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73화 (273/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73화

EP 43-인과응보(5)

중국은 게이트 사태를 겪으며 국수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한족 고립주의를 표방했다.

대만과 홍콩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심지어 위구르와 티베트의 독립까지 허가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중국조차 내륙 지방을 상실하고 해안가 대도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마당에, 대만이나 티베트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중국은 그 ‘자주국’들에게 일절 식량이나 물자 따위를 지원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끔찍한 기근과 공포를 겪은 국가들은 중국의 발밑에 무릎 꿇고 굴욕적으로 ‘중화연방’에 가입해야 했다.

이 잔혹한 국가 정책을 주도한 건 시진핑이 아니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선양군구 출신의 인민해방군 상장 리충빈이다.

역사 속에는 중화연방 총통 리충빈으로 남을 사람이기도 했다.

* * *

정치에서 일주일은 긴 시간이다.

일주일이면 강산이 열 번도 넘게 바뀐다.

일주일은 유력한 대선주자가 인간쓰레기가 되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충분한 시간이고, 이름 모를 정치인이 선거의 판세를 뒤엎어 공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서기도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외교에서 일주일은 찰나에 가깝다.

정치와는 시간 감각이 다르다. 국가라는 거인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일주일은 눈 한 번 깜빡거리기도 부족한 시간이다.

그러니 두 달이라는 기간은 거인이 한 발자국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 극동군벌의 정상회담까지는 고작 한 발자국 남아 있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생각해봐요.”

국민당 원내대표, 이호정의 흰 얼굴이 죽상을 하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새삼 비장하게 연설했다.

“인류의 위기를 이겨내고 항구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한국, 중국,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 손을 잡고 동북아시아를 괴수 청정지대로 만들겠다. ‘북부 방위선’ 이남의 시민들은 결단코 괴수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다.”

“으음.”

“만주는 이제부터 인류 공동의 강역이며,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농부가 씨를 뿌려 기근을 몰아낼 것이고, 시베리아의 괴수를 소탕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환영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번영을 우리 손으로 이뤄내자.”

“멋지네.”

“그 멋진 선언이 총선 직전에 나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떻게 되긴? 선거 처발리는 거지.”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이호정이 내게 화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밥상 뒤엎으려는 걸 내가 막았기 때문이다.

“야. 호정아. 이거 엎으면 진짜 큰일난다.”

“선거를 지게 생겼는데?”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아. 대통령이 선거 직전에 외교 성과 터뜨리는 거 사실 반칙 아니냐. 근데 우리가 그거 가지고 따져서 뭐 어쩔 건데.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할 거냐?”

애초에 원옥분 대통령이 입을 가볍게 놀린 건 내가 그녀를 방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답이었다.

국민당이 선거에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외교적 성과에 흠집을 낼 수는 없다.

사람을 살리려고 정치를 하는데, 정치 싸움에서 이기려고 사람을 해칠 수는 없잖은가.

이호정도 사람이 좀 정치적이고 승부욕이 강하긴 해도 차근차근 설명하니 납득했다.

“하아. 미치겠네요. 선거 지면 원내대표 사퇴해야 하는데…….”

“원내대표직이 아깝냐?”

“설마 그래서 내가 이러겠어요? 나랑 청중엽이랑 나가리되면 누가 국민당 당권 잡겠냐고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게 내 미래다.

수도권 난민운동권이 국민당 비대위를 장악한 미래가 눈앞에 생생했다.

[재산권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수도권이 무너지기 이전의 재산은 반드시 난민들에게 온전히 환원되어야…]

[한승문 서울시장이 당선되자마자 한 일이 뭡니까! 모든 서울 지역 부동산을 국유화했습니다! 이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일입니까? 한승문 시장은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인입니까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입니까!]

[독재자 원옥분과 국방당 권위주의 정권의 패악을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당원 여러분! 제32차 난민 총궐기에 동참해 주십시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 정치적 이익을 위해 조국을 배반할 순 없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뭐 어쩌겠어.”

이호정이 표독스런 눈으로 나를 째려보다가, 결국 체념했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 *

동북아시아, 어쩌면 세계의 패권에 영향을 줄 대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일상업무는 꼭 해야 하는 게 서울시장의 의무였다.

나는 제주 헌터 아카데미에 방문했다.

