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 - 저건 우리집 미친개야 (2)
철컥.
부산광역시 지하벙커의 문이 닫혔다.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서슬퍼런 눈빛이 선글라스 속에서 나를 흩었다.
좌우로 도열해있는 그들을 사이로 지하 벙커의 길목을 이리저리 지나 깊숙히 들어갔다.
저벅. 턱.
저벅. 턱.
저벅. 턱.
어둑한 복도에 지팡이 짚는 소리 울려 퍼졌다.
복도 끄트머리에 철문이 보였다. 금속 탐지기를 든 요원이 가볍게 내 몸을 스캔하고서, 카드키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둑한 밀실 테이블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아, 왔군.”
넥타이도 안 갖춰입은 후줄근한 양복 차림의 양판석이 능글맞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김두식 사령관이 정복 모자를 건드리며 가볍게 목례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고급스런 넥타이 핀을 만지작거리던 청중엽 제주도지사가 활짝 웃었다.
“......반갑습니다.”
과로에 찌들어 반쯤 시체가 된 유재경 기획재정부 장관이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잘 지냈어요?”
“오랜만입니다, 대행님.”
“용케 살았네. 앉아요.”
원옥분이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곱게 늙지 않은 노인 특유의 어눌하게 흐려진 발음 속,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있었다.
* * *
유재경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 자리가 못내 부담스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장이 콕 콕 찔려오는 것 같았다. 솔직히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올 사람 다 오셨네요.”
원옥분 권한대행이 쇳소리로 회의 시작하자 그랬는데 화장실 가겠다고 하면 밉보일 것 같아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리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무탈해보이시니 참 다행입니다.”
“무탈한 세상은 아닙니다만.”
“이런, 실언이었습니다, 그래요.”
양판석과 원옥분의 화기애애한 대화다. 벌써부터 정치인들이 기싸움을 시작했다.
유재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좀 후달린다.
유재경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버텼다.
물론 그가 정말 후달리는 스펙은 아니었다. 기획재정부 장관이라는 건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없을 때 권한대행을 해먹는 ‘경제부총리’였으니까.
심지어 그는 원래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이었다. 한국대학교 경제학과 4년동안 수석해먹고, 5급 시험도 수석으로 뚫은 엘리트 경제관료다.
사무관 시절부터 1급 공무원들 앞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예산실장 시절에는 차관들과 도지사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예산을 허가해주는 위치였다.
근데. 실장으로 일하다 정신 차리니까 장관이다.
계승서열 남바 쓰리.
기재부 장관, 경제부총리.
차관이랑 장관이 싹 다 죽어서, 세종시 청사에 남은 실국장들 데리고 구르다 보니 어느새 장관이 되어 있었다.
아직 마인드는 1급 공무원인데, 경제 살리겠다고 개처럼 일하다 보니까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가 되어버렸다.
"원 대행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고맙네요."
“......”
물론 좋은 점이야 많았다. 세종시에 살던 가족들을 제주도로 보낸 게 대표적인 일이었다. 요즘 시대에는 재벌도 함부로 비행기 못 탔으니까.
근데. 여기 있는 양반들은 소위, ‘급’이 달랐다.
“리충빈 상장이라...... 중군위 들어가기 전에는 선양군구 대사령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형적인 정치장교였는데...”
김두식 사령관이 막연히 이름을 중얼거렸다.
차재균 사건 당시 한승문 의원을 구출하고, 무너진 서울 포위망에서 마구잡이로 후퇴하던 병력을 재편성시켜서 충청도의 북부 방위선을 형성한, 현 국군의 명실상부한 1인자였다.
“군부 입장입니까? 주석 입장입니까? 이런 건 신중하게 짚고 넘어갑시다.”
양판석 의원이 느물거리며 물었다.
통칭 킹 메이커. 광주맛 너구리. 온갖 정치공작으로 대선과 총선을 연달아 승리시키며 민주당 차기 당대표로 반쯤 내정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또, 지난 한승문 내란죄 관련 사법파동을 주도하며 삼권분립의 일각인 사법부를 쥐고 있음이 암암리에 알려졌다.
“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이 중국 국가원수니까... 부주석이 말한 거면 주석이 남 입으로 말한 거나 마찬가지죠.”
“확실합니까?”
“제주도에 중국 사람 많이 삽니다.”
“중국 쪽에 정보원이 있으셨을 줄은 몰랐는데요.”
