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76화
EP 43-인과응보(8)
치안관.
헌터 잡는 헌터.
7급 이상의 고위 헌터로 이루어진 이 무력집단은 초상관리부 산하 초인지원청 공안관리국 소속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잡은 범죄자는 원래 초인지원청으로 보내는 게 정상이다. 그다음에는 국정원이나 경찰청이 개입하겠지.
하지만 의정부는 강북과 붙어 있으니 ‘서울시 자치경찰’의 명의로 업무협조 요청을 한다면 서울시장이 사건에 개입해도 되지 않을까?
이제 이런 사소한 개수작은 숨 쉬듯이 부릴 수 있다. 덕분에 나는 초인지원청 지하실에서 여도연 일행이 잡아 온 범죄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진짜 북한 사람이잖아?”
특수 유리벽 너머엔 꼬질꼬질한 부랑자가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으므로 체포한 사람이 누군지 왠지 짐작이 갔다.
“예, 시장님.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입니다. 의정부와 강북 즈음에서 체포되었고요.”
전직 치안정감 출신의 초인지원청장은 원옥분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지만 나에게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었다.
전직 청장이 그의 직속 경찰 선배였고, 그 사람은 내가 임명했었으니까. 나는 맘 편하게 질문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의정부에서 얼씬거리고 있었답니까?”
“취조를 해봤는데 입을 열지 않습니다. 다만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조폭이나 깡패에 가까워서 범죄조직이 개입한 정황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범죄…… 조직…….”
북한…… 범죄……? 으윽……!
범죄 조직이라는 말에 저절로 심장이 두근대고 손발이 벌벌 떨린다.
내 머릿속에서 악몽 같은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장전읍’ 사건.
정체불명의 헌터 사망 사건. 사실은 장기를 노린 표적 살인. 대규모 장기밀매 산업의 본거지인 북한 장전읍을 습격해 조사한 결과 범인은 야쿠자. 야쿠자에게 사주한 건 야쿠자와 내전 중이라고 알려졌던 일본 정부. 그 목적은 각성제 성분 분석.
그 ‘장전읍’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엄청난 피가 흘렀다.
북쪽 장기를 공급받은 수많은 남한 사회지도층이 체포되고. 쿠데타로 정권 잡고서 남조선에 나라를 갖다 팔려고 했던 북쪽 지도자는 일이 틀어져 죽고. 한국의 타깃이 된 일본 야쿠자는 일본 정부에게 배신당해 멸망 당하고. 일본 정부는 엄청난 마석을 헐값에 넘기는 대신 일을 은폐하고.
우리는 일본에 마석을 받아 챙겨 경제회복에 성공하고. 인체실험 결과도 뺏어와서 미국이랑 유럽에 조금씩 뿌리고. 북한도 행정권에 넣어서 병합하고…….
3초 만에 그 모든 일이 머리에 재생되었다.
“아……! 안 돼!”
“왜 그러십니까 시장님?!”
장전읍 시즌 2는 절대로 용납 못 한다!
“당장 모든 수사 인력을 투입하세요! 최고의 헌터들을 부르란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갈 수도 있어요!”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두 번째 ‘장전읍’은 안 된단 말입니다!”
장전읍 사건의 대부분은 철저한 기밀이지만, 북한이 장기밀매를 했고 남한 고위층이 그 고객인 게 들켜서 줄줄이 감방에 들어간 건 전 국민이 알고 있다.
잘은 몰라도 이 초인지원청장은 그보다는 훨씬 자세히 알 거다. 그도 장전읍의 ‘장’ 소리를 듣는 순간 대경실색을 했다.
“예! 알겠습니다! 당장 대통령께 직보하겠습니다!”
“총선이 코앞이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합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해주세요. 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장전읍 사태가 터졌을 때.
그때 내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고, 그 일의 뒤처리를 해야 했다. 그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근데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냈다.
중국이랑 미국이 지랄하는 와중에 북한을 꾸역꾸역 행정권에 편입하고, 심심하면 야쿠자 잔당이 총포탄을 갈기고, 감 기자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면서 몇 번이나 양심폭로하려는 걸 울면서 막고…….
