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9 - 헌터들의 세상 (4)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리. 러시아 연방군 극동 사령부의 총책임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의원님.”
러시아를 양분하는 동부군벌의 지도자는 그 이름값에 걸맞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근육질 몸매. 거기에 군복까지 걸치고 있었으니 저절로 주눅이 든다.
하지만 주눅드는 것은 주눅드는 것이었고, 받아내야 할 것은 받아내야 할 것이었다. 나는 그의 불곰같은 손바닥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WPO의 한승문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움찔. 빅토르 리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받은 대우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환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는 민망하게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오래 기다리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사죄의 의미로 한 잔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 * *
하바롭스크 호텔 지하의 칵테일 바는 하바롭스크의 유일한 고급 술집이었다. 여기서 ‘고급’이라 함은 옛날 세상보다 질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애초에 하바롭스크에서 제대로 운영하는 호텔이라고는 이곳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호텔들은 모두 피난민들을 위해 개조되었다. 러시아 동부, 중앙아시아, 심지어는 중국 북부에서 온 수천만 명을 위해서 말이다.
현실이 그러했다. 누군가는 그들을 무시무시한 동부군벌이라고 칭하겠지만,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배를 곯는 수천만 피난민들과, 이제는 기름도 다 떨어진 탱크, 그리고 핵무기였다.
그런 와중에 찾아온 남쪽의 정치가는 일종의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WPO의 실권자. 오스트레일리아의 구원자.
그와의 협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어쩌면 동부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동부의 사령관이 미친 것 같았다.
적어도 나타샤 프리마코프가 보기에는 그랬다.
“사령관님. 미쳤어요?”
“……크흠.”
“이거 어쩔 거예요. 진짜……!”
그 귀한 손님들을 3일 동안 기다리게 한 것은 그렇다 치자. 전투가 워낙 급박했으니까. 사령관이 전장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애초에 빅토르 리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병사들을 내팽개치는 사람이었다면, 나타샤 본인부터가 그의 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무적인 관계에서도 초면에 술집은 안 가는데, 외교적인 관계에서 술집을 와요? 저 사람들이 러시아 사람은 아니잖아요!”
“……걱정 말게. 원래 술 싫어하는 남자는 없네. 싫어하면 남자가 아니지. 표정은 저래도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을 거야.”
“저게요?”
밀담을 나누던 나타샤와 빅토르가 한승문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무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며 뭐라 뭐라 쑥덕이고 있었다.
[채원이. 뭐 먹을래?]
[숭늉 있나요.]
[있겠냐?]
한국말이라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에 빅토르가 난감한 기색으로 핑계를 댔다.
“아니, 게다가 호텔방이 너무 추웠잖나. 여기는 벽난로가 있으니까. 그나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
“말씀 잘하셨네요. 의전 담당자가 누구랍니까? 누가 외교 사절들을 난방도 안 되는 방에다가 박아 놨대요? 대체 어떤 새-”
“난방이 끊겼대…….”
“…….”
“작년 겨울은 어찌저찌 버텼는데, 올해는 아예 시설이 맛이 간 모양이야. 하필 중국에서 식량 가격을 올린 바람에 수리도 못하고 버티다가 결국…….”
귀빈들을 모시기 위한 호텔마저도 난방이 끊겼으니, 하물며 피난민 거주지의 사정은 뻔했다. 이번 겨울은 유독 차가울 것이었다.
빅토르의 건장한 어깨가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지갑이 빈 가장은 허리를 펼 수 없는 법이다. 나타샤가 숙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제가 어떻게든 해보죠.”
“거, 전화번호라도 어떻게든 따 보게. 러시아 자주 놀러 와서 밥이나 먹자고 그래.”
“걱정 붙들어 매세요.”
이래 봬도 나타샤는 음주가무와 엔터테인먼트에 일가견이 있었다. 사람 꼬시는 데에는 이골이 난 몸이다.
그녀는 슬며시 웃으며 한승문에게 다가갔다.
“오는 길은 편안하셨는지요? 의원님?”
“아,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한승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말에서 딱히 정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행적을 보면 인권변호사 비슷한 분위기를 예상했건만, 의외로 모스크바의 구렁이들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나타샤는 일단 악수를 청하며 살갑게 웃어 보였다. 누가 도움을 줄 수 있고, 누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는 명확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친해져야만 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나타샤 프리마코프라고 합니다.”
“한승문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교환했고, 나타샤가 슬그머니 동석하려던 찰나,
“그런데 혹시 직위가……?”
“…….”
한승문의 질문에 나타샤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총정보국 스페츠나츠 소속 중령이었습니다.”
“……스페츠나츠요?”
“아, 아뇨! 지금은 민간인입니다! 내란 혐의로 보직 해임됐거든요.”
“……아, 네.”
나타샤는 ‘나 안전한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로 방긋 미소 지었지만, 한승문의 안색은 이미 허옇게 질려 있었다.
* * *
러시아 측에서 기대한 것과는 달리, 한승문의 제안은 인명 구호적 측면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평의회라…….”
WPO를 강대국들로부터 독립시킨다니. 빅토르의 입에서 복잡미묘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한편, 나타샤는 이를 희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적-외교적으로 고립되어가는 러시아 동부에게, 새로운 카드패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계산을 시작했다.
‘상당히 비싼 값에 거래할 수 있겠어.’
