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9)
창문 너머로 아침햇살이 스며들었다. 햇살은 따갑지 않고 포근했다. 여름도 슬슬 끝자락에 다다른 모양이다.
그렇게 눈이 떠졌다.
“……하암.”
작게 하품하며 침대에서 기어 나와 깽깽이발로 콩콩거리며 출근할 준비를 했다.
“……쩝.”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뭔가.
일상이 살짝 허전하다.
시시때때로 사고를 치며 혈압을 오르게 만들던 꼴통들이나, 집구석에 들어가면 뒷목에 차가운 캔맥주를 갖다 대던 여도연이 없어져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이따금 불러서 맛있는 거나 사맥이던 피채원이나, 정겨운 외국 손님들이 없어져서 그런 걸까.
요즘은 참. 뭔가.
그래.
조금 그렇다.
하지만 내 기분이 어떻든 간에 내가 지고 있는 권력은 그만큼의 책임을 요구했다.
속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남들의 존경과 공포를 받고, 도장 하나의 무게를 절실히 체감하며 뉴스를 확인하는, 그런 나날이었다.
그때.
우리 애들이 유럽에서 한 건 터뜨렸단 소식이 들려왔다.
“이야아, 씨……!”
심지어 애국심 쿡 쿡 찌르는 소식이다.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해서 지지율만 야금야금 떨어지는 와중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무시 못 할 지지율 상승이 통계로 확인되었으니 더더욱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좋아. 오랜만에 회식을 해야지.
그렇게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으니, 마침 의원실 인턴비서 유재영이 자기 키보다 높게 쌓인 서류더미를 들고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어, 재영 씨!”
“네, 넵!”
유재영이 바짝 얼어붙었다. 나는 나긋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저녁에 회식하려고 하는데. 의원실 식구들한테 갈 거냐고 물어봐줄래요?”
“아, 네! 마침-”
흐읍!
무언가 말하려던 유재영이 합죽이가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채근했다.
“마침 뭐요?”
“아, 네! 네! 마침, 그, 뭐냐…….”
유재영은 잠시 허둥지둥대다가,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오, 오늘 회식이었거든요…….”
* * *
“야, 일호야. 어디냐? 아아. 그래. 호정이랑 레스토랑 갔구나. 으음. 그래. 어어, 별일은 아니고, 별일은 아니고……. 그래. 알았다. 좋은 시간 보내고. 어, 어어. 끊는다.”
“여보세요? 아, 감 기자님! 하하. 네. 별건 아니고요.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아. 네. 가족회식이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쇼.”
“……여보세요? 아이고, 유 총리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아아, 네. 다름이 아니라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어떠십, 아, 네. 회의요? 네. 알겠습니다.”
“……네, 김두식 사령관님. 그간 잘 지내셨-아, 전선 시찰중이시라고요? 네. 별건 아니었구요. 네. 네. 끊겠습니다. 수고하십쇼.”
“……네. 여보세요? 아, 예, 천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녁에 시간 있냐고요? 어어. 차관님들이랑 회의가, 네. 조금. 네. 죄송합니다. 저녁은 그럼 나중에…….”
“……지윤이니? 지윤아!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 아, 맞다. 가족회식이랬지. 그래. 잘 쉬고. 으응.”
뚜욱-!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
내 보좌관들이 오늘 회식을 한댄다. 나는 쿨하게 카드만 보내줬다.
그래. 쿨하게.
상사 몰래 하기로 한 회식에 카드를 보내주다니. 이렇게 자비自費로울 수가 없다. 솔직히 나정도면 A급 상사가 아닐까.
쿨하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쿨한 사람이니까 시크하게 편의점에서 츄하이 한 캔을 샀다. 점원한테 쿨하게 싸인도 해줬다.
절대로 혼자서 술 먹는 처지라 외로움을 타거나, 그런 갱년기스러운 마음가짐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쿨하고 시크한 28세 아니던가. 사회 초년생으로 접어들 나이에 장관을 해먹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청춘은 청춘이다.
물론 신체나이는 조금 더 많지만. 유럽에서 준 엘릭서 먹고 컨디션은 깔끔하게 회복했다. 간수치도 팍 떨어졌더라.
