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77화
EP 43-인과응보(9)
생존.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과 식량 따위가 필요하지만, 인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현대인은 의식주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감과 사회적 안전망 따위가 주어져야 ‘살아간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요산 인근 지하철에서 생존하는 북한 출신 부랑민들은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개성시 출신의 14살 소녀 리은혜의 인생도 그러했다.
무너진 지하철역 구석에 앉아 천장 틈으로 하늘을 내다보던 소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얘. 혼자 있으면 괴물이 물어가도 아무도 모른다.”
얍삽하게 생긴 청년은 녹슬고 구겨진 양동이를 리은혜의 발치에 툭 내려놓았다.
“양동이에 물 좀 채워다오.”
“네…….”
“날래날래 하라. 대장 동지가 목마르다고 하시지 않니.”
리은혜에게 향하는 구박은 동화책 속에서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못된 악당의 그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굼뜬 부하직원을 힐난하는 직장 상사의 재촉에 가까웠다.
14살 소녀 리은혜는 조직이라기에는 허술하고 패거리라기에는 치밀한 이 무리에서 어린아이가 아니라 일꾼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 일은 식수 조달이다.
“흐윽……!”
리은혜가 허공에 손을 내젓자 깨끗한 물줄기가 쪼르륵 양동이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양동이가 깨끗한 물로 가득 찼다.
청년은 그제야 방긋 웃으며 리은혜의 머리를 쓰다듬고 떠나갔다
그 손길이 왠지 모르게 음습하게 느껴져서 리은혜는 청년이 뒤돌자마자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평소 일절 흑심 없이 리은혜를 귀여운 동생처럼 여기던 청년이 알면 꽤나 상처받겠지만, 리은혜는 모든 남성을 예비 성범죄자로 여겼다. 그 덕에 지금껏 살아남았으니까.
‘은혜’라는 이름의 뜻은 수령님께서 주신 은혜였지만 리은혜가 생각하기에 그녀가 받은 진정한 은혜는 바로 이것이었다.
“꼴깍…….”
리은혜가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 혼자 있음을 확신하고는 순식간에 물을 만들어 마셨다.
양동이에 물을 채울 때는 힘든 척을 했지만 맘만 먹으면 물이 없는 곳에서도 사람 크기의 물을 만들고, 조종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 덕에 아직도 살아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지하실에서 쑥덕거리던 동네 사람들이 몰래 충성한다던 주예수 수령인지 장군인지 모를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칫.”
그놈의 주예수 장군 때문에 집안 말아먹었으니 리은혜는 불퉁하게 혀를 차고 일어났다.
어둑한 지하 철도였지만 군데군데 모닥불과 호롱불이 걸려 있어 앞이 아예 안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장풍청년단’이 지하에 들어온 지도 벌써 7개월이 다 되어가니 눈은 이미 암흑에 적응한 지 오래.
리은혜는 깜깜한 지하에서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배경은 어둠이고 빛은 희미한 주황색이며, 사람은 살색이 아니라 갈색이었다. 그것이 지하의 색감이다.
씻지 못해 병든 냄새가 나는 사람들. 지상의 폐허에서 가져온 천막. 이곳저곳에서 주운 탓에 낡고 녹슬었으며 가지각색인 생활용품들.
역에서 떼어온 쇠파이프를 든 청년들. 빗물을 받아 구석에서 빨래하는 녀석들. 돌봐주던 가족이 괴물에게 물려간 뒤로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삐쩍 마른 아이 두어 명.
어떤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
이곳은 죄인들이 사는 곳이다
리용수 장군님 대신 김일성 수령님을 찬양한 죄, 밤에 길거리를 멋대로 돌아다닌 죄, 딸년 내놓으라는 명령에 오히려 군관을 죽인 죄, 이런저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쫓겨나 모였다.
리은혜의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 김일성 리용수 말고 주예수 믿으라고 선동하는 죄를 지어 도망쳤다.
도망치던 도중 어머니가 괴물에게 물려 갔고, 아버지는 폐허에서 물건 뒤적거리다 녹슨 철근에 긁히고 몇 주 끙끙 앓다가 돌아가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리은혜를 데리고 장풍청년단에 가입한 이후에 죽어서, 리은혜는 악착같이 청년단에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따라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손에서 물줄기가 줄줄 나오며 청년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야! 은혜야! 물 좀 다오.”