이번 사안을 찬성해 주는 대가로 무엇을 받아낼까. 물론 1대1 교환에 가까우니만큼 무리한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새로운 거래를 채결한다면?
‘새로운 식량 루트를 뚫거나, 헌터 아카데미에 사람을 보내거나…… 어쩌면 남한에 핵무기를 팔아서 북한 땅덩이를 사들일 수도 있겠어.’
좋아. 작전 타임이다. 나타샤가 싱글벙글한 속내를 숨기고 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습니다. 다만, 의논할 시간을 조금만-”
“좋습니다.”
이는 빅토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나타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뭐하자는 소리인가. 그냥 콜을 한다고?
나타샤도 피채원도, 심지어 한승문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빅토르 혼자 진중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국익이라는 명목으로 인민을 착취하는 이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안에 대해 토를 단다면 고개를 들 수 없겠죠.”
그는 보드카 99%와 레몬즙 1%로 이루어진 칵테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련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보았다. 매장 구석에 있는 창문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시베리아의 겨울 눈보라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여긴, 참 힘든 곳입니다.”
그의 시선은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러시아를 춥고, 가혹하고, 곰이 자주 나오는 나라라고들 합니다.”
“…….”
“하지만 러시아를 진정 병들게 하는 건 곰이나 추위 따위가 아니라, 대낮에도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마피아들과, 뇌물 없이는 시민을 도와주지 않는 공무원들이었지요.”
러시아의 군인은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독재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회를 좀먹는 버러지들을 싹 청소했지요. 그 와중에 언론인 몇몇이 죽어나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
“왜냐. 사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요. 생존을 위해서는 차선책을 써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국가를 국민의 위에 세웠고, 그 대가는…… 피로 돌려받았습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는 기억의 단편들이었다.
하늘에 열린 게이트.
괴수들과 뒤섞인 피난민.
공습 명령.
도시 봉쇄령.
구조 포기.
네이팜.
식량난.
식인.
헬기로 도망치는 부자들.
폭동.
진압.
은폐.
빅토르 리는 한때 국민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의 일부였고, 이제는 조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반역자였다.
그의 인생은 실로 다사다난했지만 이제 와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을 살았으니까.
중요한 건, 그가 수천만 피난민과, 수십만의 군대, 그리고 무수한 핵미사일의 책임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나타샤 또한 빅토르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었고, 피채원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껌뻑이고 있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말했다.
“위기에 몰린 국가가, 그 국가를 장악한 소수의 권력자가, 생존을 위해 국민을 버린다는 사실은 제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WPO의 태생이 강대국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승문 의원께서 이를 고치신다는데, 제가 반대할 이유는 없지요.”
창문 너머의 블리자드를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한승문에게 향했다.
“다만, 제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예.”
“WPO를 강대국들로부터 독립시킨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새로운 권력을 잡을 겁니까?”
의도가 선명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타샤는 빅토르가 여기서 멈추기를 바랬지만, 불행히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의원께서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한승문은 대답했다.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실제로도 새로운 집권세력이 기존보다 더 낫느냐에 대해 물으신다면, 거기에 확답을 드릴 수도 없는 게 현실이고요.”
“…….”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평의회에 제 이름은 없을 겁니다.”
* * *
전기가 끊어진 시대에 주목받은 것이 3가지 있다.
마석, 농업, 그리고 증기 기관차다.
전기가 필요 없이 석탄과 철도만 있으면 기차는 달릴 수 있다. 에너지를 바깥에서 받느냐 스스로 조달하느냐의 차이는 매우 컸다.
따라서 예산 부족으로 수많은 증기기관차를 현역으로 운용하던 러시아는, 비교적 수월하게 기존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었고,
삐이이이익-!
……덕분에 우렁찬 경적 소리가 하바롭스크 역의 아침 공기에 울려 퍼졌다.
“출발합니다!”
이윽고, 기차가 서서히 요동치더니, 검은 매연이 겨울하늘을 가로질렀다.
기차는 하얀 설원 너머를 향해 질주했고, 이내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기차가 사라진 이후에도, 하바롭스크 역에 서서 하염없이 지평선을 지켜보던 이가 하나 있었다.
“……이만 들어가시죠. 사령관님.”
“어어.”
추위에 살짝 몸을 떨던 나타샤가 빅토르를 재촉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묵묵히 지평선 너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를 상념에서 깨운 것은, 한참이나 그를 기다려주던 나타샤의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사령관님?”
“아니, 뭐…….”
아이러니하게도. 설원을 달리는 기차의 어느 객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다. 싶어서.”
* * *
[오늘 오전, 러시아 양대 세력이 평의원 배출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동시에 노아 뤼미에르 WPO 의장은 긴급회의를 소집했으며, 현재 미국 뉴욕의 UN 청사에서 각국 대표단 간의 긴밀한 회담이…….]
[속보입니다! WPO 총회에서 평의회 직선제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로써 기존 국가원수들의 평의원 임면권이 말소되었는데요, 새로운 지도체제를 두고 상당한 충돌이 예견되는 상황입니다.]
[한편, 한승문 전 장관이 WPO에서 사퇴함에 따라, 차기 총선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야인으로 돌아온 한승문 전 장관에 대해, 국민당은 현재 아무런 답변도 내어놓지 않고 있습니다…….]
EP 29
헌터들의 세상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