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49화
EP 38-불꽃이 튀기는 국정감사(4)
불꽃 같은 국정감사 전반전이 끝나자 피채원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요.”
“내가 보기에는 뉴스에도 안 나간다.”
영양가 없는 싸움이었다. 뉴스 끝나고 나오는 짤막한 개그영상이면 모를까, 방금 싸움은 방송에 나갈 만한 건수가 아니었다.
이 정도까지 털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재벌이 거론된 이상 뉴스에서 진지하게 다룰 일은 없다.
“다들, 몇 시간 있다가 국정감사 후반전 해야 하는데 식사나 하러 가실까요?”
“예약해둔 한정식집이 있습니다.”
“갑시다.”
* * *
나는 서울시 간부들과 함께 행안위 국정감사장을 나서며 생각을 정리했다.
첫 번째 원칙. 국회에 바보는 없다.
아마 광진구 수렵사업권을 트집 잡은 국회의원도 이게 뉴스에 나가지 않을 사건이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까지 털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서울시장이 자기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 거면 모를까, 그냥 편법적으로 3대 길드 중 하나의 편의를 봐준 건 제대로 된 치명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주요 타깃이 내가 아니라 GS 그룹이라면 어떨까?
내 지지율은 꼼짝도 안 할 테지만, GS 방위대행사 주가는 살짝 출렁거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출렁거림을 시작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증발할 수도 있는 게 주식시장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모든 게 들어맞는다.
물론 총선을 앞두고 내 도덕성을 흠집 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아마 누군가 GS 그룹을 찌르라고 국회의원에게 사주했다고 본다.
나는 정무부시장에게 속삭였다.
“아까……. 김혜민 의원이었죠?”
“예.”
“김혜민 의원실 후원 목록 확인해보세요. 대기업 대관담당자 위주로. 특히 건설사.”
요즘 마석재벌하고 토건재벌하고 사이가 그렇게 나쁘다지? 토건재벌은 서울 게이트 닫고 아파트 지으려고 하는데, 마석재벌이 게이트 닫으면 경제 망한다고 난리를 치는 중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마 오늘 사건은 재벌들 사이에서 오가는 가벼운 견제구 정도 될 것이었다. 주가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제기랄. 내 주요 지지층인 헌터들은 마석재벌 밑에서 일하는데, 서울시장으로서는 토건재벌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
고래 싸움 사이에 낀 나만 곤란하게 됐다.
“시장님, 국회 오랜만에 왔네요.”
“이 원내?”
국감장을 나와 한정식집에 가려니 입구에서 이호정 국민당 원내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복바지 주머니에서 목캔디를 꺼내 내게 건넸다. 마침 목이 아팠는데 적절한 배려였다.
“행안위는 분위기 어땠어요?”
“쏘쏘했지. 간사들끼리 사이가 안 좋으시던데.”
“옛날엔 친했는데 좀 틀어졌죠. 그래도 서로 증오하는 것까진 아녜요.”
나는 피채원과 감 기자, 그리고 서울시 간부들을 식당으로 먼저 보내고, 사람 없는 소회의실에 들어가 이호정과 대화를 이어갔다.
서울시장과 원내대표이기 이전에, 친구였기 때문에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다.
“총선 준비는 잘 돼가?”
“여기서 말할 일은 아니네요. 그나저나 헌터협회장 바뀐다면서요?”
“선아 짤렸대.”
“나야 홍선아 씨랑 친분이 깊지는 않지만 나름 오래 보긴 했죠. 출마할 생각 있으면 오라고 전해줄래요?”
“걔는 죽어도 정치 안 해.”
“아깝네. 전쟁영웅은 아주 드문 캐릭터인데. 어쨌든 헌터협회장 자리 비었으니까, 집에서 놀고 있는 우리 남편 옆구리 찔러서 보내려고 하는데 어때요?”
“일호?”
이호정의 남편인 양일호도 당연히 내 친구였기 때문에 그놈 깜냥을 아주 잘 알았다.
사실, 아무리 헌터협회장을 선거로 뽑는다지만, 국방당에서 미리 준비한 차기 헌터협회장 내정자가 있을 것이다.
아마 진작에 출마 준비를 끝마치고 경주견들 사이의 치타처럼 웃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양일호는 벤츠다.
