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26화 (126/296)

EP 21 - 국경없는 기사회 (8)

사이렌이 울리자 다니엘이 재떨이를 집어 던져 창문을 깨부수고 뛰쳐나갔다. 뤼미에르는 그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피채원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킁!”

엉망진창 흩뿌려진 담뱃재가 퀴퀴한 냄새를 퍼뜨렸고, 유리 조각은 사무실 바닥을 가득 채웠다.

피채원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 조각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문 앞에 다가갔다.

“……!”

문고리를 잡아 비튼다.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서, 복도를 향해 빼꼼 고개를 들이민다.

그리고.

퍼억-!

“으앙냑……!”

어디론가 달려가던 공무원이 피채원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소녀는 머리를 문지르며 사무실로 다시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

여기는 프랑스 이능 관리국 정부청사였으니 말이다.

* * *

괴수가 나타났다 한들, 건물 주변에 군인은 물론이고 탱크까지 모습을 들이밀고, 온갖 헌터들이 튀어나와 방어선을 형성하는 걸 보고 있자니.

피채원은 이 건물이 그나마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디 안 가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크응!”

비록 아까 다니엘이 창문 깬다고 재떨이 집어 던졌을 때, 바닥에 흩뿌려진 담뱃재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소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국장님! 4마리 전부 사살되었답니다!]

[……뭐!?]

[헌터들이 잡았대요!]

[벌써!?]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괴수가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히는 위층에서 전화통화로 보고받는 프랑스 이능 관리국 국장의 표층 심리를 읽어낸 것이었지만, 아무튼 사건이 끝났댄다.

피채원은 그제야 슬금슬금 로비로 걸어 나왔다.

능력을 키지도 않았건만 로비는 충분히 시끄러웠다. 알아듣지 못하는 프랑스어는 소녀에게 그저 소음에 불과했다.

물론 능력을 사용한다면 이 모든 대화를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겠지만, 행여 이 중에 유가족이라도 존재한다면 아마 극심한 두통을 앓을 것이 뻔했다.

괴수에게 누군가를 잃은 슬픔이나, 괴수에게 죽임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읽는 것은, 생각보다 비참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피채원은 그저 얌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비 구석에서 갑자기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대충 높으신 분으로 보이는 사람이 단상 위로 올라갔고, 수많은 기자가 그를 둘러싸며 뭐라뭐라 소리쳤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를 놓칠 뻔했으나, 피채원은 가까스로 전화를 받는 데 성공했다.

“여보세요……?”

[채원아!]

익숙한 목소리에 피채원이 모처럼 방긋 웃었다.

“언니!”

[괜찮냐!?]

“아, 네…….”

[어디야!]

“이능 관리국 청사요.”

[……어딘진 모르겠는데. 괜찮은 건 맞지?]

“네. 그나저나 헌터분들은 다들 괜찮으세요?”

[그, 뭐냐.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네. 아무튼 그 배불뚝이 아저씨 거인시체 위에서 기념사진 찍다가 뒤로 자빠져서 뒤통수 깨질뻔한 거 빼면 다들 무사하다.]

심상찮은 단어가 섞여 있었다.

“……거인 시체요?”

[어어. 눈깔 여섯 개 달린 놈, 구경시켜줄까?]

“……거인이요?”

[어. 네 마린가 나왔어. 집채만 하더라 야.]

“……잡으셨어요?”

[응, 전부.]

“……4마리 다요!?”

[나랑 진운이가 두 마리. 그리고 호텔에 있던 사람들이 두 마리.]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소리였다. 마침 천장에 달린 TV에서 거인이 건물을 때려 부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더더욱.

믿기 힘든 소리였지만 피채원은 가까스로 말을 이어갔다.

“……아. 일단. 들어갈까요?”

[혹시 모르니까 거기서 기다려. 데리러 갈게.]

“아, 네. 감사합니다.”

[초인지원청이라고 했나?]

“……프랑스 이능 관리국 청사요.”