“무슨 일입니까?”
“빨래하는데 물동이가 다 떨어졌지비.”
“마실 물 아니면 알아서 하십시오.”
“염병할 년. 심보가 아주 오소리 오줌보만 하구나.”
“히히.”
장풍청년단이 강북까지 내려와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리은혜 덕분이었다. 식수를 어디서나 조달 가능하니 무리가 탐색할 수 있는 거리가 훨씬 늘어나는 것이다.
그 덕에 장풍청년단은 개성에서 몇몇 군관들을 통해 마약을 받아 남한 브로커에게 내다 팔고, 강원도에서 감자와 남조선 주전부리 따위를 받아 개성시에 내다 팔았다.
기껏해야 폐허가 된 도시로 올라가 목숨 걸고 폐품을 뒤적거리는 다른 무리와는 달리, 일종의 상인 캐러벤처럼 활동하는 것이다.
물론 가끔 돈 떨어지면 남성 동지들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돈과 식량을 들고 돌아오긴 하지만, 장풍청년단은 지하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조직이었다.
그런 장풍청년단을 이끄는 대장 동지는 항상 리은혜를 챙겨주곤 했다.
“잘 지내느냐.”
“네. 잘 지냅니다.”
“배고프면 언제든 말하거라. 넌 특별하니까 배급이랑은 관계없이 간식 받아가도 된다. 그게 우리가 하는 자본주의 아니겠느냐? 허허.”
대장은 언제나 친절했지만 리은혜가 아무 능력도 없던 시절에는 종종 그녀를 벌레처럼 바라보곤 했으므로 리은혜는 대장 앞에만 서면 벌레처럼 굳어버렸다.
이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굴종하던 시절에 생긴 습관이요, ‘대장’이라는 초상능력자가 지닌 힘을 목도한 목격자의 트라우마다.
언제였을까. 대장에게 덤빈 청년단원 하나가 머리통이 깨질 때까지 맞아 으깨지는 걸 본 이후로 리은혜는 장풍청년단에서 도망칠 생각을 접었다.
그날 이후로 리은혜의 세상은 지하였으며, 세상의 왕은 대장 동지였다.
그런 세상은 아무런 전조 없이 끝났다.
“개성으로 돌아가세요.”
항상 마약을 받고 돈을 주던 브로커 대신, 남조선 말씨를 쓰는 경찰들이 약속 장소에서 장풍청년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호랑이처럼 대범하게 아랫사람을 다스리던 대장 동지는,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작은 남조선 경찰에게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굽신거렸다.
“아이고, 선생님. 저희는 그냥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저기…….”
경찰은 대장이 수줍게 내민 뇌물이 우스운 건지 아니면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말이 우스운 건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에요. 지하철을 이렇게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계시면 처벌 받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세요.”
똑똑한 대장이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은 ‘불법’과 ‘처벌’이라는 말에 단단히 겁먹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리은혜가 대장의 얼굴을 슬쩍 보니, 표정은 소인배처럼 히죽이고 있었지만 목에는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핏대가 서 있었다.
대장이 경찰에게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선생님…… 우리 물건 받아가던 브로커 양반 대신 딱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신 거 보면. 우리가 무슨 장사 하시는지도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아, 설마 마약 파세요? 이거 중범죄인데?”
“아니……! 이거는 강원군벌에서도 하는데 당국에서 눈감아 주는 장사 아닙니까. 이렇게 갑자기 떠나라고 하시면…….”
“허허, 마약이 문제가 아니라 지하철도로 사람이 막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안보상 위협이 있어서요. 아직도 이북에는 ‘빨갱이’들이 다 안 잡히지 않았습니까?”
“이익……!”
“어쨌든 이제부터 지하철도에서 부랑하는 생활은 금지에요. 위에서 내려온 방침입니다.”
경찰은 대장을 어깨로 은근히 밀치며 사람들 앞에 섰다.
“자! 자!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개성으로 돌아가세요!”