“제2대 초상관리부 장관까지 했는데 이대로 은퇴하기는 조금 아깝지. 내가 조만간 불러서 술 좀 맥이면서 나쁜 경찰 역할 할 테니까, 니가 집에서 잘 녹여서 출마시켜.”
“사실 그게 내가 부탁하려던 거에요.”
우리는 동시에 낄낄거리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양일호를 낚을 생각만 해도 벌써 즐겁다.
일하기 싫다고 도망친 노비를 잡아 오는 건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
“야. 너는 니 남편이 정치 너무 힘들어서 가정주부 하겠다는데 그걸 다시 집 밖으로 보내고 싶냐?”
“오빠가 나보다 걔를 더 잘 알아요? 내가 봤을 때, 우리 자기도 슬슬 좀이 쑤시는 것 같애. 본인이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멘탈이 약해서 은퇴했던 거잖아. 푹 쉬었으면 다시 일하러 가야죠, 뭐.”
“그래도 국회의원 출마하라고 윽박지르지는 않고, 적당히 쉬면서 할 수 있는 헌터협회장 내보내는 것 보니까 니가 일호를 찐으로 사랑하긴 하나 보다.”
“남의 결혼생활에 신경 끄시죠.”
이호정은 피식 웃고서는 소회의실에서 나가며 제안했다.
“서울시 간부들은 한정식집에서 먹으라고 하고, 우리는 국회 구내식당에서 한 끼 할까요? 친분 과시 좀 하게.”
“너 한승문 가방모찌처럼 보이기 싫다고 카메라 앞에서 나랑 거리 뒀잖아.”
“그건 막 당선되고 낙하산 소리 듣던 시절 이야기지. 정작 한승문은 국회에 관심도 없는데 억울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동지들은 의원 대접도 안 해주고, 못된 초상관리부 장관은 법안이나 빨리 통과시키라고 보채고…….”
“그래. 니가 고생 많이 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고?”
“아직도 나 싫어하는 사람들은 한승문 꼭두각시라고 비꼬긴 하는데, 지들도 이제 속으로는 알겠지. 아! 만만찮은 년이다.”
“하하.”
이호정과 구내식당으로 가던 길. 코너를 돌자마자 익숙한 얼굴과 부딪힐 뻔했다.
“오! 한승문 시장님! 국감 받으러 오셨군요! 이거 오랜만입니다! 하핫!”
“청중엽 지사님? 아니지, 이제는 대표님이셨죠? 이야, 잘 지내셨지요?”
전직 제주도지사, 현직 국회의원, 그리고 동시에 국민당 당대표인 청중엽이었다.
그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미중년이었고, 적어도 그 얼굴만큼은 정치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정치력이 있냐? ‘청’씨의 근본은 중국이고 본인 할아버지도 중국인이었는데 ‘제가 제 조부님을 호적에서 파야 되겠냐’는 눈물의 기자회견으로 회피기동에 성공할 정도는 된다. 할아버지가 삼합회였다는 건 비밀이다.
원래는 중국 꽌시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장악하고 있던 지방 토호 스타일의 정치인이었지만, 개문開門 사태 이후 제주도가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재벌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해내면서 중앙정계 진출에 성공. 결국 국민당 당대표까지 해먹고 있다.
나한테는 항상 저자세로 일관하며 대접해주지만, 이해관계가 너무 달라서 살짝 어색한 사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10년 만에 재회한 이산가족처럼 포옹했다.
“우리 청중엽 대표님,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한 시장님은 많이 마르셨네요. 건강 챙기시면서 일하셔야죠. 앞으로도 오랫동안 공무에 헌신하셔야 하는데. 하하!”
“행정 경험이 부족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청중엽 대표님은 제주도를 오랫동안 순탄하게 이끌어 오셨으니까. 제가 조언을 구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하핫! 제가 조언을 해도 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장님이 그렇게 띄워 주시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인사만 해도 숨이 턱 턱 막힌다. 저쪽도 비슷한 심정일 거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나하고 어색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청중엽 대표. 이호정하고는 완전히 상극이었으니까.
“대표님.”
“어어, 이 원내.”
이호정은 죽어도 ‘대표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안 하고. 청중엽은 죽어도 ‘이 원내, 별일 없어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서로 친한 사이인 것처럼 짧게 고개만 까딱거린다. 일일이 인사를 안 해도 되는 사이인 것처럼 위장하면서 말이다.