한국은 각성제를 생산하는 유일한 국가이고, 외국인에게도 각성제를 주사하긴 하지만 반드시 한국에 입국해 시술을 받는 게 원칙이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해외 각국에서 수천 명의 예비 헌터들이 제주도에 찾아와 각성제를 주사 받고 몇 주의 합동훈련을 거치는데…….

그 발대식에 초대되는 귀빈 목록의 첫 줄에서 내가 빠지는 일은 없었다.

본관 건물부터 시작해서 관련 정부 기관, 심지어 국가들 사이의 친밀감까지. 전부 다 내가 만든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커다란 강당의 귀빈석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아 행사의 권위를 드높이고 참석자들과 소소하게 친목질을 했다.

“서울에 아카데미가 하나 더 생긴다면서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TV에 자주 나오던 재벌 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그가 생각보다 더 늙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꼭 하나만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하하. 그런 기관은 많을수록 좋지요.”

“회장님도 학교 하나 세우실 예정이면 이왕 서울에 지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국민 감정이 재벌이 헌터를 부리는 일에 아주 민감하더군요. PMC도 해산했는데 학교를 짓는다 하면 많이 눈치가 보일 것 같네요.”

귀빈석 옆자리의 재벌 회장은 의미심장하게 싱긋 웃고서 대화를 끝냈다.

이게 국민들 눈치가 보인다는 뜻인지, 원옥분 대통령 눈치가 보인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 눈치가 보인다는 뜻인지 곰곰이 고민하는 사이에, 그 옆에 앉아 있던 천사장이 활기차게 말을 붙였다.

“감지윤 헌터 이번에 우리 식구 됐어요. 알죠?”

“계약서에 도장 찍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골든실드 매니지먼트죠?”

“매니지먼트는 떼고 그냥 골든실드예요. 이제 운전기사도 붙여주고, 일정 관리도 해주고, 괴수 잡을 일 생기면 마석도 우리 회사 서포터가 챙길 거예요. 어때요?”

“흐음. 괜찮네요.”

“그죠? 자기도 우리 회사 서포팅 받아볼래요?”

“에이, 상식적으로 서울시장이 어디 소속되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언제 우리 회사에 소속되라고 했어요? 서울시장 말고 헌터 한승문이 게이트를 돌 일이 있으면 우리 회사 매니저가 깔끔하게 도와주겠다는 거죠. 장비도 빌려주고, 서류도 처리해 주고…….”

“그래도 공직자가 특정 기업을 사적으로 고용해서 부리는 건 조금…….”

“자서전 쓸 때 대필작가 부리는 건 되고, 선거도 정치 컨설턴트 부려먹으면서, 헌팅 나갈 때 서포터 쓰는 건 안 돼요?”

“앞에 두 개는 관행이지만 마지막 일은 관행이 아니잖아요. 원래 첫 번째로 나서는 사람이 두들겨 맞은 다음에 은근슬쩍 관행이 되는 건데 내가 나서서 얻어맞기는 좀 그렇네요.”

“이게 골프장에서 캐디 부르는 거랑 다른 점이 뭐죠……? 정치인들은 참 희한하다니까…….”

“이게 다 깊고 심오한 세계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사소한 신변잡기를 교환하던 우리는 국민의례가 시작되자 엄숙한 표정으로 기립했다.

외국인들이 멀뚱멀뚱 구경하는 동안, 한국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를 바라보며 심장에 손을 올렸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원옥분 정부가 옛날식으로 되돌린 멘트는 미묘하게 어색했지만, 이게 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애국심을 한계까지 쥐어 짜야 하는 시대였으니까.

* * *

원래 헌터 아카데미의 인사들은 내가 방문할 때마다 든든한 후원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원옥분 정권의 사람들이었지만, 어차피 이 비좁은 헌터 업계 인재풀이 거기서 거기다. 다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동종업계에 진출한 대기업을 바라보는 소상공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번 기수 발대식이 끝나자마자 나를 찾아온 수렵연수원장이 애타는 목소리로 읍소했다.

“아이고, 시장님……! 다리는 이제 나으셨습니까?”

“아아. 저번에 병문안 와주신 이후로 처음 뵙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아유! 서울 헌터 아카데미 생긴다는 소식에 지금 교수들 단체로 사표 쓰려는 거 말리고, 벌써부터 학부모들이 전학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데…….! 아유, 미치겠습니다.”

