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72화
EP 43-인과응보(4)
대외적으로 북한은 이미 대한민국의 행정권역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는 수틀리면 치안 유지를 위해 개입하겠다는 명분에 불과했다.
실제로 한국이 실효 지배하는 북한 지역은 오직 강원도뿐이다.
그리고 강원도를 거점으로 한국은 태백산맥 산줄기를 장악하고서 만주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괴수들의 마석을 캐내고 있다.
이는 북한 시민을 괴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조치이긴 하지만, 거꾸로 말해 마석만 빼가고 북한 시민의 실생활은 딱히 책임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건 마치…….
영국이 인도를 대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 * *
한국이 북한을 다스린다는 건 눈속임일 뿐. 실제로 북한을 다스리는 건 평양 민주화 혁명을 일으킨 <평양 민주정부>였다.
그러나 <평양 민주정부>가 북한을 다스린다는 것조차 눈속임일 뿐. 실제로 평양 정부는 평양 일대를 장악하고 반민주주의자 단속에만 힘 쓰고 있다.
즉, 내부 정리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북한 각지를 다스리는 건 조선인민군 잔당이 모여 만들어진 수많은 군벌들, 그리고 그 군벌들을 느슨하게 통제하는 3개의 거대 세력이다.
신의주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무역로를 장악하고서 반쯤 기업화되어 물류 산업을 독점한 <평안군벌>.
함흥-청진-라선이 가진 공업력을 기반으로 폐허가 된 연변과 러시아 극동군벌의 본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무기를 팔아 치우며, 매달 어마어마한 양의 마약을 생산하는 <함경군벌>.
마지막으로, 한국의 지원을 받아 원산을 통제하며, 강대한 함경군벌로부터 함흥평야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기 위해 서서히 진격하는 <강원군벌>.
여기에 <평양 정부>까지 더해 총 4개의 세력이 합종연횡하며 북한을 나누어 다스린다.
“아사리판이네.”
양판석이 내게 차명으로 ‘무기한 대여’해준 세종시 아파트는 집 내부에 와인바 형태의 거실이 있었다.
그 덕에 여도연은 정말로 바에 온 것처럼 과일 소주를 홀짝이며 옆에 앉은 나를 힐끔거렸다.
“그래.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너 옛날에 할머니 집에 있던 2차 대전 사진집 기억나냐? 우리 어렸을 때 그 책에서 가로등에 매달린 사람 보고 토하고 그랬잖아.”
“설마…….”
“실제로 보면 토악질도 안 나온다. 그냥 가슴 속에 시꺼먼 게 쌓이는 기분이야.”
“아니, 군벌들이 그렇게 막 나간다고?”
“명목상 아동 강간범이나 연쇄살인마를 교수형시켰다고 팻말을 걸어 놓긴 하는데, 그중에 무고한 사람이나 그냥 밉보인 사람, 아니면 정치범이 안 섞여 있다는 보장이 있겠냐?”
제기랄. 아무리 봐도 북한 문제는 내가 건드릴 만한 사이즈가 아니다. 원옥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지금 북한의 상황은, 골치 아픈 문제, 다시 말해 북한 인민의 생활을 군벌들에게 대충 떠넘기고, 한국은 시원하게 마석만 땡겨 오는 형태다.
이는 경제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구조이며, 양판석 정권에서 만들어진 체제다.
자국 농민과 어민의 생활조차 책임지지 못하는데 어떻게 북한 인민들까지 먹여 살릴 수 있을까?
북한이 이렇게 개판이 됐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국 정부가 북한 인민을 버렸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일부분 주도한 일이었다.
“…….”
“…….”
여도연이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지역이 하나 있다.
개성.
서울 게이트 폭주 당시, 나는 서울에서 싸우고 있던 여도연을 구하기 위해 괴수를 전부 북한 쪽으로 몰았다.