“하하...”
청중엽 제주지사가 사람좋게 웃으며 자기 정보원을 숨겼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재벌들과 온갖 기업들, 심지어 각종 정부 청사마저 제주도로 이전하며, 대한민국 상류층을 자연스레 대표하게 된 사람이다. 제주 정치권 특유의 콘크리트를 기반으로 사방에 영향력을 뻗어나가는 한국 정치권의 새로운 잠룡.
“그나저나 한 의원님, 오시는 길은 괜찮으셨습니까?”
그리고 그런 잠룡이 자기보다 30살 어린 사람에게 설설 기었다. 청중엽 제주지사가 한승문 의원에게 달라붙었다.
“아, 네. 보내주신 헬기 덕분에...”
“하하, 기업인들이 가지고 있던 거 징발한 겁니다. 그나저나 강원도 북부에 고립되셨다면서요. 혹시 제주도로 오실 의향이...?”
“회의 끝나면 돌아가 봐야죠. 가족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민생을 참 끔찍이도 생각하시니... 아이고. 제 아들이 의원님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보고 있으면 참......”
“하하......”
“허면 헬기는 의원님께서 사용하시지요. 앞으로도 쭉.”
“예...?”
“사양말고 받아주십시오. 저야 도지사라 지역구 챙기는데 급급한지라 어디 나가지도 않습니다. 한 의원님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둥 아닙니까?”
청중엽 제주지사가 넉살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남들 앞에서 침 바르는 거였다. 아주 노골적으로.
“장차 공사가 다망하실 터인데 조금이라도 보태드리고 싶은 거니까, 크게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다 애국 아니겠습니까?”
청중엽 지사는 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었고, 정치인 중에서 손꼽히는 미중년이었지만, 20살이나 어린애한테 자꾸 집쩍거리는 모양새는 유재경이 보기에도 살짝 거슬렸다.
그러나 문득 유재경은 떠올렸다.
이 새끼 28살 맞나.
“이렇게 뜻깊은 선물을 저 혼자만 타고 다니는 건 조금 아까운데요. 이런 자리 생기거나, 정무적인 일로 지사님 찾아뵈러 갈 때 빼고는, 국군 장병들이 피난민 구조할 때 쓰시라고 맡겨놓아도 괜찮겠습니까? 지사님?”
“아! 그럼요! 괜찮습니다!”
“항상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사님.”
혼자 먹으면 배탈날 것 같으니까 군용 방수포로 덮어놓겠다는 소리였다. 기름도 그쪽에서 충원하고.
한승문은 지금 공익 들이밀어서 적당히 자기 체면 살리면서, 선물 삐뚤어지게 받아서 상대방이랑 애매하게 거리 좀 두고. 또 애매하게 감사하고.
마침 김두식 사령관도 옆에 있으니까 군인들한테 헬기 맡기겠다는 뜻을 전했다.
처신 잘하네.
“......”
지금쯤 제주도에서 지 엄마한테 히스테리 부리고 있을 딸이랑 동갑인 녀석이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유재경은 살짝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압구정 탈출, 한승문 재단, 차재균 실각, 합당 폭로, 국민당 창당, 각성 촉진제 개발, 셀프 생체실험, 그리고 흑산양 토벌까지.
이 놈은 업적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정치인이었다.
피선거권도 없는 놈이 대선 지지율 19% 뜬 날, 유재경은 집구석에서 마시던 맥주를 메리야쓰에 줄줄 흘렸다.
아직도 한승문이 찾아와서 재벌들한테 갑질하라고 한 기억이 생생하다. 설마 그게 GS 그룹 창설의 설계였을 줄이야.
유재경은 기껏해야 내부자거래나 재벌해체 정도를 생각했지, 한국 재계를 처음부터 뜯어고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금 청중엽 제주지사가 재계에 손을 뻗친 이유가 뭔가. 재벌들이 그때 자기들끼리 대판 싸우고, 지분구조고 회사연결이고 죄 키메라같이 되어버려서 서로 뭉칠 수가 없어졌기 때문 아닌가.
그래서 제주도 사는 재벌들이 청중엽에게 의탁...
...!!
그러고보면 청중엽이랑 한승문 둘 다 국민당이었다. 각각 당대표랑 원내대표로 점쳐지는 인물들이고.
청중엽은 대통령 후보...!
서, 설마...!