“하하. 그래도 이미 정해진 걸 어떡하겠습니까.”

“에이, 제가 설마 염치도 없게 서울 헌터 아카데미 설립을 취소해 달라……. 뭐 그런 주제 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다만 너른 마음으로 저희들 사정을 좀 헤아려 주십사 하고…….”

“아, 예, 속 시원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저기, 그…… 감지윤 학생은 제주도에서…….”

“허허.”

당연히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만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수렵연수원장을 붙잡아 놓았다.

수렵연수원장의 어깨너머로, 감 기자가 내게 윙크하고 잽싸게 어딘가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내가 탱킹을 하는 동안 서울시 간부들은 제주도 곳곳을 쏘다니며 서울 아카데미 신장개업을 홍보했다.

한국인들을 상대로 홍보한 건 당연히 아니다. 이제 외국에서 찾아온 고위 헌터들은 한승문 서울시장이 서울에 헌터 아카데미를 하나 더 만든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어어, 한 시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늦었지만 시장 당선 축하드리고요. 그런데 서울에 헌터 아카데미를 세우신다고요?”

입질은 금방 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격술사이자, 국경 없는 기사회의 암묵적 2인자인 다니엘 웰링턴이 내게 접촉해 온 것이다.

산업용 고무장갑에 락스타 패션을 고수하는 이 기이한 영국인은 내가 머무는 호텔에 어슬렁어슬렁 찾아와서는 화끈하게 질렀다.

“아! 그냥 제주 헌터 아카데미에 다니는 애들 싹 빼서 서울로 옮기죠, 뭐. 시장님이 우리한테 해주신 게 얼만데……. 한국 내부 정치 이슈입니까? 제주도가 시장님한테 개겼어요?”

“개긴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굳이 학생들을 억지로 서울로 보내지는 말아 주세요. 조만간 서울에도 좋은 학교가 생긴다고 한다. 이렇게만 소식 좀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냥 곧이곧대로 듣겠습니다. 완곡화법 아니죠?”

“예. 소개만 해주세요. 억지로 학생들 옮기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좋습니다!”

북프랑스 카타스트로피 당시 다니엘 웰링턴은 피채원과 협업한 경험이 있었고, 그 덕에 피채원이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적 인맥 중 하나였다.

호텔방에서 내가 대접한 주전부리를 먹던 다니엘은 피채원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며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었다.

“헤이! 피!”

“어…… 으음. 하이.”

“쟤는 영어 듣기는 잘하는데 말하기가 좀 안 되네요. 안 그렇습니까? 한 시장님?”

나는 피채원이 어느 나라 말이든 일단 듣기는 정확하게 할 줄 아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는 않고 그냥 웃었다.

“그나저나 뤼미에르 EU 집행위원장께선 올해는 안 오시는 모양입니다.”

“원래 오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몰도바에서 감염확산이 일어나서요. 상황이 아주 거지 같게 됐습니다.”

“감염이요?”

“감염형 개체 때려잡아도 무식한 놈들이 그 지역 얼쩡거리다가 감염돼서 다시 기어 나오고 그러잖아요. 젊은 애들 몇 명이 위험지역 들어갔다가 감염된 채로 탈출해서 난민촌에 감염을 퍼뜨렸습니다.”

“무슨 좀비 그런 겁니까?”

“아뇨. 몰도바에 출연한 개체는 식물성이라 그냥 사람이 천천히 굳어가다가 버섯이 됩니다. 딱히 위험하지도 않아요. 그냥 버섯이니까. 문제는 포자가 바람 타고 날리면 일이 아주 좆같아 진다는 거죠. 코로나 때랑은 비교가 안 됩니다. 몰도바 감염출현 지역을 네이팜으로 몇 번이나 지졌는데 아직도 감염원을 못 없엤습니다. 그래서 전염병 상대하듯이 지역 전체를 격리했는데…….”

“퍼졌군요.”

“네. 감염된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못 돌려보낸다면 속 편하게 핵폭탄이라도 떨구겠는데, 이게 또 경증 치료제가 나왔거든요? 이크, 어디서 제가 핵폭탄 얘기했다고 말하지 마십쇼. 저번에 말실수했다가 과격분자로 찍혀서 욕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어쨌든 뤼미에르가 그래서 몰도바에 갔군요.”

