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90화 (90/296)

EP 15 - 정치판 속 엑스트라 (4)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게 바로 정치가 사실판단이 아닌 가치판단의 문제인 이유였다.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잘못한 것 같아도, 지지자들은 무조건 한쪽 편을 든다.

그리고, 그게 정치인이 어지간하면 사과를 안 하는 이유였다. 보통 유감이라고 그러지.

그 어떤 문제라도, 사과를 안 하고 잡아떼면 그건 ‘문제’가 아니라 ‘사안’이 된다. 청산의 대상과 토론의 대상은 분명히 구분되는 거였다.

다시말해,

“충청방어선 임시 총사령관 김두식입니다. 우선, 국민 여러분께 크나큰 사죄의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사죄를 하는 순간 그건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 * *

내가 원옥분 정권에 제시한 문제는 세 가지였다.

예비군 왜 소집해제했냐.

길드 왜 작살냈냐.

추경안 1500억 어디로 삥땅쳤냐.

그런데 결론은, 원옥분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더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거였다.

다분히 국민의 자존심과 보상심리를 자극하는 개소리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일어나 혈압으로 놀라 자빠질 기적의 논리였지만, 잔뜩 독이 오른 언론이 기막히게 포장을 하니까 의외로 국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보통 대부분의 언론플레이는 이런 식이었다.

각종 포털 사이트 메인에 교수들과 전직 정치인들의 이름을 단 온갖 논평이 뜨고, 유튜브에 30초짜리 인터뷰 편집본이 하루종일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이 적어도 원옥분이 잘못한 게 있긴 하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는 심리다. 당연히 집에 불을 질렀으니 연기가 나는 거겠지만, 그건 국민들이 알 바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국군 내부감찰 결과 일부 사단장들이 군사자금을 착복한 게 확인되었습니다. 군부는 신속히 해당 사단장들을 군사법원에 회부한 상태이며, 이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충청 방어선의 영웅, 김두식 사령관이 직접 나와 고개를 숙인 게 아주 컸다.

내 인터뷰가 방송된 지 고작 6시간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다만, 한승문 의원이 지적하신 바와는 달리, 일선에서 횡령된 자금은 극히 미미하며, 국민의 혈세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디 정부에 신뢰를......”

해석 : 원옥분 대행님. 저 배신 안 때렸습니다.

김두식이 분명히 해명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언론은 원래 그딴 거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이었다.

[추경안 1500억, 똥별 사리사욕에 사용되었나?]

[김두식 사령관이 군 내부 횡령에 대해 인정했다.]

[칼을 빼든 한승문, 대선의 향방은 어디로?]

그리고, 김두식이 공식입장을 밝히자마자, 유재경 장관이 다급히 공식석상으로 뛰쳐나왔다.

“기획재정부 장관 유재경입니다. 우선, 이번 논란에 대해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먼저 전하겠습니다.”

그도 마찬가지로 대선주자였다. 대중적 인지도는 적었지만,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일수록, 세종시 정부청사를 이끌었던 유재경에 대해 아주 높은 호감을 품고 있었다.

물론 유재경 장관이 말재주가 좋거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뒷방 술자리에서 사람 꼬드기는 거면 모를까, 방송에서 어드벤티지를 얻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다.

“우선... 이번 추경안은 한 차례 전선이 안정된 상황에서? 군사시설을 보강하려는, 어, 그러니까, 기반 인프라에 투자하는 성격이 아주 강했습니다. 국제적 금융시장과, 달러인덱스가 사실상 마비된 지금, 대한민국에게 남은 건 실물경제, 즉, 펀더멘탈이기 때문입니다.”

[철조망 치는 데 1500억? 추경안의 실체를 파헤치다]

[유재경 장관이 국제금융시장의 종말을 선언했다]

[1500억을 들여 구상한 경제 청사진. 실상은 똥별 배불리기?]

“우리는 이미 한 차례 환차익을 노린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투기 광풍으로 인해 큰 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유가증권의 경제적 탄력성을 감소시키기 위해, 철저히 실물경제 위주의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키고자 합니다. 이번 추경안 투입은 군사시설 보강과 더불어, 국내 건설업계, 원자재 업계, 그리고 노동시장에 대한 낙수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에 1500억 투자. 장병들은 배가 고프다.]

[추경안 2조는 건설업계에 바치는 선물이었다]

[결국 또 낙수효과. 대체 언제까지?]

“재정적 탄력성이 극단적으로 요동치고, 사실상 국제적으로 화폐라는 것의 가치가 말소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돈의 액수로 그 가치를 직관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얼마나 꾸준히 간접자본을 업계에 투자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무역이 활성화될때까지 산업에 호흡기를 달고 버텨야 합니다.”