덕분에 나는 쿨하게 혼자서 술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커다란 집의 황량한 거실에 후줄근한 난닝구만 입고 쭈그려 앉아서. TV에서 틀어주는 국뽕 예능이나 보면서 말이다.
보통 매주 금요일 저녁 즈음 되면 피채원이 내가 좋아하는 파인애플 피자 한 판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오늘은 어째 초인종이 울리지를 않는다.
아 맞다. 유럽 갔지.
“……크응.”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고 자서 그런가 살짝 콧물이 났다.
휴지가 놓여있는 곳까지 뱀처럼 기어가고 있으니 뭔가 살짝 울컥했지만, 나는 쿨한 사람이니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여, 여보세요?”
-어어, 승문이. 시간 있나?
나는 방긋 웃으며 양판석의 전화를 받잡았다.
“으음. 스케줄이 조금 있긴 한데, 그거야 빼면 됩니다!”
-미국에서 외교관이 왔어.
* * *
미국의 요청은 다양복잡했다.
관세, 경제협력, 7함대 지원, 한미상호방위조약 연장 및 개정, 전시작전통제권 범위규정, 주한미군 증원, 마석사업 제안. 등등등.
그러나 핵심을 꼽으라면 이거였다.
달러 기축통화基軸通貨.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1,000원 대신 1달러를 쓰라-뭐 이런 소리는 아니고. 국제무역을 할 때 달러로 환전한 다음에 교역을 해달라는 소리였다.
사실 게이트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게 정상이었다. 달러는 엄연한 전 세계적 기축통화였으니 말이다.
보통 수출 몇만 불 달성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게 다 무역할 때는 달러로 돈계산을 해서 그렇다.
다만 게이트 터진 이후로는 사정이 좀 미묘하다.
당장 우리나라의 2차 신남방정책(동남아 마석수입)만 봐도 원화₩를 주고 마석을 받아오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달러랑 원화랑 반반씩 달라고 하더라.
이건 우리가 미국의 경제적 권위에 도전한 게 아니라, 동남아시아권에서 원화₩를 선호해서 생긴 현상이었다.
즉, 동남아시아가 달러보다 원화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신뢰도가 미국에 범접했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동남아시아권에서는 말이다.
“쓰읍…….”
화폐의 가치는 곧 국가에 대한 신뢰도를 나타낸다. 이건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참 애매한 타이밍 아닌가.
미국. 유럽. 영국. 게이트. 화폐. 신뢰. 초인연맹. 음모. 등등. 당장 여러 키워드가 머릿속에서 돌아가며 이런저런 추측들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경제는 내 전문분야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전문가를 찾아온 겁니다.”
“흐음…… 그런가요……?”
천금순의 사무실은 GS그룹 본사 1층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최상층이 아닌 이유는 사원들 밑에서 일하겠다는 포부라고 밝혔지만, 정말 그랬다면 저어 책장 뒤에 지하벙커로 가는 입구를 숨겨놓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미국이 달러를 기축통화로 써달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훑어보자면, 달러의 신뢰성을 확보하려는 것 같은데요.”
오늘도 과로에 시달리는지 살짝 부스스한 차림의 천금순은, 모나미 볼펜을 가져와서 이면지에다 스윽 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그녀는, 동그라미 두 개 안에 단어를 하나씩 적어넣었다.
신뢰성, 그리고 무역적자.
“기축통화의 조건은 두 가지예요. 신뢰성. 그리고 어마어마한 무역적자. 그러니까아……. 모두가 믿고 쓸 수 있어야 하고, 모두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돈을 풀어야 하는 거죠.”
“미국만 할 수 있는 일이군요.”
“그쵸. 신뢰성은 금덩이를 무지막지하게 들고 있던가, 국방비에 천조千兆를 쏟아 붓던가 해야 하고. 또, 전 세계를 상대로 자기네 돈을 퍼줘도 나라가 그나마 멀쩡하게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신뢰성’이라는 단어가 적힌 동그라미를 지익 직 그어버렸다. 옆에는 대충 괴수로 추정되는 귀여운 낙서까지 그렸다.