내가 피채원은 아니지만, 동물적인 본능으로 두 사람의 속마음은 읽을 수 있다.
청중엽은 이호정을 ‘한승문 명함 팔아 거물 행세하는 진보당 보좌관 출신 빨갱이’로 볼 것이고,
이호정은 청중엽을 ‘재벌 뒤 닦아 주면서 줏대 없이 정치하는 면상만 반반한 로비스트’로 볼 것이다.
이거는 이념적인 차이라 어쩔 수 없다…….
나는 예의상의 질문으로 청중엽을 빨리 보내려고 했다.
“이호정 원내대표랑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가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 아쉽지만 일정이 급해서 식사를 빨리 해치워야 해서요. 두 분이 여유 있게 드시죠. 대신 나중에 제주도에 오시면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하핫!”
나는 대접하겠지만, 이호정이랑은 겸상하기 싫다 이거지. 이호정은 방긋 웃으며 화답했다.
“저희가 대표님을 붙잡고 있었네요.”
빨리 꺼지라는 뜻이다.
“그래요, 이만 가볼게요. 시장님 잘 모시고 있어요.”
그래도 이호정이 당내 서열 2위인 원내대표인데 ‘잘 모시고 있으라’니. 아예 보좌관 취급을 하는군. 살벌해 죽겠다.
청중엽은 마지막으로 나한테 싱긋 웃고서 자기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 떠나갔다. 나는 이호정 한 명만 팬다는 뜻일까? 잘 모르겠다.
이호정은 아까 인사하던 표정 그대로 싱글벙글 눈웃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씹새끼가…….”
아 몰라.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 * *
이호정은 진보당 보좌관 출신으로, 본인은 늘 중도좌파를 표방하지만 내가 봤을 땐 좌파다. 이건 남편인 양일호도 몰래 인정했다.
물론 이 친구가 진보당에 취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가 없어서였겠지만, 본인한테 레프트 성향이 없었으면 애초에 그쪽에는 꼬박꼬박 이력서도 안 넣었겠지.
그 외에도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자라 성장환경이 아주 암울했고, 가족도 남보다 못했다. 서울에서 탈출할 때 망설임 없이 버릴 정도로.
옛날에 술자리에서 가정사를 살짝 들은 적이 있는데 우울증 걸릴 뻔했다.
어쨌든.
이호정 원내대표와 청중엽 당대표는 화학적으로 결합할 수 없는 성분의 사람들이었지만, 의외로 그들의 동맹은 롱런하는 중이었다.
공공의 적인 수도권 난민운동계 인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축출된 국민당 비대위원장 신수광이 남기고 간 수도권 난민캠프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아마추어지만, 강성 지지자들이 수백만 명이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당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편이다.
심지어 화해와 타협도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나와 청중엽이 손잡고 신수광을 토사구팽했을 때, 난민캠프 인사들이 공천학살 당했다가 항복 선언하고 간신히 복귀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당 지도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주도가 기반인 청중엽과 내 정치적 자산을 빌려서 정치하는 이호정이 손을 잡아야만 안정적으로 당권을 유지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충청도 민심을 유지하려면 난민캠프 인사들을 (또) 공천학살할 수도 없으니, 두 사람의 불안한 동업은 몇 년 더 이어질 전망이었다.
물론 내가 옛날부터 국회에 직접 관여했다면 국민당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만든 당이니까!
하지만 거의 독재에 가까운 수준으로 헌터 사회를 장악한 마당에, 국민당까지 손에 쥐고 국회의 절반을 휘둘렀다면, 독재를 혐오하는 386 민주투사 양판석 대통령에게 수술당했을 거라는 미래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국회로 데리고 온 상이헌터 출신 국회의원들은 물론이고, 한승문 바라기 정치 지망생들까지 전부 이호정에게 떠넘기고 국민당에서 아예 손을 떼어버렸다.
이호정이 가끔 술 먹고 나한테 전화해서 성질부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내 밑에서 꿀 빨 줄 알았는데, 졸지에 자기가 직접 파벌을 이끌어야 했으니까. 그것도 혼자서.
어쨌든 그것도 옛말이고, 이호정은 어엿한 국민당의 원내대표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원내대표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커다란 가죽 의자에 비하면 덩치는 작지만, 의자에 피곤하게 늘어진 모습이 참 어울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지.