[화폐 시대의 종말, 이제는 물물교환?]

[구멍난 독에 물을 부어야 경제가 산다?]

[유재경 장관, 1500억 따위는 중요치 않다.]

“사실, 대한민국의 경제는 비교적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인 편입니다. 아직 무역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원 단위 화폐는 대한민국 안보의 영향을 받아 국제적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향후 마석사업을 통해 경기회복을 노릴 수 있으리라 전망하는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정부에 대한 신뢰, 화폐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낫다? 답보하는 정부.]

[무역없는 환율, 그저 단꿈에 불과하다.]

[대체 언제까지 신뢰‘만’ 요구하나?]

“물론 이번 추경안과 관련된 논란이 있음은 인정합니다. 다만, 국방예산의 쓰임은 국가보안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공개할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확언드릴 수 있는 건, 이번 추경예산이 횡령으로 얼룩지지 않고, 온전히 국방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세금은 잘 썼다. 자세한 건 비밀이다.]

[논란은 인정하나 해명은 않겠다.]

[가만히 있으라. 정부는 다시금 국민에게 말한다.]

*

- 재밌네.

“아, 아닙니다. 대행님! 한승문이가 개수작을 부리길래, 어, 어떻게 도움이라도 드릴 수 없나 해서 급하게 뛰쳐나갔는데, 본의아니게-”

- 유 장관님.

원옥분은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얼굴 근육이 일그러진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재경 장관의 고막에는 원옥분의 말이 또박또박 쑤셔 박혔다.

- 장난도 사람 봐가면서 쳐야지.

스피커 너머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누구 지시 받고 이러는거에요?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대행님!”

- 아니긴. 나도 정치하는 사람인데.

화를 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추궁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약간 무덤덤하고 일그러진 발음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두 가지 기능을 전부 수행했다.

- 한의원이야? 아니면 양의원? 그 양반도 요즘 여기저기 뒤적거리고 다니더만.

“주, 줄을 대다니요! 가당찮은 말씀이십-”

- 항상 그렇더라고.

원옥분은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 실수인 척. 충성인 척. 은근히 맥이는 종자들이 꼭 있어. 그리고 그런 양반들이 보면 가장 위험해요. 내가 그래봐서 알아.

“대행님...!”

- 똑똑한 양반이니 무슨 소리하는건지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대행님! 원 대행, 아니. 각하-”

ㅡ뚝.

전화가 끊어졌다.

유재경의 희끗한 뒷머리는 5분 남짓의 통화 사이에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유재경이 온 몸에 힘이 풀려 의자에 쓰러졌다. 피곤에 찌든 중년에게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귀신같은 노인네 같으니라고.

“이렇게 일찍 들킬 줄은 몰랐는데...”

원옥분도 청중엽 상대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뿐이지, 바보천치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를 공격한 건 한승문이었으나, 그 공격을 치명타로 바꾼 건 유재경과 김두식이다.

물론 대놓고 한 짓거리도 아니었고, 나름 이런저런 알리바이도 만들어 놓았었지만, 원옥분은 단박에 간파하고 날 선 경고를 보내왔다.

“......”

유재경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치미는 가운데, 강렬한 감정 하나가 사고를 방해했다.

두려움.

원옥분의 행보를 가장 옆에서 지켜본 게 본인이었다. 국방장관, 합참의장, 국정원장이 갈려나가는 걸 지켜본 것도 본인이었다.

쟁쟁한 정치원로들을 감히 기어나오지도 못하게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버리고, 국방당의 당권을 장악한 뒤 계엄으로 언론을 틀어잡고 교묘한 언플로 이미지를 유지했다.

그는 원옥분이 어떻게 스스로를 영웅으로 포장했으며, 그 과정은 얼마나 기민하고 과단성 있었으며, 그 행적은 어찌나 은밀하고 교묘했는지를 절실하게 느끼는 인물이었다.

본인이 그걸 도왔으니까 말이다.

허나, 원옥분에게는 모든 것을 떠난 태생적인 위압감이 존재했다.

태생적인 카리스마나, 그런 초현실적인 종류가 아니다. 이 위압감은 그녀의 출신성분에서 기인했다.

그녀는 검사檢事였다.

그것도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을 아울러, 항상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던 베테랑 검사였다. 만약 정계에 입문하지만 않았더라면 총장까지 눈에 들어왔을 실세 검사장이었다.

“......”

유재경은 안다.

