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79화 (279/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79화

EP 43-인과응보(11)

모든 권력자가 기계는 아니다.

물론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기계처럼 행동하는 건 맞다. 거인이 움직일 때마다 휩쓸리는 개미 하나하나를 동정한다면 금세 우울증에 빠질 테니까.

그러나 사람인 이상 마음 속 어딘가에는 연약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고, 놀랍게도 그건 걸어다니는 자본주의 괴물인 천 사장에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천 사장은 비즈니스 이야기가 끝나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휴우. 실은 요즘 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셔서 걱정이에요…….”

“많이 편찮으십니까?”

“네. 오늘내일하세요. 숙환에 시달릴 정도로 연세가 많으시진 않은데, 아무래도 나한테 천목그룹 뺏기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싶구…….”

내가 알기로 천 사장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돈 들어오는 딸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으로, 현재 제주도의 한적한 별장에 감금, 아니, 요양 중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막내딸이 선왕을 고이 모신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그녀가 아끼던 강아지를 골프채로 때려 죽인 것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아직 동정심이 남아 있던 것일까. 오늘따라 천 사장의 처진 눈매가 조금 더 슬퍼 보였다.

나는 동갑내기 친구로서 위로의 뜻을 전했다. 우리의 시작은 정경유착이었지만, 수많은 사건을 겪으며 인간적인 정이 안 들 수가 없었으니.

“그렇군요……. 유감입니다. 하늘이 야속한 탓에 가족들 사이에 상황이 너무 꼬였으니 우리 천 사장님도 생각이 복잡하시겠네요.”

“맞아요. 슬슬 상속이 다가오니까 사랑하는 오빠들이 몰래 변호사를 만나서 유류분 소송을 준비하고 있더라구요. 여유롭게 사람 써가며 개짓거리하는 거 보니까 제주도 생활이 편한 것 같아서 아예 일본으로 보내버리려고 했는데, 다른 그룹 회장님들이 집안 너무 콩가루 만들지 말라고 눈치를 줘서…….”

“아.”

“그 할아버지들이 다른 회사 사람이긴 해도 족보 따져보면 친척 어르신들이거든요……. 그래서 오빠들 본인을 건드리지는 못하고, 오빠들 부하를 잡아서……. 오케이, 여기까지.”

* * *

“오케이는 무슨! 설마 담궜어요?”

매년 연례행사처럼 검찰에 들어가 벌금이나 사회봉사 처분을 받고 잉잉 울며 경제 망한다고 언론 플레이를 하는 천 사장이었지만, 살인 청부는 나조차 감당이 안 되는 짓거리였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천 사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황당한 기색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담구긴 뭘 담가요…….”

“그, 그렇죠? 살인은 안 했죠?”

“물론 내가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에 충성심 과도한 직원들이 오빠들 부하를 잡아다가 머리통을 제주도 앞바다에 담궜다 빼는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우리 회사 비서실장과 경호팀장이 관여했을 수도 있는 일련의 사태를 공식적으로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을 거란 입장만은 확실해요…….”

“실례지만 혹시 미치셨습니까?”

“미친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입장도 생각해봐요……. 아, 돈이 장난이야!!!”

“어어, 흥분하지 마요. 빈혈이면서.”

“후우. 후우……. 1억을 가지고도 사람을 죽이는 세상인데 나는 조 단위를 가지고도 사람을 안 죽였어요. 역시 나는 천회장이 아니라 천사장이 맞아요. 완전 엔젤이잖아…….”

돈 얘기가 나오자 잠깐 본성이 드러났지만 냉장고에서 꺼낸 초콜릿을 갖다 주자 당분을 충전하고 냉정을 되찾은 천 사장이었다.

그녀가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나긋한 원래 목소리를 되찾았다.

“흐음……. 그나저나 자기 은행빚 16억은 왜 안 갚고 있는 거예요? 게이트 몇 번 돌면 해결되는 금액이면서.”

“공직자 재산공시라는 게 있잖습니까. 어느날 갑자기 목돈 들어오면 유권자들이 위화감 느껴요.”

“꼴랑 16억을 가지고…….?”

“지금은 내가 위화감을 느끼네요. 자꾸 그러면 진보당으로 전향할 겁니다.”

“으음…….”

천금순의 머릿속에서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한승문이 대한소비에트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취임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까지는 실없는 상상이었지만, 헌터의 무력을 앞세워 강력한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정치인 한승문은 실현 가능성이 존재하는 대참사였다.

