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 칼은 몸이 아니라 맴으로 쓰는겨 (7)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권불십년
權不十年
열흘 붉은 꽃 없고, 권세는 십년을 가지 않는다.
옛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 권력은 참 유동적인 것이었다.
민주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느 지점에 권력이 몰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정치인에게는 전성기라는 게 존재했다.
말 한 마디로 전국민의 관심을 끌고, 전화 한 통으로 산을 옮기며, 손가락질 하나로 나라가 들썩이는, 그런 시절 말이다.
그리고, 언론, 정계, 학계, 재계가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한승문 장관이 제주 해저터널 착공을....]
[초상관리부, 수렵연수원 설립 가시권에 들어왔다.]
[마석가치 폭등, 호재인가? 악재인가?]
지금은 나의 시대였다.
* * *
띠로링 - !
지역구 사무실 문짝에 달린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깔끔한 여성용 정장을 입은 미인이다.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양복에는 금뱃지가 붙어 있었다.
“어어. 호정이 왔어?”
“네에.... 얼굴 한 번 뵙기 힘드네요. 요즘 장난 아니시던데요?”
“너는 얼굴이 장난이 아니다. 야. 왜케 삭았냐?”
"오빠만 하겠어요......?"
이호정이었다.
선거철 정치인이 다 그렇듯 녹초가 된 몰골이었다. 그녀는 국민당 원내대표 경선을 치루고 있었으니까.
내가 떠나 공석이 된 그 자리 말이다.
“경선은 어째. 잘 되가나?”
“말도 마세요. 신수광이가 비대위원장 먹고 신나더니, 갑자기 웬 개뼉다구같은 양반을 들이밀어가지고......”
그녀는 원내대표 경선에서 강적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아. 서울 난민캠프 총연합회 부회장? 옛날에 비례대표까지 한 양반이라며?”
“......쯧, 생각보다 좀 쎄네요.”
“그래도 아직 많이 우세하잖아. 그것만으로 대단한 거지. 네 체급에.”
사실 이호정은 여러모로 불리한 포지션이었다.
나이, 성별, 스펙, 직업, 출신, 심지어 외모까지.
27세의 전직 보좌관. 그것도 미인. 차라리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거대야당 원내대표는 썩 연상되지 않는 스펙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확실하게 가진 장점은, 특유의 악랄한 말빨과 언론플레이, 정무적 판단력(눈치), 그리고 내 뒤를 잇는다는 한승문계의 정당성이다.
사실 마지막 게 아주 큰 메리트였다. 그거 하나로 원내대표 도전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명찰을 달고서도 그녀가 고전하는 이유는, 원내대표 선거가 국민이 아닌 의원들 간의 선거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영감님들이 좋아할만한 스타일은 아니지?”
“......그렇죠.”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시무룩한 이호정을 위로했다.
원내대표 선거는 국민이 아니라 같은 의원들에게 표를 받아야 하는 선거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원들은 새파란 어린놈을 자기네 2인자로 앉히는 데 거부감을 가졌다.
무엇보다 2천만에 달하는 수도권 난민 카르텔의 영향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말이다.
이호정은 그 점을 짚어냈다.
“......수도권 상실지역 비례대표가 우리 당에만 70명이에요. 덕분에 신수광 계열이 세를 너무 빠르게 불리고 있네요.”
“수도권 난민캠프 대장하던 양반이잖냐.”
“쯧... 그나마 청중엽 지사쪽은 똘똘 뭉치긴 했는데, 철저한 중립으로만 일관하고 있고...”
“왜 이렇게 아쉬운 소리만 해? 이 정도야 예상했던 거 아니었나?”
“그렇죠. 문제는 100 퍼센트 이긴다는 장담을 못 드릴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답해주랴?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해.”
하기야 27세 보좌관 출신이 어디 신뢰가 가는 이미지인가. 특히 보좌관 출신이라는 게 큰 약점으로 다가왔다.
국회의원들이 노비로 여기는 게 보좌관인데 보좌관 출신을 자기 원내대표로 모실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나이먹고 경험 쌓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녀는 초선이었다. 그것도 27세.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청중엽 쪽 계파들이 이제부터 너 지원할거야.”
-그녀 뒤에는 내가 있다는 거다.
“......뭐라고요?”
“정확히는 내일 저녁에 공동성명 발표할 예정이니까. 기세타고 쭈욱 밀어붙여. 알겠어?”
“아, 아니. 그쪽은 중립 아니었어요? 대선때 기스 많이 나서 잠수타는 걸로 아는... 아! 경찰법! 경찰법 맞죠!?”
하여튼 눈치는.