개성에서 탈출한 사람들에게 개성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하니 반응이 좋을 리 없다.
“개, 개성으로 가면 우린 다 죽습네다!”
“살려주시라요! 살려주시라요!”
“돌아가면 우린 다 총 맞아 죽는 거인데……!”
누더기를 입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흐느끼기 시작하자 남조선 경찰들이 쑥덕거렸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리은혜는 왠지는 몰라도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거 귀찮은데…….”
“그래도 매뉴얼대로 해야지. 원산으로 보내. 강원군벌에 넘기자고. 거기서 알아서 먹여 살리겠지.”
“후우…….”
한숨을 쉰 경찰이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
“예. 개성시가 싫으시면 강원도 원산으로 보내드릴게요. 거기는 안전할 겁니다.”
“히끅……!”
리은혜는 그 말을 듣고 공포에 질렸다.
개성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안다. 백두혈통 김 씨 복귀시키자고 들고 일어났다가, 리용수한테 패망해서 남조선으로 도망쳤던 사람들.
천하의 개쌍간나새끼 원옥분이 그 불쌍한 사람들을 그대로 북으로 돌려보내, 인민군이 강원도에서 전부 쏘아 죽였다.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라 쉬쉬하지만 개성 사람은 전부 안다. 리용수 치하에서 말하면 죽이니까 모른 척 살았을 뿐이다.
“…….”
“…….”
강원도로 보낸다는 이야기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이대로 끌려갔다간 전부 죽는다.
리은혜가 아는 걸 어른들이 모를 리 없다.
대장 동지가 침묵을 깨며 매섭게 외쳤다.
“쳐!”
* * *
“시장님, 강북 지역 북한이탈주민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종종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서울시 자치경찰만으로는 어렵다 이 말씀이시죠?”
“예. 아무래도 치안관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지하철 난민 무리에도 초상능력자가 섞여 있어서…….”
“하긴. 비각성자들끼리 그 험한 곳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었겠죠.”
나는 곧장 초인지원청에 치안관 파견 요청을 보냈다. 경찰에 간 쓸개 다 빼주기로 소문난 초인지원청장은 나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즉시 치안관들을 파견해 줬다.
인선에 신경을 쓴 모양인지 나와 친밀한 사람들 중심으로 다섯 명이 파견됐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여도연이 있었다.
“누나를 직장에서도 봐야 해? 정말 지긋지긋하다 진짜.”
“내가 할 소리야.”
치안관 다섯 명이 우르르 시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여도연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니 분위기가 안 좋을 수가 없다.
나는 치안관들과 짧게 친목을 다지고서 그들을 내보내고, 여도연과 독대했다.
소파에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여도연이 파견요청서를 흩어보며 중얼거렸다.
“서울시 자치경찰과 함께 지하철에 있는 북한이탈주민을 쫓아내라…….”
“쫓아내는 건 경찰이고, 치안관은 혹시 싸움 나면 사람 안 다치게 제압해 달라 이거지.”
“뭐, 딱 치안관이 할 만한 일이긴 한데 북한 사람들이 좀 불쌍하긴 하다. 자기들도 좋아서 강북까지 내려왔겠어? 먹고살기 힘드니까 떠밀려 온 건데 여기서도 쫓겨나다니…….”
사실 나도 했던 생각이라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제 곧 중국 총통이랑 러시아 극동군 총사령관이 서울에 오는데…….”
“아, 북부 방위선? 그나마 그게 북한 사람들을 위한 거니까 좀 위안이 된다.”
중대한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열리는 마당에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수상쩍은 부랑자들을 용납할 수는 없다-
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개성으로 돌아가거나 원산으로 이주될 예정이다.
사실 이건 대통령이 할 일이지만 나 또한 서울시장으로서 협조 중이다. 화끈하게 서울시 자치경찰까지 동원했다.
물론 공짜로 해주는 건 아니고, 다음 국회 원내구성에서 상임위 하나를 더 받아오기로 했다.
우리 국민당이 선거 처 발릴 게 이미 기정사실이라…….
현 지도부가 사퇴하고 수도권 난민운동권이 국민당을 장악해 행안위 상임위원장을 먹어버리면 서울시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다.