그때 잠도 못 자고 일하느라 빠진 이빨이 대체 몇 개인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임플란트가 시큰거린다…….
초인지원청장을 내보내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니 여도연이 찾아왔다.
“왔냐?”
“어. 누나.”
여도연은 검푸른 코트를 벗어 내 무릎에 던졌다. 늦은 밤이라 조금 쌀쌀했는데 코트에 온기가 남아 있어 따뜻했다.
그녀는 내 옆에 풀썩 주저앉아 건들건들 다리를 꼬았다. 기분이 더러운지 표정이 영 죽상이었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아니 X발 들어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밀폐된 취조실에 갇힌 범죄자를 삿대질하며 하소연을 쏟아냈다.
“저 깡패 새끼가 잡혀 오는 와중에 지랄을 얼마나 해댔는지……. 내가 저 새끼 잡아서 끌고 가는 와중에 갑자기 나한테 ‘불알을 잘라서 입에 넣어주겠다’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불알 없어 이 개새끼야’ 그러면서 몇 대 차니까, ‘있어야 할 게 없어서 간나인 줄 몰랐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나보고 간나 새끼라고 그랬냐?’ 그러니까 옆에서 정식이가 간나가 사실 가시나라는 뜻이래. 그 말 들으니까 또 빡쳐서 몇 대 깠지. 사람 죽이려다 잡힌 새끼가 누구한테 가슴이 없다고 지랄…….”
“천천히 좀 말해봐. 저 깡패 새끼가 누나한테 성희롱을 했다고?”
“아니 X발-”
“욕은 그만하고.”
“경찰 아저씨들이 나한테 과잉 진압이라고 자꾸 뭐라 그러는데, 이번에는 진짜 과잉 진압 아니거든? 저 새끼 사람 죽일 뻔했다니까? 적정 진압이었어. 말하는 싸가지도 없고…….”
“알았어. 내가 잘 설명할게. 그리고 누나한테 지랄한 것도 공무집행방해로 엮고.”
“성추행으로 엮어! 저 씨X 새끼…….”
“오케이.”
그렇게 약속하자 기분이 좋아진 여도연이 본론을 털어놨다.
“잡혀 온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 정확히는 이대로 돌아가면 죽는다고 지 발로 졸졸 따라온 거긴 한데…….”
“뭐? 그 사람은 어딨어?”
“범죄자가 아니니까 국정원에서 인터셉트해 갔지. 뺏겼어.”
아이 씨. 그걸 먼저 얘기해야지.
* * *
그날 새벽. 세종시에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원옥분 대통령과 그 휘하 장관들이 모두 소집됐다. 그리고 현행법에 따라 서울시장인 나 또한 그 자리에 배석했다.
물론 서울시장은 의결권은 없고 발언권만 있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 장관 따위의 의결권은 아무 소용 없으니 발언권이 중요하다.
따라서 서울시장의 발언권은 다른 장관들보다 훨씬 컸다.
특히 여당 일색인 와중에 야당 서울시장이 혼자서 알박기를 시전하고 지랄지랄을 하면 언론에 대서특필되기 때문에 역대 시장들은 이 필살기를 애용했다.
하지만 나는 (원옥분이 무서워서) 비교적 젠틀한 편이었으므로 다른 장관들은 대체로 나를 좋아했다.
나야 지랄하고 도망치면 끝이지만 그 인간들은 남아서 심기 불편한 대통령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덕에 국무회의실 분위기는 적당히 진중하고 적당히 편안했다. 삼삼오오 모여드는 장관들이 인사를 나눴다.
“한 시장님 오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장관님. 대통령님은 아직 안 오셨지요?”
“곧 오실 겁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임 초상관리부 장관이 가볍게 장난을 쳤다. 나보다 30살은 더 많은 할아버지였다.
3대 초상관리부 장관인 그는 초대 초상관리부 장관인 내게 고개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아이고, 선배님 오셨습니까.”
“어이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관님.”
“저보다 두 기수나 선배신데 제가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러시는 장관님도 제 대학교 선배님 아니십니까.”
“아, 그랬었지요! 허허…….”
“후배한테 이렇게 장난치시면 안 됩니다.”