대한민국을 뒤집은 거의 대부분의 금융사건이나,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섹스 스캔들, 심지어 임기 말 대통령의 가족비리까지.

전부 검찰청 캐비닛에서 튀어나오는 거다.

유재경은 이 70대의 검사가 대체 어떤 칼을 빼들 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고, 사상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과업을 앞둔 검찰이 얼마나 미친 짓거리를 벌일 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가 싫었다.

“......크흠!”

그러나.

“네, 유재경 장관입니다.”

- 어어, 유 장관. 신호탄을 쏘라니까 왜 핵폭탄을 쐈어 그래?

“아이고오! 양 의원님! 어째 방송은 잘 보셨습니까?”

해볼 만 했다.

*

“괜찮아요. 충분히 해볼 만 합니다.”

“닥치세요......”

“네.”

커다란 리무진을 타고 부산지검으로 가는 길, 건너편 소파에는 천금순이 넋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니, 널부러져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저건 사람이 아니라 파김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흐물거려요. 맥을 못 추네.”

“......아아, 당 떨어져......”

“저혈당 있어요?”

“쪼끔...?”

그녀는 옆으로 밀면 풀썩 쓰러질 것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사실 리무진이 그만큼 커서 옆으로 누울 수도 있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으니 차에서 눕지는 않는 거겠지. 내가 없었으면 또 모르겠다. 체면 차리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갈아타죠.”

“아, 네.”

우리는 부산에 진입할 즈음해서 리무진에서 나와 작은 K5로 갈아탔다. 검찰청 출두하는 데 리무진타고 가봐라. 그날로 욕을 바가지로 퍼먹겠지.

나는 아까 리무진 냉장고에서 챙긴 고급 수제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드실래요?”

천금순은 추욱 늘어진 채 아앙 하고 입을 벌렸고, 나는 조심스레 초콜릿을 그녀의 입에 넣어줬다.

그녀가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내게 눈을 흘겼다.

“이건 또 언제 훔치셨대...”

“훔치다뇨. 그냥 자연스럽게 챙긴 거지.”

“이거 제 초콜릿이잖아요. 아끼는 건데...”

“재벌들은 고깃집 박하사탕 주머니에 우겨넣는 이 심정, 절대로 이해 못할 겁니다.”

천금순이 피식 웃으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자기야. 좀 빙빙 돌아서 가자. 뭐 좋은 데 가는 것도 아닌데 엑셀을 밟아...”

“네, 사장님."

검찰청 출두하는 게 많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우리는 빼도박도 못하는 선거법 위반으로 소환된 거였으니 말이다.

“뭐, 집행유예밖에 더 받겠습니까?”

“......나 쌓아놓은 거 있어서 이번에 집유뜨면 빵 들어가요.”

“아 맞다.”

그녀는 지난번에 경제사범으로 봉사명령 받았을 때 스택 쌓아놓은 게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방긋 미소지었다.

“......뭐! 정부출범 특별사면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으니까!”

“.......선거 이기면 사면이고, 지면 깜빵이다?”

천금순이 모처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조곤조곤 따져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모르고 도와준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한승문이라는 주식에 투자했다고 생각하십쇼.”

“주식이 아니라 코인 같은데요...”

“승문코인이라... 어감도 괜찮네요. 떡상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

천금순은 가볍게 코웃음치고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코인을 조금 만졌어요. 한 92억인가?”

“어이구. 많이 버셨네.”

“꼴아박았을 거야 아마......”

“......”

*

지금 대법원장이 양판석이 대법관 시절에 법원행정처 꽂아준 동기고, 심지어 지난번에 같이 사법파동까지 일으켰던 사람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검찰이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고 지랄을 한들 큰 위력이 없을 것이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유롭게 검찰청 포토라인에 설 준비를 했다.

어떤 질문을 받을까. 뭐라고 대답을 할까.

맨날 대의원회 뽀찌로 수십억 꼴아놓고 군인들한테 치킨 준 걸로 유난이라던지, 치킨값 따질 시간에 1500억 토해내는 게 옳은 행동이라던지, 검찰이 정권의 멍뭉이가 되어버렸다던지.

인터넷을 뒤지며 기출문제와 예상문제를 싹 뒤져보고서 준비한 답변들이었다. 어차피 언론은 우리 편이니 크게 걱정할 거리도 없었고 말이다.

아무튼 검찰청 포토라인이야 레드카펫 깔아놓은 꽃길일 줄로만 알았다.

근데.

“청중엽 지사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는 사실 들으셨습니까!?”

“김조인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닷컴버블 당시 국민 혈세가 해외로...!”

“지지난 총선에서 성접대 의혹이...!”

불꽃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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