툭하면 서울시 간부를 국회로 불러내 조지거나, 서울시장의 사업 하나하나에 태클을 거는 식으로 말이다.
특히, 현재 서울은 거주자가 없는 행정구역이다. 서울시의회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신규 법령은 서울시장의 관리 감독을 전적으로 국회가 하도록 개정되었다.
물론 국회가 미치거나, 서울시장이 감당 안 되는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에야, 국회에서 사사건건 서울시장을 괴롭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나기 직전인 상황이다. 미친놈들이 국민당을 장악하기 직전인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미리 대비해야지.
일단 암묵적으로 다음 국회 때 국방당 원내대표가 국민당 지도부와 협상할 때 이호정을 행안위 상임위원장으로 밀어주기로 합의했다.
이제 국민당 총선 패배 후 난민운동권이 당을 장악하고 국방당과 원내구성 협상에 나서면, 국방당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선거 발렸지만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서 행전안전위원회를 너희한테 넘겨주는데, 그 대신 이호정을 상임위원장으로 앉혀라…….]
대충 이런 이야기다.
흐흐. 이렇게 야료를 부려대는 걸 보면 내가 정치물을 많이 먹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옛날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못 하고 멍 때리다가 막상 난민운동권이 서울시 견제하면 그제야 반격해서 개박살을 냈겠지.
역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에이씨, 얄밉네.”
피채원이 갑자기 막말을 하나 싶어서 깜짝 놀랐더니 여도연이다.
순간, 여도연이 독심술을 새로 각성했나 싶었지만 당연히 착각이었다.
“내가 쪽팔려서 어지간하면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경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여도연이 자기 핸드폰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치안관 단톡방이었다.
“이 와중에도 경찰 놈들이 경찰특공대는 비상용이라고 출동 안 시키고 우리만 좆뺑이 치게 만들고 있다는데 이거 어떻게 못 하냐?”
“아, 경찰이 치안관 겐세이한대매?”
“뭐야. 알고 있었어?”
“모를 리가 없지.”
초인지원청장이 내게 굽신거리는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게 이것이다.
초인지원청은 원옥분 정부의 것이지만, 정작 치안관들은 내게 충성한다.
그 인간들…….
술 먹고 걸핏하면 문자를 보낸다.
[장관님, 저 태민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충성충성^^ 서울이랑 빠리에서 함께했던 파이로 A급 박창진입니다. 한승문 의원님 그간 자주 찾아뵙겠다고 문자만 드렸는데 이번에 제가 술 한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장관님~~~ 잘 지내셨나요?? 저 은비인데요…… 이번에 선아 언니 소개 받고 이직하면서 치안관 사직하게 되어서 연락 드렸어용. 조만간 부산 내려가면 찾아뵙고 인사 드릴 텐데, 사표 내면서 도연이 언니가 요즘 좀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조정식 치안관입니다. 경찰 관련 고발할 사항이 있어 문의드립니다. 강원도 경찰청장 양성준이 치안관 실적을…….]
알기 싫어도 저절로 첩보가 수집되는 판국이니 치안관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찰 대통령의 당선 이후 경찰이 생존을 위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있다는 건,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정상이고.
문제는 이거다.
“근데 원옥분 대통령 집권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지금 털어서 뭐해? 나는 집권 4년 차쯤에 터뜨려서 한 번에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승문이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여도연이 소파에 앉은 채로 펄쩍 뛰며 기뻐했지만, 이내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며 시무룩해졌다.
“근데 좀 힘들다. 애들 하나씩 관두는 거 볼 때마다 좀 그래. 걔네가 돈 보고 일하는 건 처음부터 아니었잖아. 근데 자꾸 과로랑 불합리한 대우가 은근히 오니까…….”
“쫀심 상한다 이거지?”
“그거지. 자존심 상해 솔직히…… 나라 구했다고 인증 받은 고위 헌터나 되어가지고 경찰한테 잡일이나 떠맡고. 나도 우리 애들 고생하는 거 보면서 못 도와주니까 좀 그렇고…….”
“으음…….”
할 수는 있다.