그 사건으로 수도권 남부의 난민들은 무사히 대피했고, 수도권 북부의 난민 또한 유현종 사령관의 기적적인 후퇴 기동으로 대피에 성공했지만.
경기도 북부와 개성은 아직까지 폐허로 남아 있다.
“……개성시에는 사람이 사나?”
“……살긴 살지.”
여도연은 담담하게 소주병을 뒤집어 내용물을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무언가를 식히기 위한 행동임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 * *
“아니, 뭐, 군복 입은 깡패들이 기분 나쁘면 사람 쏴 죽이고, 배곯은 난민들이 비실거리면서 돌아다니다가 기회 보이면 사람도 잡아먹고 그러겠지요. 안 봐도 뻔합니다.”
“아니, 그런 끔찍한 말씀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왜요. 제가 눈물이라도 뚝 뚝 흘릴 줄 아셨습니까?”
서울시청 인근의 돼지불백집.
현직 서울시 정무부시장이자 전직 베테랑 종군기자는 너무나도 무게감 없이 개성의 상황을 추측했다. 그의 눈에는 개성시의 상황이 뻔히 보이는 듯했다.
“원래 치안 무너지면 식인은 상수예요. 기근이 없으면 뭐합니까, 밥이 약자들에게 분배가 안 되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산 사람을 잡아먹는 건 가끔만 그렇고, 보통은 가장 먼저 굶어 죽은 사람이 솥에 들어갑니다.”
“아으으……!”
“하하.”
감기자는 심지어 웃으면서 돼지 불고기 볶음(야채 80%)을 먹기까지 했다.
“원래 인간은 100년 전만 해도 이런 게 일상이었어요. 인정합시다. 일단 문제를 명확히 인식해야 해결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 초연한 말투에서 나는 그가 세상에서 온갖 좆같은 동네는 다 돌아다닌 베테랑 종군기자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고견이 있으시다면 듣겠습니다.”
“좋습니다. 시장님께서 오랜만에 바른 일을 하시겠다는데 제가 조언을 아낄 리가 없죠.”
“오랜만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일단 북한 사람들이 우리 동포라는 생각부터 버리십시오.”
감기자가 둥글둥글한 안경을 벗고 헝겊을 꺼내 렌즈를 닦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의 통찰력이 새겨진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저 사람들은 사회주의 독재정권에서 수십 년 동안 생존한 제3세계 극빈층 난민이고, 우리랑은 사고방식이 다른 이질적 계층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만들려면 상상 이상의 복지비용이 장기간 지출될 겁니다.”
“제 상상력이 너무 빈곤해서 감이 잘 안 옵니다만.”
“예산의 규모 문제가 아닙니다. 지역 지도자한테 돈 주면 쌀이 아니라 총을 살 거고, 애들 학교 보내라고 돈을 주면 쌀을 사서 술 빚어 먹거나 도박 비용으로 쓸 거고, 1가구에 일정량 복지비용을 지원하면 옆집 몫까지 받아 가거나 옆집에 쳐들어가 돈을 뺏을 겁니다. 물론 만 원을 주면 천 원이 내려가고, 천 원을 주면 백 원이 내려갈 거고요. 중간에서 다 해먹을 테니까.”
설명에 은근히 감정이 실려 있었다.
경험담 같다.
“……어디서 보셨습니까?”
“본 게 아니라 당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요. 그때 잠깐 미군 일을 도왔거든요.”
점점 감기자의 조언의 신빙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게 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감기자는 흐뭇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국, 가장 돈 덜 들어가는 방식은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현지 지도자를 세우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미국이 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사람 속을 어떻게 압니까? 멀쩡해 보이는 인간도 권력 잡으면 변하고, 외세에 순순히 협조하는 인간은 자기 배 불리고 싶어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외세를 배신하고 자기가 뱀의 머리가 되려는 독사들뿐인데?”
“하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니…….”
* * *
“저는 사람이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아는 거지, 그 사람이 나중에 뭘 할 건지 줄줄 속내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에요.”