“……흐음. 하나만 예를 들어 볼게요. 베트남이 우리랑 무역할 때 원화로 받았다가 2차 한국전쟁 터지면 그거 다 휴지 조각이 되겠죠?”
“네.”
“그러니까 딸라로 내놓으라는 거였는데 지금은 딱 거꾸로죠. 미국 중부 박살나고 좀비 수천만 마리 들끓고, 막 원전도 일곱 갠가 빠바바방 터졌다는데. 뭘 믿고 달러를 쓰나요……?”
“흐음…….”
“근데. 우리가 외국이랑 무역할 때 대금을 달러로 지불한다 쳐봐요.”
“달러의 신뢰도가 높아지겠군요.”
“미국의 첫번째 노림수가 그거죠. 돈이나 주식이나 결국 쓰는 사람 많을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거거든요. 우리가 달러를 써주면 달러 가치가 높아질 테고. 그러면 그쪽 경제도 안정되지 않겠어요?”
첫 번째 노림수라.
“그러면 두 번째는 뭡니까?”
* * *
“사실 뭐 손가락으로 세기에도 부족할 만큼 많을 겁니다.”
대한민국 경제통 유재경 국무총리는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러 피며 내게 설명을 이어갔다.
“물가안정, 국가신뢰도 회복, 외교적 친화, 등등. 달러절하야 뭐 돈 푼다고 생각하면 그리 손해도 아니고…….”
유재경이 눈을 번뜩였다.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미국의 신뢰성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어요.”
그는 내게 몇 가지 역사를 알려줬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건 옛날에 미국이 금이 존나 많았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금본위제 체제에서 가장 신뢰성 있는 나라였다고 한다. 현대에는 국방과 경제로 그 신뢰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였고 말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신뢰성은 결국 금, 경제, 군사력, 외교력에서 담보됩니다. 헌데, 지금의 미국이 예전과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까?”
“아니죠.”
“사실 미국의 경제적 패권은 달러인덱스에서 기인합니다. 1달러로 아프리카에서 바나나 수십개 산다. 뭐, 그런 얘깁니다. 돈에도 파워가 있어요.”
“…….”
“그런데 지금은 금본위제가 아니라, 마석 본위제 아닙니까? 달러의 시대가 이미 저물었어요. 그건 수치와 통계가 증명합니다.”
아무튼 미국경제가 엿됐다는 소리는 알아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말이다.
얄팍한 지식을 숨기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자기 말에 심취한 유재경은 몇 가지 추측을 늘어놓았다.
“……사실 여기서 살을 조금만 덧붙이자면. 미국은 일종의 경제체제를 신설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경제체제요?”
“유로존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화폐는 원래 같은 걸 쓴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관계가 생기는 법입니다. 환율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확신했다.
“우리가 달러를 써준다면. 원화가치도 폭등합니다. 물론 달러가치도 폭등하겠죠. 이건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입니다. 미국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
“원래라면 수출에 악영향을 끼치겠지만. 경쟁 화폐가 휴지 조각이 된 마당에, 1,000원으로 쌀 한가마니를 사들일 수 있으니…….”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그 정도로 심해지는 겁니까?”
“미국이 그렇게 만들 거라니까요. 아마 몇몇 국가의 화폐 빼고는 휴지 조각이 되어버릴 겁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긴 한데. 이제는 휴지보다 더 싸질 거예요.”
유재경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지금도 우리가 그걸 이용해서 이득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환율 덕에 동남아에서 헐값에 마석 사오고 있잖습니까. 항공유 가격이 더 싸더만.”
하긴 그쪽은 마석을 에너지로 돌릴 기술력이 안 되는 곳이다. 순수하게 헌터들 체력만 강화시키는 용도이니, 윗사람들 입장에서는 외국에 파는 게 이득이겠지.
물론 그들이 진정 국민을 생각한다면 나라를 팔아먹는 짓거리와 다름없었지만, 언제 정치인이 국민을 생각한 적 있었던가. 심지어 족벌 깡패정치가 빈번한 문화권에서 말이다.
유재경은 반짝반짝한 안경에 먼지가 묻었나 확인하며 담담하게 예언했다.