“예. 민간인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뤼미에르 총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도 감염형 개체가 나온 적이 있지요?”

“제가 직접 잡았습니다.”

“역시.”

다니엘 웰링턴은 씨익 웃으며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사실 별로 안 친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넉살 좋게 주먹을 맞부딪혔다.

* * *

세계 각국의 헌터가 모인 이 시기의 제주도는 다양한 초능력과 다양한 발명품과 다양한 신기술과 다양한 사상으로 넘쳐 났다.

애초에 각국의 헌터 수천 명이 모일 기회가 드물다 보니, 이 기회에 정부기관과 사기업이 끼어들어 국제교류의 장을 만든 것이다.

나는 서울시 간부들을 거느리고 제주 헌터 아카데미 부지를 거닐며 각국 외교단과 헌터 길드가 마련한 부스를 순회했다.

길거리 천막에서 물건 하나를 손에 들고 사람들에게 목청 높여 소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커다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려 박람회장으로 꾸민 기업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영능력자로 유명한 헌터가 사실 싸이코메트리라는 사실은 초상능력이 영능력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또다시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로, 그가 지금껏 보여준 기적은 교황청이 사람들을 위문하기 위해 조작한 자작극으로…….”

“닥쳐라! 이단자! 페데리카는 진짜 성자다!”

“감염형 개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인간이 마력에 오염되어 괴수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력 차단 기술을 잘 이용하면 감염 확산을 억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에 우리 연구소는…….”

“The best choice for hunt! GS 아이기스의 역작인 실드코어가 또다시 혁신을 만들어냈습니다! 전투용 코트에 이식된 방어막은 사용자의 마력에 연동되어, 즉각적인 배리어 기능을 펼칠 수 있도록 개량되었으며…….”

“듀폰은 C타입 포션의 품질개선 특허를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해 무료로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특수부대 훈련을 받고서 총기를 전문적으로 다룬다면 C급 헌터도 A급 헌터를 유의미한 승률로 살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변형계 헌터에 대한 차별을 멈춰주세요!”

“일본 이화학 연구소가 개발했다고 알려진 마석 정제 기술은 사실 우리 중국이 먼저 개발한 것으로…….”

축제와 박람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날 알아보는 외국인 헌터들에게 싸인을 해주기도 하고,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감지윤과 마주쳐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토록 수많은 볼거리와 신기술 속에서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끈 주제는 사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표를 ‘이론’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상에 가까웠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세계 각국의 연구자와 정치가, 그리고 헌터 여러분!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한 미국인 과학자가 연단에 올라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을 만끽했다.

전 세계의 서점을 휩쓴 베스트셀러의 표지에 박힌 바로 그 얼굴이었다.

“우리는 드디어 괴수 출현의 실마리를 밝혀냈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책을 안 사볼 수가 있을까. 나도 한 권 사서 읽어봤다. 내가 보기에 그 책은 종교 경전에 가까웠다.

그 종교의 이름은 ‘과학’이다.

“우주의 특정 공간에는 마나가 분포한 지역이 존재하며, 그곳에서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지난 수백 만년 동안 이를 알지 못했지요.”

“태양계가 우리 은하를 공전하면서 지구는 마력이 존재하는 지대에 진입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의 시작입니다. 게이트가 열린 겁니다.”

“헌터 여러분은 아시겠지만, 마석을 흡수할수록, 마력을 몸에 쌓을수록 우리는 강해집니다. 어쩐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괴수와 말입니다.”

“마나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인류가 이곳에 없었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생물들은 마나를 쌓기 위해 경쟁했을 겁니다. 서로를 잡아먹으며 마력을 쌓으면서 진화했겠지요. 결국 마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잘 쌓을 수 있는 사냥꾼들이 진화를 향한 경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환경에서든 손쉽게 적응하고, 심지어 마력으로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다차원 변이체가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지요.”

“그렇게 우주의 진화론 속에서 살아남은 외계 맹수가 우리가 마주친 괴수의 정체입니다.”

“모든 헌터는 제각각의 초상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괴수는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괴수나 초상능력자나 결국 마력을 몸에 받아들여 변이한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괴수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하지만 저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문명입니다. 우리가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격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하나로 연대합시다! 인류 문명이 하나로 모이고, 피부색과 성별, 종교와 이념을 떠나 진정한 박애와 단결로 뭉쳐 생존경쟁에서 승리합시다!”