“미안합니다. 시장님이 너무 반가워서.”
장관급 공무원끼리 유치하게 놀고 있으니 원옥분 대통령과 김두식 국무총리가 들어왔다. 다들 정색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앉으세요.”
검찰 시절부터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검은색 바지 양복 차림의 원옥분 대통령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늙은 몸으로 새벽에 일어난 게 피곤하고 언짢은 모양이다. 하지만 본인이 선택한 대통령직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녀는 젊은 시절 범죄와의 전쟁 당시 회칼에 베인 눈동자를 만지작거리며 파일철을 뒤적거렸다. 눈치 보던 국정원장이 재량껏 보고를 시작했다.
“오늘 오후 4시 17분경. 거동수상자 신고를 받고 출발한 9등급 헌터, 여도연 치안관이 탈북자로 추정되는 2인을 체포해 초인지원청에 인계했습니다. 이에 국가정보원에서는…….”
“북한도 우리나란데 탈북이란 말이 어떻게 성립이 되지요?”
서슬 퍼런 대통령 각하의 지적에 신임 국정원장이 오들오들 떨었다.
“소, 송구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려고 그런 건 아니고. 이제 국정원도 단어부터 조금씩 바뀌어 나가야 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어서 한마디 한 거예요. 지난 수십 년간 북측을 적대적 괴뢰집단으로 간주하고 투쟁했던 조직이니까, 이제 우리 국민이 된 북한 출신의 시민들을 품으려면 사소한 단어 하나부터 교정하고 혁신하면서 체질 개선을 해야죠. 나는 그게 우리 세대의 의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장관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혹은 ‘옳으신 말씀입니다’라고 답했다.
원옥분 대통령은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내게 한 마디 건넸다.
“한 시장. 여도연 치안관은 9등급이면서 왜 이렇게 현장을 좋아하는 것 같아?”
“강한 사람이 현장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원래 다혈질이니까 국가의 위기에 먼저 나섰고, 그렇게 싸우다가 강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 우리나라에 몇 없는 9급 헌터니까 신경이 좀 쓰였어요. 나중에 친지한테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전해줘요.”
원옥분은 딴 주제로 새서 미안하다고 여유롭게 사과하며 국정원장에게 보고를 재촉했다.
그동안 포커페이스를 되찾은 국정원장이 침착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두 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살인 미수 혐의로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조사 결과 살인청부업이나 범죄 조직에 종사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 각성자 또한 아니었습니다.”
“그럼 민간인이 들어가서 칼부림이나 할 정도로 봉쇄된 의정부가 만만한 곳인가요?”
“아닙니다. 의정부, 경기 북부는 현재 몬스터랜드화에 접어들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일반인이 생존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근 생존자 캠프의 일원이었습니다.”
말이 어긋난다. 몬스터랜드화 직전인 곳에 생존자 캠프가 있다고?
현지화現地化된 괴수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보호색 쓰는 괴수, 공습을 피해 모래 속에 숨는 괴수, 자동차 밑에 숨어 있다가 바지 틈으로 들어가 생식기와 항문을 통해 내장으로 들어가 알을 까는 괴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곳에 생존자 캠프가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호주에서도 그런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 좁은 한국에서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장담한다.
그곳에 생존자 캠프 비슷한 거라도 있었으면 진작 군사위성에 포착되어 구조됐을 것이다. 아니면 구조요청을 직접 했던지!
그래서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내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말하려던 그때였다.
“북한에서 내려온 시민들의 생존자 캠프가 지하철에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치켜들려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장관들이 충격에 빠진 가운데, 국정원장이 브리핑을 이어갔다.
“이들은 대부분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등지의 피난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경기 북부와 강북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지하도를 중심으로-”
대통령이 질문했다.
“왜 서울 방면으로 흘러들어온 거죠? 황해도나 서울이나 황폐화된 건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것이 탈-”
대통령 가라사대 ‘탈북’은 금지어다. 국정원장은 첩보기관 수장다운 순발력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출하는 데 가장 빠른 루트기 때문입니다.”
방금 상황을 알아차린 장관 몇 명이 웃음보가 터지는 걸 막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국정원장은 자연스럽게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다.