“결국 일종의 경제적 ‘사다리 걷어차기’입니다.”
“…….”
“우리가 미국의 경제적 지배권을 인정해 준다면. 미국이 우리를 새로운 기득권 모임에 넣어줄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무도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하겠지요. 문제는 이 기득권 모임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가 몇 개 있다는 겁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게 우립니다. 적어도 지금은.”
“…….”
“뭐어. 사실 우리 원화가 달러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긴 합니다. 그런데 굳이 덤벼들 필요가 있습니까? 패권국가 노릇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
“흐음. 뭐. 국무총리로서의 의견을 듣고 싶으시다면. 제 입장은 조건적 ‘Yes’입니다. 안전장치 몇 개 걸어놓으면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너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니 보험을 들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
“무엇보다-”
* * *
미국이 그래도 적으로 돌렸을 때 가장 거슬리는 국가가 아니냐
“-라고 하더군요.”
“흐음…….”
양판석은 침음을 흘리며 주억거렸다.
“하긴. 경제수석도 비슷한 소리를 하더군. 기득권 국가들을 모아 환율로 울타리를 쳐버리겠다는 발상이라고 말이야.”
그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글쎄요. 거국적 관점에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니 살짝 석연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좋지, 좋아…… 한 번 읊어 보게나. 이쪽 전문가 의견도 들어 봐야지.”
“하하…….”
나는 내 나름의 추리를 읊어내기로 했다. 나도 나름 계산기 두드릴 줄 아는 사람이다 이거다.
“……만약에 말입니다. 한국, 미국, 중국, EU의 경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래.”
“유럽이 망했다 칩시다.”
“뭐?”
“아, 그냥, 그렇게 칩시다!”
물론 계산기 두드렸다고 결과가 논리적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숫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유럽이 망하거나 아주 큰 타격을 입어버렸다. 그런데 그걸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하나 있다.”
다만.
“……가장 이득을 보는 나라가 어디겠습니까?”
정치는 숫자가 아니라 욕망을 읽는 학문이었다.
“게이트 때문에 환율이 출렁이는데. 게이트가 어디 열릴 줄 안다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것 아닙니까?”
* * *
피채원이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본 것은, 창문 너머로 그들을 맞이하는 거대한 환영인파였다.
비행기 안에서 나갈 준비를 하던 찰나에, 지나가던 다니엘이 피채원에게 다가왔다.
그는 희번뜩한 눈빛으로 나직이 경고했다.
“I didn‘t bring you here because i trust you.”
피채원의 옆에 앉아있던 여도연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얘 뭐래냐.”
“우리를 믿어서 데려온 건 아니래요.”
“뭐, 영국에?”
“글쎄요. 저번에 우리보고 스파이니 어쩌니 하던데요.”
“……허?”
다니엘은 아랑곳 않고 중얼거렸다.
“Thank you for help, but don‘t do shit.”
그 말을 남긴 다니엘이 휙 돌아 나가자, 여도연이 다시금 고개를 까닥였다.
“뭐래냐.”
“와준 건 고마운데 이상한 짓 하지 말래요.”
“뭔 이상한 짓.”
“으음. 암살이나 첩보 아닐까요.”
“히야…… 이 새끼 말 예쁘게 하네.”
듣는 첩보원 입장에선 살짝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피채원의 제1 목적은 영국 수상의 뇌를 털어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피채원은 좋게 좋게 웃으며 여도연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그 심정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능력 때문에 생긴 천성이었다.
“뭐, 유럽은 이렇게 의심해야 되는 상황이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기본적인 싸가지라는 걸 달고 다녀야 사람대우를 받는 건데.”
“……그거 때문에 상처받은 일이라도 있나 보죠.”
피채원이 쓰게 웃어보이자, 여도연이 못 이기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여튼 애가 속도 참 좋아.”
“하, 하…….”
피채원은 머쓱하게 웃었고, 여도연은 아직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게 의심할 거면 왜 데려왔대? 참 나. 그냥 졸라 세 보여서 데려왔나?”
“……글쎄요.”
피채원이 담담히 침묵을 지켰다.
남의 나라 괴수를 목숨 걸고 잡아주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사실은, 다니엘의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 힘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