 들어가서 푹 쉬렴.”

“아녜요…….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해요.”

피채원은 힘든 와중에도 애써 웃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교성이었다. 다크한 시절 피채원이었으면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고서 자기 방으로 갔을 텐데…… 살짝 기특했다.

“예전에 의원님이랑 이곳저곳 피난 다니던 시절에는 사람들 비명 지르는 것 들어도 조금 힘들고 말았는데…….”

“그만큼 그때에 비해서 네 정신이 많이 건강해졌다는 거겠지. 약 먹고 푹 자라.”

“네…….”

피채원을 돌려보내고, 나는 방에 혼자 남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뒷수습을 대체 어찌해야 할지.

이게 다 우리의 업보다. 국가의 업보이며, 정권의 업보이다. 이 테러는 갑작스런 재해가 아니라 인과응보였다.

처음에 북한을 합병했을 때부터, 마석만 챙기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도외시했을 때부터, 북한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측해야 했다.

결국 그 불합리가 폭탄이 되어 터진 바람에 중국 총통이 죽을 뻔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군인들은 보스가 중태에 빠져 이를 갈고 있다.

대체 이를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 * *

“이건 명백한 모스크바의 무력도발입니다!”

쾅!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연합사령부의 모든 인원이 나를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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