“바, 방금 말은 농담이었어요. 그나저나 재벌이 몇백억씩 해먹는 건 괜찮아요? 헌터는 오히려 사이즈가 소소한데……?”

“재벌은 혈통빨이지만 각성은 운빨입니다.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 * *

<북부 방위선> 계획은 언뜻 보면 인류가 힘을 합쳐 괴수를 몰아내자는 인류애 넘치는 계획 같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조금 냉소적인 시각으로 이 계획을 바라보았다.

첫째 이유는 미국이 추진했던 <멋진 신세대> 계획이 호주에서 대차게 꼴아박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요,

둘째 이유는 미국도 국제사회의 총의를 모으지 못했는데 중국이 그걸 할 수 있겠냐는 비웃음 섞인 의문이었다.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 협력은 모두 문제가 있었다.

일대일로는 경제협력을 미끼로 상대방을 착취하는 신-식민주의였고, 중화연방은 좋게 평가해도 ‘뒈지기 싫으면 내 밑에 들어오라’는 깡패짓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부 방위선> 계획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전세계 식자들이 느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세대는 역사상 가장 큰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건 정체 모를 외계의 침략자 따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주한 진정한 시련은, 반목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을 수 있는가- 라는 역사의 질문입니다. 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예!]

미국은 만주 탈환을 위해 자국 헌터 길드를 파견하고,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과 반목해온 중국은 이렇게 답했다.

[세계반파시스트전쟁이 인류에게 가르쳐 준 바가 있습니다. 그건 공존공영의 길이 인간 사회의 정도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본디 개척자의 나라이며, 그 열의와 도전의 정신은 평화를 사랑하는 중화민족이 열렬히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일 이유가…….]

이 순간, 국제사회에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

전세계가 불타기 시작했다.

“드디어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는가!”

“속지 마! 빨갱이들의 화전양면전술이다! 이제 곧 중국이 호주를 침공할거야! 그럴 계획이 아니고서야 저럴 순 없어!”

“중국이 친미로 돌아서면……! 굳이 대만 독립을 지원할 이유가……?!”

각국의 권력자들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동안, 평범한 사람들은 세계평화가 코앞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위 아더 월드>가 빌보드 차트에서 역주행을 시작했고, 평화를 노래하는 시위대가 각국의 광장에 몰려나와 6070 히피 감성을 재현했다.

사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번 발표는 단지 미국이 중국과 만주에서 비즈니스를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었지만,

매일 어디가 무너졌고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만 주구장창 들어야 했던 대중들의 입장에선 메마른 감성을 되찾을 단비와도 같았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자세한 건 덮어두고 일단 기뻐했고, 언론은 언제나 그렇듯 진실을 제쳐두고 일단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부터 확대-재생산했다.

[“공존공영의 길 걷겠다” 자오펑 총통의 리더십]

[게이트 시대의 명곡, 캔자스를 대표하는 헌터 겸 가수, ‘카멜레온’ 지미의 ‘for peace’]

[만주리아-드림. 청 제국의 고토에 불어오는 평화와 번영의 바람! 경제적 효과는?]

이 기이한 국제적 대중문화 특이현상에 각국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가 뭐가 됐든 사람들이 행복해하면 여당 지지율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화 분위기에 합류했다.

“게이트 사태를 극복할 진정한 방법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한 마을에 사는 가족인 것처럼 협동하고…….”

“역사를 거울삼아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마음을…….”

“단결된 시민들의 의지가 게이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열쇠…….”

아무 상관 없는 정치인들도 마치 자기들이 미-중 협력을 이끌어낸 것처럼 SNS와 뉴스에 꾸득꾸득 기어나왔지만, 일단 한 번 평화 분위기에 취한 대중은 정치인들의 재롱잔치도 그냥 웃고 넘어갈 정도로 너그러웠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연예인들이 뒤따라 움직였고, 다국적 헌터 길드는 ‘평화를 지키는 헌터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 모금 운동을 시작했으며, 동네 옷가게조차 티셔츠에 ‘러브 앤 피스’만 붙이면 팔린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장사에 나섰다.

이렇게 세계인이 평화주의에 취해 축제를 이어가는 듯 싶었지만…….

모스크바가 쏘아올린 작은 핵폭탄이 분위기를 박살냈다.

[블라디보스토크 괴뢰 정부를 진압하기 위한 ‘특수 작전’을 선언한다-!]