“자세한 건 됐고. 일호한테 제주자치경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올리라고 그래.”
“......국방당에서 그걸 찬성할까요?”
“VIP랑 얘기 끝났어.”
“...!”
*
몇 년동안 양판석의 수행비서로서 그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정치인은 행동 하나로 여러 이득을 취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총 한 발을 쏘면 꿩 먹고 알 먹고 남은 뼈다구로 도랑치고 가재까지 잡아야 직성이 풀린달까. 누군가는 사골정신이라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뭐든지 질릴 때까지 쪽쪽 빨아먹어야 훌륭한 정치인이다.
이번 타깃은 청중엽이었다.
제주 자치경찰법을 깔끔하게 해결한 나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청중엽을 괴롭혔다.
“여보세요? 지사님. 접니다.”
[하하! 네. 어쩐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요 근래 제주도에 개발이 집중되다 보니 지역차별 문제나 땅값 관련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전라도랑 제주도를 잇는 해저터널을 착공하려고 하는데......”
[네?]
“해저터널이요.”
[아니. 네. 네? 해저터널이요?]
“원래부터 사업계획은 있던데요 뭐. 경제성이 안 되서 보류되던 거긴 한데, 이 시점에서 슬슬 추진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청 지사님께 부담을 드리기는 싫었는데, 각하께서 워낙 성화를 부리시는 바람에......”
[......아, 네! 다소 시일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조만간 건축허가 관련해서 연락 돌려드리겠습니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잇는 해저터널 건축허가를 받는다던가,
[여보세요?]
“아, 네! 지사님! 접니다!”
[...아하하! 네, 장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네. 해저터널 관련해서 제주도 내부에서 민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주 시민들의 반대가 워낙 극렬하다면서요?”
[.....그, 글쎄요. 모든 정책에는 당연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네. 하다하다 제주도 땅값 떨어진다거나, 괴수가 해저터널로 들어온다거나. 이런 괴소문까지 도는 걸로 아는데. 고생이 참 많으시겠습니다.”
[......아. 아하하하! 아뇨, 별 거 아닙니다. 금방 조용해질 겁니다. 자치경찰병력 투입될 거라는 소식이 있었는데요. 아마... 하하하!]
반발세력 알아서 잠재우라고 압박을 한다던가,
[여보세요?]
“네, 접니다. 지사님. 다름이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예?]
“제주대학교 부지 좀 써도 됩니까? 헌터들 교육시킬만한 데가-”
[예! 쓰십시오! 거기 총장이랑 잘 압니다! 말해두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학교 부지 사용 관련해서 협조를 받기도 했다.
결국 청중엽이 부산에서 열리는 도지사 정기회의까지 빼먹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릴 무렵에야 나는 그를 괴롭히는 것을 멈췄다.
*
세상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있고, 권력이 없는 자는 늘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을 찾는다.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을 초인을 기다린다. 백마 탄 초인이 이 세상을 바르게 돌려놓기를 갈구한다.
그러나.
초인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깨닫게 된다.
결국, 두 가지 선택지가 평범한 개인들에게 주어진다.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거나.
혹은,
꼬우면 권력을 잡던가.
“......그래서 제가 권력을 잡아서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각하.”
그렇게.
범인凡人은 초인超人이 되어 세상을 바꾼다.
“......이건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자네 갑자기 왜 이래?”
한적한 일요일 오후.
경상북도의 청명한 호숫가.
양판석은 손수 불판 위의 장어를 굽고 있었다. 맑은 산바람이 부는 호숫가에 장어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자갈밭 위의 석쇠불판,
호숫가에 드리운 낚싯대,
그리고 노릇노릇 익어가는 장어까지.
금방 잡은 물고기를 구워먹는 평범한 낚시꾼들의 식사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건 평범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양판석에게 따져 물었다.
“왜 양식장어를 사다가 굳이 여기까지 가져와서 구워먹는 겁니까?”
우리는 민물장어를 낚아서 구워먹는 게 아니라, 가게에서 파는 장어를 사다가, 굳이 산속 호숫가까지 가져와서 굽고 있는 거였다.
옛날부터 그랬다. 이게 양판석의 원래 스타일이었다. 맨날 낚시는 하는데 정작 마트에서 사온 걸 구워먹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복잡한 방식을 고수하느냐.
당연히 기생충 때문이다. 살짝 복잡하긴 해도 건강과 낭만을 둘 다 챙기는 방식이라고- 양판석은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낚시하고 돌아가는 길에 식당에서 먹으면 안 됩니까?”
보좌관 시절의 나는 하하호호 웃으며 장어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낑낑 들고서 그의 뒤를 따랐지만, 나는 이제 정권의 실세장관이었다.