“개성 코앞이 파주입니다. 파주 문산역에 도착하면 1호선을 타고 안정적으로 월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월남을 하느냔 거에요, 내 말은. 황해도나 서울이나 쑥대밭이지만, 황해도에는 적어도 인민군 잔당이 치안이라도 유지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설마 가정맹어호라고. 사람보다 괴수한테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내려온다는 겁니까?”
“그것이…….”
북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국정원장은 진땀을 흘리며 말을 굉장히 신중하게 골랐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원옥분은 과거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 북한과 아주 끈끈하게 얽힌 정치인이었으니까.
개문 사태 초기, 인민무력상이었던 리용수와 짜고서 김정은이 숨은 벙커를 터뜨리고, 중국이 동부해안 원전 터지게 생겼으니 감지윤을 보내라고 압박하니까 북한 군사정부 시켜서 핵폭탄 갈긴다고 협박하고.
백두혈통과 개성 반란군이 탈북하니까 통째로 북송시키고서 그 대신 핵무기 왕창 받아오고. 심지어 서울 게이트 폭주 당시에 내가 괴수를 전부 북한으로 밀어버린 바람에 개성시가 작살 난 와중에도 원옥분은 북한이랑 친하게 지냈다.
결국, 평양 시민군이 리용수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양판석이 북한을 반쯤 병합하는 데 성공하며 북한은 끝장났지만…….
그때 그 질곡의 시절에 손에 피를 묻혀가며 북한을 컨트롤한 사람이 원옥분이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절대 밝혀지면 안 된다. 심지어 이 자리에 있는 장관들조차도 ‘그 시절’ 일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적다.
국정원장이 북한 상황을 설명하며 진땀을 흘리는 게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원옥분 대통령과 북한이라는 키워드는 현대사의 새로운 다이너마이트다.
건들면 터진다.
“어, 어째서 북측 시민들이 황해도를 탈출해 남으로 내려오는지 말씀드리자면…… 서울-개성 지역이 초토화된 와중에, 평양 민주정부에서 황해도를 컨트롤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 봐도 알겠네요. 인민해방군 잔당이 그대로 깡패 군벌이 되었다 이거지요? 그런데 양판석 정권에서 북한 권역을 행정권에 편입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상황이 그 모양입니까?”
쓸데없는 소리가 나와서 전 정권을 규탄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다.
“그 부분은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제가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서울시장도 엄연히 발언권이 있으니까 말씀해 보세요.”
“그 당시에 정부에서 북한을 완전합병한 게 아니라 행정권에 편입한 이유는, 헌터들의 활동 범위를 태백산맥 전체로 넓혀 마석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북 괴뢰 정권의 공격성을 거세하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정권의 역량은 괴수의 주요 서식지인 태백산맥 지역을 통제하는 데 집중되었고, 평양, 남포, 함흥, 청진, 개성을 비롯한 인구밀집지역은 평양을 통치하는 현지 세력에게 위임했습니다.”
“돈만 보고 접근한 거라 마석만 먹고 나머진 뱉었다?”
네, 라고 했다가 책임을 덮어쓰면 양판석에게 먹칠을 할 수 있다. 나는 난처한 기색으로 웃기만 했다.
원옥분도 날 보고 피식 웃더니 양해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노골적인 말들을 툭툭 뱉었다.
“하긴.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들까지 다 먹여 살려. 지금은 몰라도 그땐 그랬겠지. 나도 지금 북쪽 시민들 먹여 살리려면 눈앞이 캄캄한데…….”
“각하……!”
장관들이 대경실색했지만 원옥분은 쿨하게 씹고 넘어갔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너희 쪽 흑역사는 묻고 넘어가겠다고 공언한 거니까.
“그래서. 이북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경기 북부랑 강북 지하철에 생존자 캠프를 건설했다고요?”
“인천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 좀 특이한 케이스 같은데…….”
대통령이 외교부 장관에게 질문했다.
“해외에 이런 경우가 있나?”
“러시아 지하철은 핵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 역할을 겸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생존자 거주지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개문 사태 초기에 주요 대피로와 물자 수송로로 쓰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내 친구 뤼미에르도 그때 활약했지.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꾹 참았다.
