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80화 (280/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80화

EP 43–인과응보(12)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은 그 어떤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권한 반군 세력으로, 그들이 불법적으로 점유 중인 장비와 영토는 당연히 러시아의 것이다.”

“러시아 연방 정부는 저 불법적인 반란군과 접촉해 외교 조약을 맺으려는 모든 시도를 중대한 안보적 위협으로 간주한다.”

“지금 즉시, 어떠한 조건 없이 블라디보스토크 군벌과 논의 중인 모든 협상을 중단하라.”

모스크바의 강력한 경고가 국제사회에 전해진 순간 전 세계가 얼어붙었다. 평화를 노래하던 분위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시 전쟁의 위협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 경고를 전해 들은 미국과 중국 또한 만만찮은 깡패였으니.

저게 공갈인지 진심인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모스크바 정부는 보자 보자 하니까 나를 보자기로 아냐며 블라디보스토크 반동 놈의 새끼들 머리통을 싹 다 날려 버리겠다고 선언했지만…….

상식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애들을 어떻게 잡아 조지겠는가.

원정군이 드넓은 시베리아를 건너는 것 자체가 난관인데, 몇 년 전 게이트에서 기어 나온 괴수들이 이제 시베리아 현지인이 되었으니 대규모 원정군이 시베리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냄새를 맡은 괴수 호드가 수백만 단위로 몰려와 인간 뷔페를 차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특수부대만 달랑 비행기에 태워 보내서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의 수뇌부를 암살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고.

설령 성공한다고 쳐도 그 뒤에 기다리는 건 위대한 러시아의 재통일이 아니라 눈 돌아간 군인들이 일으킬 보복성 핵전쟁이다.

이러한 근거로 미국과 중국의 수뇌부는 러시아의 엄중 경고가 국내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판단했다.

“…….”

“…….”

그러나 ‘아, 요즘 많이 힘드시겠습니다’하고 넘어갈 두 강대국이 아니다. 아무리 국내 선전용 발언이라지만 좀 괘씸하지 않은가.

냉전 시기에나 통할 공갈 협박이 지금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미국과 중국은 즉각적으로 모스크바를 규탄했다.

“자국민 보호를 포기한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정부가 이제는 파괴와 유혈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유 세계는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겁먹은 개가 두려움에 짖는다 해도 평화와 공존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만일 모스크바의 핵탄두가 유라시아 대륙을 공포와 죽음으로 물들이려 책동한다면, 평화를 사랑하는 중화민족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게이트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와 중국이 힘을 합쳐야 미국에 대항할 수 있었건만,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았는데 반쪽짜리 러시아가 이에 대항할 순 없는 노릇.

그러나 모스크바는 애초부터 이를 예측했고, 자국 언론과 인터넷을 철저히 통제하며 비판 성명을 계속 내놓았다.

나중에 블라디보스토크가 독립하더라도, 이게 다 국제사회의 깡패들인 미국과 중국 때문이라고 변명하기 위한 밑밥을 까는 것이었다.

물론 이 행위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는 못했지만 강대국 하나가 작정하고 잔칫집에서 깽판을 치는데 분위기가 좋을 순 없다.

<북부 방위선> 계획에 중국은 체면을 걸었고 미국은 돈을 걸었다.

둘 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

결국 중국이 총대 메고 모스크바의 입을 닥치게 만들기 위해 UN에 경제 제재안을 띄우려고 했지만,

이 시점에 EU가 중재에 나섰다.

모스크바의 편에서.

* * *

[시장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메드베데프 그 아저씨가 원래 이렇게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닌데…….]

국가들의 연맹인 EU에 그나마 여당이라는 게 있다면 유럽의회의 다수당일 것이고, 유럽의회를 이끄는 다수당은 <국경 없는 기사회>다.

그리고 그들이 동북아시아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당연히 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 내가 창립 멤버였으니까.

“그윈 슈미트체바 의원, 경청하고 있으니 조금만 침착하게 말씀하세요.”

뤼미에르의 측근인 S랭크 창술사는 이제 유럽연합 의원이 되어 전투복 대신 양복을 입은 채로 화상전화 저편에서 내게 읍소하고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이랑 총리가 지금은 완전히 정신 나간 전쟁광처럼 보여도, 사실 만나 보면 꽤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국제 협력에도 적극적이었어요. 미스터 한도 아시잖습니까.]

“으응. 알죠. 알죠.”

[지금은 정권 지지율 떨어져서 발악하는 겁니다. 정말로 전쟁을 일으킬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UN에서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걸어버리면 유럽 전체가 피해를 봅니다. 게이트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요.]

“어허…… 으흠…….”