[그래. 도착하면 전화한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통화가 끊어졌고, 피채원은 얌전히 1층 로비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거인 네 마리를 전부 때려잡았다니.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어쨌든 희소식은 희소식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 헌터들의 이미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피채원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저어 로비 건너편에서 프랑스 고위공무원이 기자회견을 이어가는 것을 구경했다.

아주 살짝 능력을 활용해서 지켜보고 있자니, 아직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었다. 말을 더듬거리기도 했고 말이다.

“……후훗.”

한국 헌터들이 4마리 다 잡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살풋 미소를 지어내던 그때였다.

“안녕하, 세요?”

한국어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피채원이 고개를 들어보니, 왠 서양 아줌마가 히죽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미다.”

“누, 누구……?”

“아, 죄송합미다. 소개가 늦었꾸뇨.”

상당히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피채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TF1의 마리앙 델라쿠르입미다.”

“……아, 네.”

“한국으로 치면 엠비 씨죠.”

“아…… 잘, 아시네요……?”

“몇 년 살았거드뇨. 아무튼, 혹시 한국 헌터들의 대표로 오신, 피체원 비서관님 맞으신가요?”

“아, 네…….”

아무래도 기자인 모양이다. 볼품없이 쪼그려 앉아 있던 피채원이 더 이상 국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잽싸게 일어났다.

마리앙 기자가 피채원에게 질문했다.

“아, 혹시 질문 몇 가지만 드려도 되겠습미까?”

“……아, 네.”

“이번 괴수 사태에 대해 아시는 정보가 있으신지?”

그 순간.

피채원의 머리에 무언가 번뜩였다.

“……글쎄요.”

상당히.

이 일을 재미있게 만들만한 무언가가 말이다.

“…….”

물론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혀뿌리는 어느새 중추신경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네 마리 전부 프랑스 헌터들이 잡은 걸로 압니다.”

“호오.”

“다니엘 씨가 두 마리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 * *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보증 섰다 인생 망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생기는 것을 보면, 시대를 초월하는 명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채원에겐 아니다.

[인스턴트 게이트. 일반 게이트와는 다르게 보스몹 내뱉고 사라지는 게이트라고 보면 되나? 어, 씨, 뭐야. TF1에서 속보 띄웠어!?]

[프랑스 헌터들이 다 잡았다고? 이거 잘 팔리는 소식인데?]

[쓰읍. 다니엘의 활약이라. 정부에서 영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

로비는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피채원은 그 속에 슬며시 섞여들었다.

“아. 익스큐즈 미……?”

그래도 나름 6월 모의고사 때 영어 1등급이었다. 물론 회화 실력은 썩 좋지 않았지만, 원래 사람이 악에 받치면 뭐든지 하는 거다.

“아임, 어…… 코리안. 가바먼트 서번트.”

그녀의 유창한 자기소개에 기자들 몇몇이 피채원을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총리가 깽판 칠 때 옆에 있던 한국인 대표였으니 기자들이 모르는 게 이상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피채원은 성공적으로 기자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스멀스멀 약을 치기 시작했다.

사실 긴장과 흥분에 반쯤 넋을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 짓거리는 평소에 체득한 본능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아이 히얼드. 어…… 프랑스 헌터스 헌트 올 자이언트. 아워 헌터 코맨티드 미. 예. 예. 다니엘 웰링턴 헌트 투 자이언트. 앳 리스트 애즈 파 애즈 아이 노우.”

피채원의 교묘한 언변에 넘어간 기자들은, 어느새 인터넷과 SNS에 현장 특종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눈덩이가 굴러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으레 언론이 그렇듯, 몇몇 인터넷 기사가 올라오자마자, 온갖 기자들이 기사를 베껴서 자기네 신문사에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헌터들이 고작 1시간 만에 괴수를 전부 처단했고, 다니엘 웰링턴이 혼자서 두 마리를 잡았다고 말이다.