감지윤을 괴롭혔다는 명목으로 행정안전부를 작정하고 털어버리면 장관을 은퇴시키고 차관을 병신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주지시키며 내가 지랄하는 거 보기 싫음 경찰 단속 똑바로 하라고 협박하면 경찰청장도 날려 버릴 수 있다.
근데 그러면 원옥분 대통령이 곧장 반격에 나설 것이고, 애들 싸움 어른들 싸움 되는 거 순식간이다.
심지어 국가적 중대사를 앞두고 있으니 더욱 어렵다.
물론 정상회담을 앞두고 분쟁 만들기 싫다고 원옥분 대통령이 꾸욱 참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대통령과의 관계 악화를 불러온다.
이걸 천천히 설명해 주니 오늘따라 지치고 처량해 보이는 여도연이 한숨을 푸욱.
“후우, 정치 어렵네…….”
“어렵긴 뭐가 어려워?”
“음……?”
나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치라는 거. 사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행정안전부에 압력을 줘서 경찰청의 망나니짓을 잠재우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따라와 봐.”
나는 여도연과 함께 행정안전부로 향했다. 서울시청이나 행안부나 세종정부청사 안에 있으니 걸어서 15분도 안 걸렸다.
눈에 띄는 검푸른 치안관 코트를 입은 여도연과,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 덕에 행정안전부 근처만 갔더니 미리 소식을 들은 차은수 차관이 헐레벌떡 마중을 나왔다.
“시, 시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공무원을 수십 년을 하면 대충 좆될 것 같은 상황에는 감이 오게 마련이다. 차은수 차관은 벌써부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인사도 안 하고 난처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예……!”
“저기…… 요즘 경찰이 말입니다.”
“아……! 예……!”
“으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은수 차관에게 7초가량의 침묵을 선물했다.
“…….”
“…….”
“…….”
“…….”
1초가 지날수록 차은수 차관의 동공도 더더욱 심하게 떨려왔다.
그에게 7분처럼 느껴졌을 7초가 지나고, 나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서 바람을 빼듯이 해맑게 웃으며 긴장감을 없앴다.
“아닙니다. 잠시 지나가다 인사드렸어요.”
“아, 아아…… 예…….”
그러나 지나가다 들린 것 치고는 용건이 전부 끝난 것처럼 곧장 뒤돌아 돌아갔다.
떠나가기 직전, 여도연이 슬쩍 살펴본 차은수 차관은 귀신이라도 왔다 간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 * *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 !!!”
강원도 경찰청장 양성준은 경찰청 차장에게 불려가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노호성을 들었다.
뭔진 몰라도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경찰청 차장은 사무실 바깥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내가 지금 청장님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온 줄 알아?! 강원도에서 일을 왜 이따구로 했냐고! 행정안전부에서 경찰을 통째로 털어버리겠다고 이를 박박 갈고 있다잖아!”
“가, 강원도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북한 쪽 강원도는 강원도가 아니야?! 어?!”
잔뼈 굵은 경찰이었던 양성준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경찰은 검찰 출신 대통령의 압박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실적을 쌓아 국민 여론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즉, 남한 지역에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혹시라도 경찰이 떼거리로 죽어 나갈 수도 있는 북한에서는 보신주의로 일관했다.
범죄자 하나 잡다가 경찰 수십 명이 ‘또다시’ 죽어 나가면 국민들이 경찰을 손가락질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 태업을 선택한 그 업보.
경찰의 그 오만함.
그 모든 업보가 결국 터져 버렸고, 그걸 떠안고 사라질 사람으로 자신이 당첨된 것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후배들한테 ‘어휴, 선배님이 그때 상황이 안 좋게 꼬여서……’라는 위로라도 들으려면 곱게 사표 써야 한다.
내 탓 아니라고 설쳤다가는 불명예 퇴직. 그리고 경찰 사회에서 선배 취급도 못 받고, 그동안 쌓은 인맥도 한순간에 증발.
양성준 강원도 경찰청장은 경찰청 차장에게 담담하게 사직 의사를 밝히고 복도로 나왔다.
“으흐흑……!”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건물 옥상에서 탈인간적인 청력으로 상황을 도청하던 여다솔은 킥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