국경 없는 기사회의 창설을 주도하고 가끔씩 찾아가서 일손도 보태고 그랬던 나에게, 기사회의 헌터들은 옛날에 같이 놀았던 아파트 조기축구회의 멤버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공적으로 엮인 게 아니기 때문에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딱히 없지만, 오히려 사적인 친분만 미묘하게 있으니 통 크게 도와줘서 친분을 쌓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다.

“제가 마침 중국 국가안전부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말은 한번 전해보겠습니다. 조금만 온건하게 가자고요.”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역시 저희가 기댈 정치인은 한 시장님뿐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허허, 미국은 그쪽에서 설득을 해 보세요. 제가 미국에는 인맥이 없어서요.”

[지금 기사회장님이 직접 워싱턴 DC에 가 계십니다. 어떻게든 UN에서 러시아를 제재하는 상황은 막아 봐야죠……. 어쨌든 정말 고맙습니다.]

유럽도 완전히 뒤집힌 상황인지 그윈 슈미트체바는 몇 번이나 내게 인사하고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쪽 동네는 지금 새벽일 텐데. 아무래도 새벽에 정치인들이 죄다 일어나서 사방팔방에 전화를 돌리는 중인 모양이다.

나는 오래 끌 것도 없이 리슈잉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가안전부 정치부 주임 리슈잉이다. 용건은?]

“승진하셨습니까?”

[…….]

“여보세요?”

[……당신 한슁린 부총경감 아닌가?]

“한슁원입니다만.”

[아……!]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쪽팔림이 담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했습니다. 한승문 시장님. 제가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를 잘못 보았군요. 절대로 한 시장님 전화번호를 잘못 저장한 건 아닙니다.]

“아, 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아, 네. 다름이 아니라 범유럽연맹 대표회의에서 저한테 연락이 와서요. 그 친구들이랑 저랑 워낙 관계가 깊지 않습니까.”

[아아…….]

“아무래도 러시아에 경제적 제재가 가해지면 유럽에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인데, 모스크바의 망동에는 신경 끄고 우직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당에서는 엄정한 기율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중국의 절친한 벗이신 한 시장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원래는 조지려고 했지만 네 체면을 봐서 한 번은 참아주겠다는 소리였다.

* * *

서울 한복판에 갑작스럽게 열린 S급 게이트는 아직도 시퍼렇게 마력을 흘리며 서울 상공에 조금씩 괴수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족족 헌터들 손에 마석이 적출되며 쏠쏠한 돈벌이가 되고 있었으니 조금 다른 의미에서도 S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중국 총통과 블라디보스토크 군벌 총사령관이 오는 마당에 게이트를 열어둘 수는 없는 노릇.

서울시 공무원이 찾아와 통보한 영업정지 처분에 길드장은 오열했다.

“아, 안 돼! 이대로 폐문하라는 소리가 말이 됩니까!”

“저기요, 사장님, 저희도 위에서 결정 난 내용 그대로 읽어드리는 거라…….”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더 캡시다!”

“자꾸 그러시면 시정부에서 게이트 소유권 압류하고 저희 측에서 폐문할 수도 있어요.”

“하! 차라리 그러든가!”

“물론 그다음에 모든 비용은 사장님께 청구할 거고요.”

“언제까지 폐문하면 되죠?”

길드장은 고민했다.

S급 게이트에서 순차적으로 튀어나오는 괴수는 충분히 감당이 가능했지만, 막상 게이트 저편에 쳐들어가 전부 쓸어버리기에는 힘이 딸렸다.

다행히 길드장은 한때 동대문에서 죽도록 구르면서 살아남았던 경험이 있었고, 옛날에 모셨던 대장님을 간신히 불러올 수 있었으니.

그것이 설진운이 서울 한복판에 출두하게 된 이유다.

“와…… 설진운 떴다…….”

“진짜 칼 한 자루만 들고 다니네.”

“장비는 생각보다 별론데…….”

웅성거리는 헌터들 사이로 설진운이 태연하게 팀원들을 살폈다.

“탱커, 옵저버, 싸이커, 힐러, 하이드로키네시스, 이렇게 A급 다섯 명 맞나요?”

“네, 넵! 맞습니다! 힐러는 B급이지만 찬혁이 이 친구가 경력이 적어서 그렇지, 출력만큼은 A급이에요.”

“인원이 좀 많은 것 같긴 한데…… 그냥 가시죠.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길드장의 인맥 덕에 S급 헌터와 동행하게 된 헌터들은 잔뜩 흥분하거나 긴장한 상태였지만, 설진운은 무장 상태와 포지션만 간략하게 확인하고 게이트로 진입했다.