하, 한승문. 도대체 어디까지...!
유재경은 짐짓 한승문을 노려보았다.
“? 무슨 일이신지...”
“아, 아닙니다. 많이 피곤해보이셔서요.”
“아, 네... 유 장관님도 노고가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이지? 원옥분 밑에서 고생하지 말고 넘어오라는 건가? 아니면 어차피 살리지도 못할 경제 잡고 헛고생한다는 뜻인가?
유재경이 포커페이스를 깔고 속으로 식은땀을 흘릴 무렵,
“인사는 다들 나누셨습니까?”
원옥분이 까칠하게 회의 본론에 들어갔다.
“일본 쪽에서도 인사를 전해 오더이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자리했다.
*
“반갑, 습니다.”
새로 들어온 인물은 자유민주당의 간사장, 요시무라였다.
그리고 자유민주당이 전후戰後 수십년에 달하는 일본 현대정치사에서 정권을 놓친 기간은 10년도 되지 않았다.
하여 일본도 사실상 자민당 일당독재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당 서열 2위가 우리에게 왔다는 건 중국이 한 짓거리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는 서툰 발음이었지만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에... 또... 츄웅국 측의 다소 급진적인 동맹 제안에 대하여서. 한국 측 또한 상당한 정치적 고심을 이어가고 있으리라는 총리대신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동북아의 화평이 달린 일이고, 여러 공안안보 문제에 관한 사안이니만큼, 이욷으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합미다. 이에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원, 옥, 분, 권한다이행께 허락을 구하고, 삼가 자리하게 되었스, 읍니다. 안녕하세요.”
해석 : 안녕?
이정도면 외국인 치고는 상당했다. 하기야 귀에 이어폰을 끼거나, 옆에 통역사를 데려올만한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활짝 미소를 만개하고서 조심스레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리고,
원옥분이 본격적으로 회의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중국에서 원한 게, 감지윤 헌터를 비롯한 우리 초능력자들을 파견시켜달라. 이거였지요? 원전 56개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말은 했지만...”
김두식 사령관이 말을 보탰다.
“중국 육군이 그리 쉽게 밀릴만한 곳은 아닙니다. 현재 피해야 물론 크겠지만, 원전 터지면 중국도 위태로워지는만큼, 아마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막아낼 겁니다.”
[앞마당 터지면 좆되는데 안 막겠냐?]
양판석이 의표를 찔렀다.
“무조건 감당해야 할 피해라면, 그리고 그 피해가 동북아시아 전체에 관한 것이라면, 같이 감당해달라 이거군요.”
[같이 좆되달란 거 맞지?]
“네.”
유재경 장관이 말꼬리를 흐리며 지적했다.
“......그게 진의는 아닐 것 같은데요. 아마 한국이 해주길 원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감지윤 양이 산을 들어올릴 정도니까, 인명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는 건 맞는데...”
[중국이 사람 살리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나라는 아니잖아.]
"네, 뭐. 다소 위신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 국민 살리겠다고 나라 체면 구기는 나라는 아니지.]
중국통 청중엽 제주지사가 태연히 웃었다.
“제 생각에는 그거 우리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
“자기 나라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죠.”
제주도는 중국과 교류가 많았고, 청중엽 지사는 중국 쪽 꽌시가 존재했으며, 덕분에 이런저런 잡정보를 모아 대충 그림을 그린 상태였다.
“중국이란 나라는 인명피해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인구 밀집도 심하고, 도시 슬럼도 심해서... 지금쯤 수천만 이상이 죽었을 겁니다. 자연스레 중국 공산당에 대한 신뢰도도 대폭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군이 아니라, 공산당의 당군이니까요. 책임 소재가 중국 공산당에게 있습니다.”
청중엽은 중저음의 당당한 목소리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어둡고 조용한 회의실의 분위기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당당하고, 위대한 중국 정부가, 군부의 상장이, 타국에 고개를 숙이며, 고작 어린애 하나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아, 물론 우리야 어린애가 아니라, 귀중한 인재고, 소중한 국민이지만, 중국 입장에서야 그렇다는 거지요. 한승문 의원님의, 네. 아무튼.”
“......”
“우리가 이걸 거절한다면, 중국 내부 여론이 어떻게 번지겠습니까? 원전 56개 터지기 직전인데 초등학생 하나 안 보내주는 타국을 말입니다.”
“......”
“이거 프로파간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