“이번 총선 조지게 생겼어요.”
“뭐?!”
이호정의 한 마디에 잡생각이 싹 날아갔다.
“이번 총선을 왜?”
“국민사랑연구소. 아니지, 국민평화연구소인가? 하여튼 제주도에서 빌린 돈으로 만든 싱크탱크에서 연구 결과가 나왔거든요?”
이호정은 원내대표실 서랍에서 대외비 문서를 꺼내 보여줬다. 나는 다급한 심정으로 서류뭉치에 얼굴을 처박았다.
“나는 경상도랑 전라도는 국방당에서 먹고. 충청, 강원, 제주는 우리가 먹을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는 그랬다. 전라도는 민주당, 경상도는 공화당 찍는 건 수십 년간 쌓인 습관이니까. 둘이 합쳐 만든 게 국방당이니 거기는 주고 시작해야 한다.
국민당이 가진 지역은 수도권 난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충청도,
헌터 산업 없으면 파산하는 강원도,
그리고 청중엽의 기반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동네인 제주도였다.
즉, 게이트 사태 이후로 인생이 심하게 바뀐 사람들이 국민당을 찍는다고 보면 된다. 헌터 산업이나 마석 산업에 종사하거나,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거나…….
물론 그래봤자 숫자가 적어서, 국방당이 3분의 2에서 조금 부족하게 의석을 가져간다.
창당 무렵엔 국민당이 국방당과 거의 대등했다. 하지만 양판석 정부는 법률적으론 사실상 연립정권이었고, 그동안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국민당의 세력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래도 국민당은 제1야당이었다. 이제는 그 위치마저도 위태로워졌지만.
“충청도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왜?”
“유재경 전 총리, 정확하게 말하면 세종정부청사가 너무 커졌어요.”
개문 사태 직후, 대한민국이 서울을 상실한 순간부터 세종시가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줄초상이 난 상황.
그 와중에 행정부의 모든 기능과 공무원을 (매년 자기가 손수 조지면서) 야매로나마 파악하고 있던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이 상황을 수습했다.
그는 결국 기재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국방당 국회의원 신분으로 서울시장 선거까지 출마했다.
그게 바로 유재경이다.
비록 국회의원 배지는 서울시장 출마하면서 떼어 버렸고, 정작 본인이 노리던 서울시장 자리는 ‘유재경이 서울시장 달면 상황이 졸라 빡세게 굴러갈 것’이라고 직감한 토건 재벌들에게 저격당해 언론에 두들겨 맞으면서 내게 후보직을 넘겼지만…….
그는 아직 국방당 최고위원 신분으로 정계에 남아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세종시 인구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건 그렇다 쳐요. 진짜 문제는 신수광을 잃어버린 난민들이 유재경을 뽑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경제 전문가니까.”
“저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호정이 참다 참다 결국 폭발했다.
“아! 저번에 오빠가 신수광 수술할 때 유재경 스타 만들었잖아-!”
“아니……. 내가 스타를 만든 게 아니고 본인이 잘하신 거지. 문제는 경제다. 그리고 경제는 유재경이다. 이게 보통 정치 감각으로 나올 멘트냐?”
대체 유재경이 어쩌다가 이렇게 거물이 됐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유재경을 로켓에 묶어 화성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그간 이래저래 엮이면서 정이 들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이 하나의 기계라면 유재경은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체할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천재적인 행정가이고 경제 전문가지만, 대한민국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그 정도 천재는 찾으면 나온다.
인품이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지나친 보신주의자고, 또 은근히 의전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부하들에게 갑질을 한다.
심각한 건 아닌데, 자동차 문 열어주는 거나 우산 씌워주는 것에 소홀하면 조용히 보좌 직원이 바뀌더라. 자기 가족들한테는 참 잘하면서 왜 그럴까…….
하지만 유재경은 귀족이었다.
그는 콧대 높은 테크노크라트의 충성을 받으며, 똘똘 뭉친 모피아들의 성골이자, 세종시 공무원들의 우두머리이고 자존심이었다.
그걸 다 무시하고 유재경을 건드리면 공무원 사회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가 지금껏 억제하고 있던 제주도의 재벌들이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니는 건 덤이다.
“그러니까, 유재경을 막아야 하는데 유재경을 못 때리는 거 아니야.”
“그래서 골 때린다니까요.”