말도 없이 순식간에 건물 벽을 타고서 이차원 너머로 몸을 던진지라, 팀원들은 헐레벌떡 설진운의 뒤를 따라 게이트로 진입했다.

그들은 정체불명의 공간에 떨어졌다. 세상 어느 게이트 너머가 정체불명이 아니겠느냐만.

“흐음……!”

설진운이 가볍게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푸른 마력의 안개가 어지럽게 떠도는 동굴은 딱딱한 살점으로 된 공간이었다.

다행히 중력은 있는 곳이었다. 마력 농도가 낮다는 뜻이다. 마나에 몸을 맡기고 허공을 유영할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건 우주에서 싸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니.

중력이 있다는 건 괴수에게 다리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고, 휴머노이드와 드래고노이드형 괴수의 출현 가능성이 높았다.

경험상 드래고노이드 괴수를 볼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동굴의 형태, 미묘한 발자국,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등등, 모든 정보를 취합한 S급 헌터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두 따라오세요.”

“어, 음…… 중력이 있군요!”

“동굴 벽은 돌처럼 보이지만 딱딱한 살점입니다. 이 공간 자체가 괴수의 뱃속일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에요. 통로가 좁고 복잡하니 드래고노이드형 괴수가 출몰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제 갑시다.”

뒤늦게 자기가 할 일을 파악한 옵저버가 전장을 분석하기 시작했지만 설진운은 짤막하게 브리핑을 마치고 동굴 수색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괴수가 일행에게 덤벼들었다.

“크와아아악 - !”

괴수가 마력의 파도를 헤엄치기 좋게 진화하면 물고기의 형태가 된다.

거기서 중력이 있는 환경에 들어가면 다리가 생기며 악어와 비슷하게 변한다.

악어가 다른 악어와 싸워 이기기 위해 팔다리가 진화하면 용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그런 형태의 괴수를 드래고노이드라고 한다.

특이사항으로는 괴수 사이의 전투를 자주 겪어봤을 테니 전투지능이 높고, 근력과 악력이 매우 강하며, 꼬리가 존재하니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이 있다.

재수 없으면 이빨에 독이 있거나, 입에서 불이나 번개가 나오거나, 꼬리가 제멋대로 늘어나 사람을 휘감는 개체를 만날 수도 있다.

특히 사족보행으로 순식간에 돌진을 해올 수도 있다는 점이 까다로운데…….

설진운에게 돌진한 괴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반으로 갈라져 고깃덩이가 되었다.

슥 -

설진운은 괴수의 허리를 잘라 버리고도 방심하지 않고 목과 꼬리를 추가로 잘라냈다.

삭 -

그리고 분석을 시작했다. 피부의 강도, 꼬리의 움직임, 괴수의 전투지능, 배에 있는 유륜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젖먹이 생활, 등등.

설진운이 모든 분석을 마쳤을 때쯤, 팀원들은 이제 막 감탄을 시작한 참이었다.

“우와……! 대단하십니다! 순식간에!”

“전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방금 어떻게 잡으신 겁니까?”

상황이 이러하니 차가운 성격은 아닌 설진운의 입에서도 딱딱한 어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동합니다.”

* * *

일행은 총 7명이었다.

설진운.

길드 소속 헌터 5명.

그리고 마석 수거 담당 서포터 1명.

“수거하고 가겠습니다.”

서포터의 사무적인 선언에 헌터들은 주위를 살피며 휴식을 가졌다. 설진운은 휴식하지 않고 칼에 묻은 피만 살짝 털어냈다.

다친 헌터들이 피를 닦아내고 포션을 뿌리는 동안 서포터는 괴수의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석을 꺼냈다.

그는 집게를 사용했다. 서포터치곤 드물게 비각성자가 아니었으니까.

각성자는 접촉하는 순간 마석을 흡수하는 탓에 서포터로는 비적격이다.

“쩝…….”

길드 소속 헌터들은 그를 미묘한 눈치로 바라보았다. 적대감과 아쉬움이 반반 섞인 표정이었다.

옛날에는 헌터들이 괴수를 잡으면 곧장 마석을 흡수해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석의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상승하고, 앞으로도 쭉 상승할 것으로 보이는 지금.

길드에서 헌터들이 마석을 마구잡이로 흡수하게 놔둘 이유가 없다.

이것이 사냥터에서는 서포터가 모든 마석을 채취하고, 헌터들은 회사에서 나눠주는 마석을 흡수하는 관행이 새롭게 생긴 이유다.

그리고 대체로 헌터와 서포터의 소속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저기요. 서포터 선생님…….”

“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이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허점이 있다.

길드 소속 헌터들의 대장이 길드 모회사 소속 서포터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마석 나눠 드실래요?”