“집중하면 어느 정도 되기는 하잖냐.”
“심층 심리를 읽는다고 그 사람의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속 편한 발상 아닐까요.”
“노력이 부족한 거 아니냐?”
“…….”
“생각해 봐. 북한 군벌들을 상대로 ‘코리아 갓 워로드’ 오디션을 여는 네 모습을.”
피채원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왠지 빠직 하고 이마에 핏줄이 올라온 것 같았다.
그건 갑작스런 폭력성을 분출하는 피채원의 모습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어어, 이거 놔라.”
“싫은데요.”
피채원이 내 손목을 꽉 부여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실랑이를 하고 있으니 스멀스멀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은 서울시장 집무실이고, 집무실에는 피채원과 나 단둘뿐이었지만, 고작 몇십 미터 안에 수십 명의 사람이 존재했다.
‘오늘 점심밥 뭐 먹지’, ‘이은비 주무관은 오늘도 예쁘네’, ‘갑자기 테러리스트가 들이닥쳤는데 내가 한승문 시장을 구한다면?’, ‘퇴근하고 싶다’, ‘삼성사이오닉은 무적이고 삼성전자는 신이다’, ‘내가 엑셀을 못 한다는 게 부하들에게 알려지면……’, ‘나는 박 사무관의 머리를 벽돌로 내리쳤다’, ‘통영 출신 장애인 촌놈 밑에서 일하는 내가 불쌍하다’, ‘3분기 안전사고 통계’, ‘초콜릿’, ‘내 할 일만 하자’, ‘성 차관은 재경직이 아닌데……’, ‘지가 말을 똑바로 했어야지 왜 나보고 지랄이람’, ‘아무거나 먹자는 놈들은 울릉도로 유배를 보내야’, ‘어느 날 지구보다 더 큰 게이트가 열리지 않을까’, ‘내가 한승문 친구였다면……’, ‘바지 지퍼 열린 거 말해줘야 하나’, ‘옷이 너무 까끌거려’, ‘홍선아랑 연애하면 무슨 기분일까’, ‘가스관 싹 다 갈아엎어야 하나’, ‘서류로 국민에게 봉사한다’, ‘가렵다’, ‘영어 좀 한다고 더럽게 유세 떠네’…….
“항복! 항복!”
피채원이 그제서야 내 손목을 놓아줬다. 나는 어지럼증을 못 이기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어어…… 으으…….”
“노력이 부족하다고요? 북한 군벌들을 상대로 오디션을 보라고요?”
“미안하다…….”
나는 역지사지의 고충을 겪어 보며 피채원을 이용해 북한에서 그나마 깔끔한 군벌을 찾아 협력 파트너로 삼는다는 계획을 접었다.
하긴, 북한 군벌쯤 되면 얼마나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을까?
* * *
“그놈들 아무 생각 없어.”
“그게 말이 됩니까?”
“당연히 말이 되지. 머리 좀 굴러간다 싶은 놈들은 전부 리용수한테 죽었으니까.”
양판석은 ‘아니면 나한테 죽거나’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자체적으로 머릿속에서 그 내용을 삭제했다.
단출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전직 대통령은 자기 집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내게 죽음과 차선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원옥분 대통령과도 했던 이야기야. 그때는 권한대행이었지. 내가 막 대통령 선거 출마했을 때니까.”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데요?”
“원옥분 대통령 권한대행은 자기 임기 동안 160만 명을 죽였네. 대략.”
“…….”
여기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양판석은 여상스레 셈을 헤아렸다.
“어디 보자, 오래 되어가지고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중에 자네가 괴수들 북으로 올려보내서 죽은 사람이 대강 60만인가 70만인가 그 정도 될 거야.”
“62만 명입니다. 개성이랑 황해도 합쳐서요.”
“자세한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원옥분 대통령도 그 60만 명이 자기 손에 죽었다고 인정을 했단 말이야.”
“제가 괴수를 북쪽으로 올려보냈는데요?”