* * *

모스크바 정부가 처음부터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을 증오했던 건 아니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이 극동군벌에게 암살된 이후에도 모스크바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을 증오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CIA도 모르는 비밀 중의 비밀이지만, 모스크바 정부의 핵심 지도부는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에 딱히 악감정이 없었다.

“솔직히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을 전부 버리는 판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잘못한 것 같단 말이죠…….”

현재 러시아 연방을 이끄는 대통령과 총리는 당연하게도 수십 년간 이어진 푸틴 독재 체제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언제 어떻게 푸틴 대통령에게 밉보여 방사능 홍차를 처먹고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생활을 수십 년 동안 했다는 소리다.

물론, 자기들이 방사능 홍차를 배송해 죽인 사람들도 많았고 말이다.

어쨌든, 그런 정치적 업보도 쌓여 있었고, 게이트 사태로 러시아 경제가 또다시 붕괴하기도 했으며, 개문 사태 초기의 강압적인 조치로 시민들이 혁명 직전까지 다다른 순간-

-푸틴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각하! 각하아아아 - !”

“으흡…… 으흐흑……! 이렇게 저흴 두고 떠나시면……! 으흐흐……!”

푸틴 체제의 2인자와 3인자는 평소 두루두루 쌓아둔 인맥과 러시아 연방보안국 요원들의 부드러운 설득을 통해 각각 대통령과 총리 자리에 올랐다.

수십 년동안 독재국가 정치판에서 살아남았던 두 사람의 상황 판단은 아주 기민했다.

“메드베데프 총리님, 솔직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반역자들을 굳이 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각하. 국민들은 지금 증오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게 우리가 되는 순간 끝장입니다. 아시죠?”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으니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절대 하지 맙시다.”

모스크바 정부에게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은 욕하기만 하면 지지율이 오르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경제를 꼴아박아도, 오폭으로 사람들이 죽어도, 방어선에 구멍이 뚫려 도시 한두 개가 터져나가도,

지구 반대편에 우리를 전부 죽이려고 하는 반란군이 핵미사일 수천 개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면 국민들은 공포에 질려 정부를 응원했다.

이건 수십 년에 걸친 냉전 기간 동안 검증된 정권 유지 방법이었고, 심지어 대통령과 총리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치를 해온 괴물들이었다.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은 수십 년 동안 러시아를 다뤄본 경력직답게 순식간에 정권 지지율을 부양시켰고, 국수주의 노선에서 외교 노선으로 매끄럽게 선회하여 유럽 사회에 편입되었다.

EU에 가입한 것이다.

이제 툭 하면 가스벨브 잠근다고 땡깡 부리는 유럽의 외톨이 러시아는 없다.

러시아는 이제 유럽의 외곽에 있는 잠재적 침략자가 아니라, 게이트 사태에 맞서 싸우는 EU의 가장 핵심적인 일원이다.

물론 언젠가 때가 되면 EU를 장악하기 위해 개수작을 부리겠지만 그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과 총리는 어디까지나 현상 유지가 목적인 보신주의자들이었고,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받지 않는 이상 ‘위대한 러시아’를 만들겠다는 푸틴의 팽창 의욕은 개나 줘버려도 상관없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위협받는 순간 푸틴보다 더 과격하게 나올 수도 있는 게 그들이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 러시아 연방에 반란을 일으킨 반군임을 국제사회에 명백히 소명하였다.”

지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 뭘 하든 상관 없었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멋대로 외국과 접촉해 세력을 불려도 가만히 방치했다.

설령 그들이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만주 전체를 장악했더라도, 모스크바 정부는 비난 성명 한 번 발표하고서 이를 방치했을 것이다.

정권 지지율과는 딱히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나 ‘북부 방위선’인지 뭔지 웃기지도 않는 국제적 군사행동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외교의 주체로 참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외교권을 가진 조직으로 인정받는다면, 정식 국가로 승인된다면, 독립한다면,

모스크바 정부는 영토를 상실한다.

국민들의 자존심에 금이 간다.

그 순간, 현 정권은 무너진다.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과 총리는 그걸 막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힐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무려 수십 년 전부터,

그들은 권력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은 명백히 러시아 연방에 반기를 든 반군 세력이다. 유엔 안보리는 어째서 이들을 제재하지 않는가? 이 순간 국제법은 의미를 상실하였다.”

“이제부터 일어날 모든 일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의 책임이다. 당신들은 역사에서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할 것이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