이호정이 만약 흡연자였다면 지금쯤 담배를 꺼냈을 것이다. 그녀는 대신 목캔디를 입에 넣고 으적거렸다.
“생각 좀 해봐요. 유재경 총리를 국민당에 끌어들이는 방법은 가능할 것 같아요? 원옥분 대통령이랑 사이 나쁘잖아. 옛날에 양판석 지지하면서 통수도 쳤고.”
“어쨌건 둘이 겉으로는 화해했고, 유재경을 따라다니는 국회의원들이 전부 경상도라 유재경은 원옥분 옆에서 못 떠나. 그걸 아니까 대통령이 유재경을 놔두는 거지. 아마 차기 대통령쯤으로 생각하고 있을걸? 사이는 나빠도 능력은 인정하니까…….”
네거티브가 봉인된 이상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만한 것들은 이호정도 떠올릴 수 있다. 변수를 찾아야 한다…….
“양정석이가 동북아시아 카타스트로피 폭로하고 깽판 친 거 때문에 양판석계 의원들은 못 데려오지?”
“국방당 탈당할 사람들은 그때 다 나갔잖아요. 우리는 안 받아줬고.”
“나랏일이 우선이라 그랬긴 한데, 지금 생각하니까 좀 아쉽네.”
국방당을 호남만 떼서 갈라치기할 수도 없다. 현직 대통령인 원옥분이 옛날에 대선 발리고 전북지사로 출마해서 지역주의를 타파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새만금 간척사업 마무리하고 신도시까지 지었다. 수도권 난민 중에 여유 있는 사람들은 싹 다 거기로 들어갔다. 전라도 경제도 살린 셈이다.
“그냥 이번 선거는 버릴까?”
“이번 총선 버리면 지도부 총사퇴하고 난민운동권이 키 잡을 건데요?”
“그럼 온종일 데모만 하겠지. 서울시에 있는 재산 전부 환원시켜달라고 깽판도 치고.”
수도권 난민캠프의 염원대로 그들의 옛날 재산을 그대로 복구시켜줄 수는 없다.
수백만 명의 과거 재산을 일일이 증명할 수도 없고, 나라에 돈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관료들부터가 그러면 ‘진짜로’ 나라 망한다고 드러누울 거다. 그러니 별수 있나. 주공아파트 졸라 지어서 뿌려야지…….
그리고 그 주공아파트를 짓기 위해 이미 서울시의 모든 부동산을 빨갱이 소리 들어가면서 국유화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국민당을 악에 받친 난민운동권이 장악한다?
그 새끼들은 서울시 재산 복원이 불가능한 걸 알면서 집권을 위해 지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미래는 막아야 해…….”
“나도 청중엽 대표랑 의논하는 중인데. 오빠는 뭐 깔쌈한 아이디어 없어요?”
“원옥분 대통령하고 딜을 쳐서 이적료를 주고 유재경을 영입하는 건?”
“난민운동권이 집권하면 한승문이 좆되지 대통령이 좆되는 건 아닌데요? 대통령이 검찰이잖아. 난민운동권도 상황 보면서 개기겠지. 그러면 VIP는 손 안 쓰고 한승문을 조지는 건데 그걸 포기할까? 오빠가 진짜로 난민캠프 반발 못 이겨서 서울 말아먹을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나도 알아, 인마.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국민당 원내대표실에서 쑥덕거리고 있으니까 슬슬 국정감사가 재개될 시간이었다.
“나 가봐야겠다. 나중에 얘기하자.”
“같이 나가요. 나도 슬슬 시작이니까.”
“너 어딘데?”
“법사위요.”
“가장 빡센 데 갔네…….”
“그래도 맨날 싸워대니까 전투 감각 잃어버릴 일은 없어요,”
이호정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원내대표실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건드리지도 않은 문짝이 벌컥 열렸다. 정신 없이 생긴 인간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원내대표님! 어라? 시장님도 계셨- 앗! 안녕하십니까! 원내대표 비서실장 서귀포 정, 정찬심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귀포시에 정 선거구까지 생겼어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이호정이 까칠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 원내대표님! 지금 법사위에서 사건이 났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싸움이 난 거겠지. 이호정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봤어요? 내가 이러고 삽니다.”
“나도 같이 갈까?”
“왜요?”
“올바른 국회 문화에 이바지하려고.”
“싸움 구경하고 싶으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