“그걸 승인한 사람이 원옥분 권한대행이잖아.”
양판석은 지금 내게 60만 명의 죽음에 매몰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 죄책감을 해소하겠다는 이유로 북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도 내포하고 있었고.
양판석은 어떤 피 씨 소녀처럼 남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 따위는 없었지만, 그는 내 입꼬리만 보고서도 내가 지금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본격적인 설득에 나섰다.
“자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지금 북한은 군벌들이 난립해서 무슨 삼국지나 춘추전국시대를 찍고 있는 난세가 아니야.”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무언가를 상상했다.
그건 아마, 그가 한때 만들었던 북한 지방의 신-질서였을 터이다.
“북한 지방에 공급된 자원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어. 이북 지역에 어떤 위협이 될 만한 총기나 탱크, 그리고 기름은 없네. 지금 북한에서 군벌이랍시고 설치는 작자들은 사실상 조폭보다 조금 더 체계적인 깡패 수준이야.”
“총이 있지 않습니까.”
“갱들이 총 들었다고 미국 정부가 그들을 반란군 취급하던가?”
“군벌들이 자체적으로 무기 공장을 돌리고 있는데요.”
“외국에 팔아서 밥벌이하는 거고, 설사 무기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군사위성과 공군이 있는 나라가 알보병에 위협을 받겠나? 그리고 국정원은 그동안 손가락 빨고 있어?”
“CIA도 종종 뻘짓을 하는데 국정원은 안 할까요?”
“소모적인 논쟁은 관두지.”
양판석은 카리스마 있는 손짓으로 내 말을 끊었다.
그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왠지 내 눈에는 오랜만에 정치 행위다운 정치 행위를 하니 약간 기분이 들떠 보였다.
“자네가 만약 군벌들의 준동을 염려해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네. 군벌이 자기 편의를 봐주는 남한 정부에 척질 이유가 없고, 군벌이 기어오르더라도 손쉽게 즈려밟을 수 있는 데다, 애초에 군벌이라기도 하기 뭐한 깡패들이야.”
“흐음…….”
“반대로, 자네가 만약 북한 인민들의 생활이 걱정되어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네. 이건 자네 혼자 힘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달려들어야 해결되는 일이고, 이미 그러고 있네.”
“정말입니까?!”
* * *
“그래.”
현직 대통령이 확답했다.
원옥분은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며 내게 공언했다.
“핵심은 식량이야. 쌀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게 해결돼. 특히 북한 사람들이 자영농으로 기능한다면 더더욱 좋고.”
“지금 그 계획이 진행되는 중입니까?”
“오랜 노력이 싹을 틔우기 직전이지. 한 시장 자네만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무표정으로 원옥분 대통령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으니, 각하께서 내 순수한 진심을 알아줬는지 살짝 움찔거리며 순순히 털어놓았다.
“몬…… 스터랜드인가? 괴수가 적응하면…….”
“괴수가 해당 지역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며 번식한 끝에,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인류보다 괴수가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지역을 몬스터랜드라고 합니다. 학계 이슈가 너무 확확 바뀌어서 논문 갱신될 때마다 뜻이 매번 조금씩 바뀌긴 합니다만.”
“어쨌든 북한이 몬스터랜드가 되는 순간 우리도 위험하단 말이야. 그러니 지금처럼 만주에서 내려오는 괴수들을 태백산맥에서 요격하는 방식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결론이 나왔네.”
“어디서요?”
“한국, 중국, 미국,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군벌.”
원옥분 대통령이 또 외교적으로 무언가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으니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만주는 지금 국경이 의미가 없어졌어. 함경군벌이 제멋대로 올라가서 설치고, 블라디보스토크 군벌도 자기네 땅처럼 돌아다니고 있지. 그 와중에 중국인 민병대가 온갖 사고를 치고 있고. 심지어 최근에 몽골 난민들도 유입되었다고 하더군.”
“무정부지대입니까?”