이 주장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

그러나 너무나도 듣기 좋은 소리다.

괴수를 미지의 공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진화론적 생물로 끌어 내리고.

결국 모두에게 듣기 좋은 결론을 내면서, 희망적인 결말로 끝난다.

덩달아, 차별과 혐오를 없애고, 괴수에 가깝게 변이한 헌터들을 보듬으며, 미국 중부에 널려 있는 감염형 개체에 당한 시민들을 포용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 과학자의 ‘이론’이 미국에서 등장했고, 미국 주류 언론이 이 과학자를 미묘하게 지원한다는 점에서, 이 연구 자체가 미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가공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즉, 비과학적 존재에게 일상이 무너지며 절망한 과학이라는 종교의 신자, 즉, 21세기 현대인을 위로하기 위한 찬송가인 것이다.

그러니 이건 과학이 아니라 종교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나불거릴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 그냥 입 다물고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나 쳤다.

나중에 피채원 시켜서 SNS에 후기 올리고 해시태그나 달아야겠다. 그럼 CIA가 알아서 모니터링하고서는 ‘한승문은…… 미국에 우호적인 사람……’이라고 메모하겠지.

그렇게 결론 내리고 강당에서 나오던 길.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승문 시장님.”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유창한 중국어로 인사했다.

“……아! 리슈잉 의원 아니십니까?”

리슈잉. 세계초인기구 WPO 최고평의회의 중국 대표 평의원.

그리고 대만과 홍콩의 수많은 반정부 인사를 손수 암살한 중국 국가안전부의 초상능력자 첩보 요원.

그런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는 건, 중국 정부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는 의미였다.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 * *

소파에 앉아 차분히 커피를 마시는 이 여자가 어지간한 연쇄살인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사실은 그 생김새만 보고서는 결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60만 명의 죽음을 어깨에 지고 있고, 한때 리슈잉이 두려워하던 중국의 리충빈 총통과도 대등하게 협상해본 사람이었으니 그녀에게 겁 먹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WPO 평의원 리슈잉은 전직 WPO 평의회 부의장이었던 내게 저자세로 용건을 꺼냈다.

“시간이 급해 체면을 차리지 못하는 점을 용서하십시오. 한승문 시장님께서도 동아 공영을 위해 3국이 최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들으셨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역시 북부방위선 용건인가.

만약 여기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면 살작 망신살이를 할 뻔했다.

“3국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네요. 러시아 극동군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느냐는 사안은 일개 지방 서기인 저로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외교가 가능한 시점부터 한승문 시장께선 일개 지방자치단체장이 아니십니다.”

“그리 평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일이 귀찮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괴수를 북쪽으로 밀어붙이고 만주를 탈환한 다음, 북부에 방위라인을 형성해 인류의 생활권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은 고상한 명분과는 달리 아주 복잡하고 더러운 일이 될 공산이 컸다. 돈과 권력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 중국이 자비롭게 웃으며 만주를 같이 쓰자고 했으니, 이제 내가 니네 체면을 세워 줬으니 뭘 내놓으라고 할지 짐작도 안 갔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 중국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이제는 아예 동맹관계가 되려고 하고 있으니 모스크바 정부에서 핵미사일이나 안 쏘면 다행이겠고.

미국은 ‘인류를 위한 일이니 찬성입니다!’라고 방긋 웃기는 하겠지만, 속으로는 빌어먹을 빨갱이들이 동북아시아를 통째로 처먹으려고 드니 깽판을 치려고 단단히 작정했을 거고.

일본은 왜 우리만 빼놓고 니네만 재미 보냐며 끼워달라고 요청하고, 그게 거절당하는 순간 온갖 방해공작을 서슴지 않을 거고.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라인을 타며, 어느 쪽에도 밉보이지 않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그 와중에 만주에서 빼먹을 이권은 와구와구 빼먹어야 한다.

‘어휴.’

다행히 이건 대통령이 감당할 문제이지 이 힘없는 서울시장 따위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리슈잉이 다음 문장을 입에 담은 순간, 이 문제는 나비처럼 날아와서 내 문제가 되었다.

“정상회담을 서울에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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