대통령이 거침없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건 정부에서 지하철을 활용한 경우고. 내 말은 지하철에서 생존하는 난민들이 포착된 경우가 있냐는 거야. 시범 케이스가 있어야 우리도 대처하기가 편하잖아. 식량 사정은 어떤지, 의사결정은 어찌하는지, 정치 성향은 어떤지, 인구 부양력은 얼만지…….”
“그것이…….”
“만약 때려잡는다 치면 얼마나 품을 팔아야 하는지, 그 안에 사람이 대충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지하철을 난민촌으로 바꾸면 효용이 어떤지, 지하철이 괴수 상대로 벙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대체 언제부터 거기서 살았는지, 그리고 왜 그 사람들이 지금껏 우리에게 들키지 않았는지.”
대통령이 갑갑해하니 노동부 장관이 용기를 냈다.
“그런 내용이 있는 SF 소설이 있긴 합니다만…….”
문화부 장관이 꼽을 줬다.
“여기서 소설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러나 대통령이 수용했다.
“아니야. 아니야. 미국에선 방역 정책 만드는 데 게임 자료까지 갖다 썼대매. 우리도 정 자료가 없으면 소설이라도 갖다 써야지. 하여튼 국무조정실이랑 국정원에서 최대한 정보를 끌어와 봐요. 이쪽에서 확보한 두 사람도 철저하게 심문하고.”
“예, 각하.”
“일단 지하철 생존자…… 난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쪽에 지도부라는 게 있으면 접촉이라도 해봅시다. 그리고 내가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던 것 같애. 황해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국정원에서 읽을 만한 자료 좀 만들어 와요.”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내일 점심 먹고 읽을 수 있으면 좋겠고. 아, 그리고 한승문 시장. 한 시장도 골칫거리가 늘었겠어요? 서울 개발하는데 강북은 아예 묶인 거 아냐?”
“아닙니다. 아직 강남도 삽을 막 떴습니다. 안전하게 괴수를 소탕하는 중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천천히 합시다. 젊어서 급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여유가 있네. 살날이 많이 남아서 그런가. 보기 좋아.”
원옥분 대통령은 야당에 립서비스 한 번 때려주고 국무회의를 끝냈다. 장관들이 삼삼오오 자리에서 일어나 복귀하던 중, 나는 원옥분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대통령님.”
“뭐야. 왜.”
회의 중에는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주더니 끝나니까 얄짤 없었다.
“독대를 원하는 거면 내일 와. 나 지금 졸려서 제정신 아니야. 심신미약인 상대한테 이빨 까면 형법상 가중처벌이라고. 저리 가.”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피곤에 쩔어 있던 원옥분 대통령의 몸에서 생기가 돋아났다.
젊은 시절 칼부림으로 분명 얼굴의 절반이 마비됐지만, 어쩐지 양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양판석 ‘전’ 대통령이랑 자네가 나한테 못 할 짓을 몇 번 했고. 나도 자네한테 못 할 짓을 조금 하긴 했지만, 우리가 부대낀 세월이 있는데 한 시장이 나한테 ‘청탁’을 한다면 내가 귀는 열어둬야겠지. 한번 말해보세요. 뭔데?”
이게 ‘들어주겠다’는 건지 ‘어디 한 번 지껄여 보라’는 건지 아니면 ‘니가 모처럼 나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는구나, 이 어린 놈의 새끼야’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아쉬운 처지였으므로 공손하게 부탁했다
“여도연 치안관이 잡아 온 그 살인 미수범 말입니다.”
“그 깡패? 왜?”
“그 불한당이 체포 과정에서 제 누님한테 입을 아주 더럽게 놀렸답니다”
“……허.”
원옥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 범죄와의 전쟁, 얼굴 마담으로 내세운 젊은 여성 검사.
원한을 품고 찾아온 깡패의 회칼은 그녀의 한쪽 눈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그녀를 전국구 스타검사로 만들어 정치인의 길로 이끌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대통령은 검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로지른 흉터 사이로 희뿌연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깡패가 싫었어.”
“믿겠습니다.”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