“아니. 화약고야. 중국인 민병대가 북한 사람을 잡아 죽이거나,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 통제에 실패한 약탈자들이 중국인 마을을 털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외교적 긴장감이 올라가겠죠.”
“그렇지.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덮었어. 그런데 슬슬 초상능력자들이 강해지고, 괴수들 상대하는 요령도 생기니까 만주에서 터지는 사고의 스케일도 점점 커지고 있다고.”
여기서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대규모 군사행동으로 만주에 방위라인을 형성할 거야. 중국에서는 벌써 이름도 붙였어. <북부 방위선>이라고.”
“맙소사……. 어디까지 밀어붙일 계획이십니까?”
“그건 상황 봐서 정할 예정인데, 아무튼 중국은 선양을 탈환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은 하바롭스크를 지키고 싶어하니까, 그 치들이 알아서 하라 그러라고 했지. 사실 우리는 방위선이 어디 그어지든 상관없잖나. 이미 안전하니까.”
중국이 옛 청나라처럼 만주를 신성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중국을 이끄는 건 리충빈 전 총통이 이끌던 선양군구 출신의 군인들이다.
그러니 ‘선양’이라는 도시가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리충빈의 뒤를 이어 새롭게 중국의 지도자가 된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지. 성지를 탈환하는 거니까.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에게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극동군구의 본거지는 원래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훨씬 북쪽에 있는 하바롭스크다.
그리고 하바롭스크는 현재, 러시아 극동군벌의 최전선 기지이기도 하다. 만일 북부 방위선이 형성된다면 러시아 극동군벌은 드디어 멸망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리라.
“……우리는 뭘 받기로 했죠?”
“내가 한 시장한테 그런 거 일일이 말해야 하는 사람인가?”
“딱 봐도 모스크바에서 핵미사일 쏘겠다고 난리 칠 사안인데, 제가 알고는 있어야 유럽 옆구리 찔러서 돕지 않겠습니까?”
원옥분 대통령은 이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게 술술 불기 시작했다.
“북한이 완벽하게 안전해지지. 괴수에게 물려갈 걱정이 없어지니 군벌이 치안 지킨다고 설칠 이유도 사라지고.”
“그러면 그놈들이 최후의 저항을 하지 않겠습니까?”
“만주는 이제부터 일종의 국제자유무역지구야. 북한 실업자들이 올라가서 비료 뿌리고 농사 짓는 동안, 누가 그들을 지켜주겠나? 신흥 PMC가 많이 필요해질 텐데.”
“거, 참, 중국이 자기 영토를 잘도 내줬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논의가 지지부진하긴 했는데, 근래에 해양괴수 떄문에 베이징 박살나고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이 치고 올라오니까 북쪽이라도 단도리를 해야 맘이 편한 모양이지.”
“으음.”
미국이 동남아에서 치고 올라올 이유를 원옥분이 제공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100점 만점에 100점짜리 외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시 믿음과 신뢰의 원옥분 대통령이다. 만주 자유무역지대와 시베리아에서 마석을 쓸어담을 한국 헌터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저절로 흐뭇해진다.
“저는 원래 각하를 믿고 있었습니다.”
“…….”
원옥분 대통령은 눈으로도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움찔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1급 기밀인 것 같은데 언제쯤 공개될런지요?”
“다다음달에 정상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네.”
“그렇군…… 요……?”
아니, 잠깐.
다다음달이면…….
“……혹시 총선 선거일 직전에 기습적으로 외교적 성과를 터뜨린다거나 그런 진부한 언론 플레이는 안 하시겠지요?”
“뭐 어쩌겠나. 중국이랑 러시아 극동군벌이 그때밖에 시간이 안 난다는데.”
“아니 이건 명백한 청와대의 선거개입……!”
“이만 오찬 일정이 있으니 썩 꺼지게.”
원옥분 대통령은 아주 오랜만에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얼굴 반쪽이 마비되었으니 당연하게도 삐뚜름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