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 - 아귀다툼 (4)
병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 하늘이 맑다지만 오늘 하늘은 흐렸다.
아무래도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세상은 그만큼 많이 변했다. 초병哨兵은 고작 지평선만 바라보고 있었건만, 병사는 세상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병사가 말했다. 후임이 기겁했다.
“야.”
“이병! 김 상 진!”
“저어기, 앞에 저 산. 원래는 엄청 빽빽했었는데 말이야.”
병사는 세월을 돌이켰다.
“내가. 시발. 성남에서 뺑이 치다가 포위망 뚫리고 부대 개박살났을 때. 탈영해서 원주까지 도망쳤어요.”
“…….”
“거기서 이제 피난민들 차 얻어 타고 내려가다가 여기 소백산에서 재소집됐지. 시발거. 반쯤 자수한 거긴 한데, 그때 탈영 기록 때매 아직도 전역 못하고 있다 야.”
“……힘드셨겠습니다.”
“힘든 건 여기서 괴수 막던 게 가장 좆같았지. 원래 오기로 했던 불곰대대가 옆에 월악산에서 퍼져 버려가지고. 여기는 깡보병으로 틀어막았다-이거야.”
그때의 여파로 소백산은 풀포기 하나 없이 메말라 버렸고. 이제는 유골인지 잿더미인지 모를 연기만 이따금 나리운다.
그리고 비목도 세우지 못하고 도망친 병사는 담담하게 기억을 읊조렸다.
“다섯 시간 만에 괴수가 밀고 내려왔는데. 제대로 된 공습이 있었겠냐. 포병지원이 있었겠냐. 그나마 온다던 땅크는 옆산에서 퍼져 버리고. 억지로 끌려와서 뒈지게 생긴 놈들이 총 들고 뒤돌아 도망치고. 난리도 아니었단 말이지.”
병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도 지금처럼 하늘이 흐렸더랬다. 밤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었지.
“……시꺼먼 밤에 얼어 뒤질 것 같은데. 저어 멀리선 붉은 안광이 아른거리지. 숲에선 뭐가 마악 달려와서 물어뜯을라 그러지. 눈물 콧물 흘리면 금방 얼어붙어서 따갑지…….”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그리고 그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뜨거운 불꽃 덕분이었다.
“그때 피난민들 사이에서 몇몇 사람들이 튀어 나오더라고.”
“…….”
“배 나온 아저씨랑. 교복 입은 여학생이랑. 또, 세 사람 정도 더 있었는데. 손에서 막 번쩍번쩍 뭘 하면서 괴수한테 달려들대.”
그러나 그 불꽃들도 다 스러져 버리고. 잿더미마저도 바람에 날아가 버린 지금.
“……그러니까.”
그런 고리타분하고 아픈 기억 따위.
힘들고 고단했으나 잊을 수 없고, 이제 와서 추억해도 어딘가 씁쓸하기만 한 기억 따위는.
“……그냥. 그랬다고.”
흔한 군바리의 경험담에 불과했다.
* * *
다음 날 아침.
홍선아는 멋들어진 스타렉스를 끌고 왔고, 나와 경호원들이 그 차를 가득 채웠다.
허나, 동행하는 경호원이 평소의 3배는 되었기에 리무진 두 대가 봉고차를 따라왔다. 아마 이 인원으로 어지간한 도시 하나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