탱커는 조심스럽게 제안을 건넸다. 우리 몫 마석을 나눠줄 테니 같이 흡수하고서 회사에는 비밀로 하자는 이야기다.

평범한 비각성자 서포터나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북한 출신 가이드였으면 이럴 필요도 없지만, 이 서포터는 나름 업체에 소속되기까지 한 각성자였으므로 대우를 해주는 거였다.

그러나 회사 측도 이걸 모를 리 없다.

회사는 거의 꼴통에 가까운 원칙주의자를 파티에 붙여 놓았다.

“안 됩니다. 규정에 어긋납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어차피 많이 주워가 봤자 회사가 먹잖아요.”

하이드로키네시스와 힐러, 그리고 싸이커도 한 마디씩 거들며 분위기를 만들었다.

“맞아. S급 게이트 토벌에 서포터를 붙이는 경우가 어딨어. 우리 목숨 챙기기도 힘든데 서포터까지 어떻게 보호하냐고. 아, 우리가 서포터님 안 지켜주겠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회사가 돈 욕심이 너무 많다 이거지.”

“원래 S급 게이트 정도면 헌터들이 재량껏 싸우게 하지 않아요……? 마석 챙길 시간이 어디 있다고…….”

“비싼 돈 주고 게이트 소유권 입찰 받았는데 금방 폐문하게 됐잖아. 어떻게든 본전 뽑겠다 이거지. 징그러운 새끼들…….”

이번에는 헌터들보다 회사가 한 수 위였다.

서포터가 상상 이상의 원칙주의자였다는 뜻이다.

“제 몸에 카메라가 붙어 있습니다. 지금 시도하신 계약 위반 행위는 차후 상부에 보고하겠으니, 더 이상 제게 불법적인 일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헌터들이 서포터에게 가진 미묘한 우월감을 생각했을 때, S급 게이트 한복판에서도 싸움이 발생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석이나 빼주는 따까리가 괴수와 싸우는 헌터에게 맞먹으려고 드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양반이 누굴 양아치로 보나, 당신이 그렇게 법을 잘 알아? 내가 변호사 소개시켜 줄까? 내 여자친구인데 한 번 만날래?”

“마, 말이 너무 공격적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그래도 마석은 드릴 수 없습니다.”

“허허, 이봐요 서포터 선생. 우리가 마석 하나 아쉬워서 하소연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입니까? 막말로 마석 더 먹으려면 호주나 동남아 가면 됩니다. 근데 이 와중에도 마석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회사가 얄미워서 가볍게 물어본 걸 가지고 멀쩡한 사람들을 이렇게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그러면 안 되죠. 그건 너무 못된 심보 아닙니까?”

“하아…….”

“카메라 내놔요.”

“그럴 수 없습니다.”

“야. 괴수한테 맞아서 뿌서졌다고 그러면 아무도 몰라. 아니, 알아도 말 못 해. 우리가 꼬아서 딴 회사 가면 어쩔 거야?”

“카메라는 못 드립니다. 규정이-”

“점마 저거 좀 삐리한데…….”

그래도 프로들이었기 때문에 언성은 높아지지 않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큰 소리를 듣고 괴수가 몰려올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곳에서 시간 낭비하는 것도 잘하는 짓은 아니었던지라, 멀찍이서 지켜보던 설진운이 사태를 정리했다.

“여러분.”

모두가 침묵했다.

“우리는 지금 시민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속전속결로 게이트를 닫는 게 가장 큰 목적이죠. 마석은 부차적인 이득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마석 수거는 없습니다. 싸움까지 난 마당에 그 부분까지 신경 쓰기는 힘드네요. 사냥 템포를 높일 테니 최대한 잘 따라오세요.”

“넵, 알겠습니다.”

“설 헌터님 말씀 완전 멋있게 하신다~”

“허허, 1세대 헌터님 아니시랄까 봐 되게 원론적인 이야기인데 멋지게 들리네요. 저희가 부끄럽습니다.”

눈치 빠른 (혹은 약아빠진) 헌터들은 희희낙락 웃으며 설진운의 판단에 복종했지만,

무려 대기업이 이놈은 진짜 중의 진짜라고 판단한 사람답게, 서포터는 이 와중에도 설진운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죄송합니다만 회사 규정상 마석 채취는 반드시-”

“…….”

설진운은 조금 신기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 오래였으니까.

사실 헌터 사회의 군기는 어떤 면에서 군대보다 더한 편이었다. 사람 목숨이 달렸으니 어쩔 수 없다. 의사와 간호사 사회 사이의 위계질서보다도 당연히 엄정했다.

설진운은 지금껏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 *

우박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동대문역 인근의 뒷골목.

피 묻은 교복을 입은 세 명의 학생이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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