물론 다니엘 웰링턴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었고, 이런 모순은 긴장한 피채원의 어벙함에서 나온 실수였지만.

오히려 이런 모순 덕분에 기자들은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며 사건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 정부에서 사태의 원흉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비서관?”

“아…….”

사람을 안다면.

사람을 다루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프랑스 헌터들 공적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

“아무래도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나 싶어서…… 네. 네. 아하하하…… 도우러 왔으니 도와야지요. 네. 네. 그러면…….”

그렇기에.

책임에 대한 공포와 실적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프랑스 고위공무원을 다루는 건, 퍽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피채원은 괴수 토벌의 공적을 프랑스 정부에 돌려 버렸다.

물론 그쪽에서 당연히 녹취록을 가지고 있을 터였으니, 그녀 본인이 이것을 빌미로 삼지는 못할 것이었으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폭탄을 터뜨릴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여보세요?“

[What the HELL is going on?!]

* * *

피채원의 임기응변에서 튀어나온 본능적인 도박수는, 온갖 이해관계와 인과관계에 맞물리며 압도적인 나비효과를 터뜨렸다.

파리는 EU의 핵심이고, 초토화된 8구는 파리의 핵심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비상사태 속에서 모두가 반쯤 정신이 나갔다는 것.

게다가.

그곳에는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이 있었고, 짊어져야 할 책임 때문에 패닉에 빠진 공무원들이 있었으며, 애국심이 필요한 프랑스 정부까지 있었다.

덤으로 불합리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 헌터 하나까지 말이다.

“…….”

피채원은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반쯤 정신 놓고 저지른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아직도 심장이 조마조마하고 쿵쾅쿵쾅 떨리는 것이, 이게 제 명에 못 사는 심정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정치는 원래 결과로만 이야기하는 분야였다.

행한 것은 헌터였으나, 다룬 것은 정치가다.

그렇기에 피채원은 웃고 있었다.

어쩌면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며 살아온 그녀의 무의식적 자아가, 본능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각자의 관계를 도출한 뒤,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낼 행동을 불현듯 떠올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흐아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소녀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고.

결과는 분명했다.

한국은 국제사회 속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고, 피채원은 유럽 외교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누군가는 그녀를 운 좋은 애송이라 여겼고, 누군가는 그녀를 어린 전략가로 생각했지만, 피채원이 국제사회에 대해 압도적인 발언권을 얻었음은 분명했다.

양판석과 한승문의 응원성명과 프랑스 정부의 부드러운 사과, 그리고 유럽 시민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피채원은.

뤼미에르와 다니엘을 양쪽에 세워두고서 인류 공존을 위한 협력이 필요함을 천명闡明했다. 보통 이런 것을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 한다.

그렇게.

샤를 드 골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준비되었다.

프랑스 대통령의 속내야 어찌 됐건, 겉으로는 피채원과 같은 의견을 견지했었으니, 이제 헌터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후우.”

그녀는 지금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목적은 단 하나.

영국 수상과 대면하는 것.

한승문의 경고를 가슴에 새기고서, 미국과 영국의 음모를 찾아내는 것.

“…….”

소녀는 기분 좋은 떨림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그 비행기에는 지원군을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았던 다니엘 웰링턴과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노아 뤼미에르가 있었다.

물론 여타 수백 명의 헌터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존재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기에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누군가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누군가는 생환生還을 원했고.

누군가는 전사戰死를 원했다.

누군가는 명예를 원했고.

누군가는 복수를 원했다.

그 마음가짐이 합리적인지는 중요치 않다. 마음이란 본디 설명이란 것과 관계가 먼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람을 이해하는 이가 하나 있었고.

그 덕에 비행기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 * *

그 시각.

한승문은 갑작스레 찾아온 미국 대사와 4시간에 걸친 회동을 마치고서, 관저 소파에 신경질적으로 드러누웠다.

“아, 씨팔, 코쟁이 새끼들…….”

달러를 기축통화基軸通貨로 써달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