나는 그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석쇠불판 들고오고. 장어 아이스박스에 담고. 소스까지 챙겨오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에잉. 자네는 보면 멋을 참 모른다니까.”
양판석은 애송이를 가르치듯 피식 웃었다.
“장어를 굽는다는 게 말이야. 생각보다 참 오묘하단 말이지.”
그가 히죽거리며 장어를 뒤집었다.
“인내심이 필요해.”
모든 장어를 뒤집은 양판석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어를 굽다 보면 말이야. 어느 순간 먹어도 되겠다 싶은 순간이 있어. 근데, 정작 입에 넣어보면 아직 덜 익어서 비리단 말이야......”
“......”
“왜 그런지 아나?”
“......글쎄요.”
“장어 껍데기가 타버리니까 금방 뒤집어서 그래.
그리고 또 뒤집고.
또 뒤집고.......
그러다 보면 겉부분만 아주 그럴듯하게 익어버린단 말이지.......”
양판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속 빈 음식이 되어버리는 거야.”
“......”
“개혁 또한 마찬가지네.”
그는 히죽거리며 장어를 뒤집었다.
“조금만 탈 것 같아도 금방 바꿔버리고. 급하게 밀어붙이다 보면. 겉은 참 그럴싸해진단 말이지.”
“정작 내실은 놓친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양판석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겉이 타더라도. 금방 건드리고 싶어도. 이제 다 익은 것 같아도. 가급적이면 자꾸 뒤적거리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일이 풀리는 거야.”
"......"
"조금 타면 어떤가? 도려내면 되는 것을. 아니면 그 나름의 맛을 즐기던가."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장어가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뭐. 사람마다 자기 방식이 있겠지만 말이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경치가 좋구만.”
캠핑카 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화장실 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래서 왜 장어를 식당에서 안 먹는 겁니까?”
“맛있게 구워놓게!”
나는 양판석이 떠나간 자리에서 한참동안 장어를 구웠다.
어느 순간, 익었다 생각해서 입에 넣었다.
“......퉤!”
덜 익어 있었다.
*
조언이라는 게 늘 그렇듯, 듣는다고 행동이 바뀌지는 않았다. 평소와 같은 과로를 수행하는 와중에 무언가 찜찜한 기분만 더해질 따름이다.
개혁은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내 스타일대로 말이다. 나는 불도저 장관이란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그렇게,
기차는 달린다.
시간은 흐른다.
세상은 바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여름의 무더위가 정점을 찍을 무렵. 제주도 영평동의 대규모 공관서 앞에 수많은 양복쟁이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현수막 아래에 나란히 늘어선 이들은 붉은 테이프를 손에 들고 있었고, 행렬의 가장 가운데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있었으며, 그 옆에 내가 있었다.
나는 이름 모를 공무원이 건네주는 가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가위를, 한 손에는 테이프를 들고서, 문득 내가 도달한 곳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건물들, 그리고 공사장, 그리고 기자들, 그리고 권력들이 보였다.
모두가 나를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렇게.
초상기술연구본부.
초인지원청 본청.
한국중앙마석거래소.
삼성 사이오닉 중앙연구소.
수렵연수원.
국립사냥기술전문대학교.
GS 마석사업부 각성제 투여센터.
초인연맹 한국지부.
이 모든 것이 결합된.
한국초상산업단지 Psionic Academy 의 출범은.
사각 - !
내 작은 가위질 소리로 이루어졌다.
EP 19
칼은 몸이 아니라 맴으로 쓰는겨
“......자. 보십시오. 검을 매개체가 아니라 육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강체술사들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시키듯, 이 검에 마력을 투사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설진운이 커다란 체육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검이라는 개념에 한계를 두지 마십시오. 무엇을 들든 간에 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검을 검이라고 생각치 말고 내 팔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검에 혈관이 흐르고, 그 혈관을 타고 마력이 흘러들어가는 겁니다.”
헌터협회 부회장의 첫 수업이다. 나는 2층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시범을 보이지요.”
설진운은 저 멀리 놓여있는 마석을 향해 목검을 바로 쥐었다. 푸른 검기가 순식간에 치솟았고, 이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마석을 베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설진운은 바짝 얼어붙은 나를 힐끔 바라보고서, 지금껏 숨겨온 비밀을 토로하듯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네. 보시다시피. 검기가 마석에 닿으면, 우리는 원거리에서 마석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
"......즉. 마석의 위치를 안다면, 일검에 괴수를 제압할 수 있는 겁니다."
...헌터의 새로운 분류.
기사Knight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