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32화 (32/296)

EP 7 - 북풍北風 (3)

다크써클.

부스스한 머리.

침울하고 탁한 눈동자.

떨리는 손.

더듬는 말.

비틀거리는 발걸음.

그게 내가 아는 피채원이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불쌍한 소녀.

그런데 이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피채원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우리 집 현관문에서 거친 숨을 가다듬고 있다. 꼬질꼬질하고, 피곤에 찌들어 보인다.

“표정이 많이 좋아졌네.”

단, 그녀의 눈빛만은 앳된 얼굴에서 이전에 없던 총기를 빛내고 있었다.

“......제 후견인이 되어주신다고 하셨나요?”

“그랬죠.”

그녀가 내게 당돌하게 들이박았다.

“딱 한 번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도와주세요.”

* * *

나는 피채원을 집 안에 들였다.

경기도 북부 계엄사령부에서 경상남도 통영까지. 도로도 거진 다 막혀있는 마당에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가 의문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만큼 어떻게 알아서 잘 찾아왔겠지. 멍청한 질문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으음, 갑작스레 찾아와서 조금 당황스럽긴 한데.”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학생이 먼저 용기를 냈으니까,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네."

"일단 이거부터 받어."

나는 녀석에게 수건 한 장을 안겨줬다. 녀석은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며 이게 뭐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욕실은 저어기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두 번째 방이에요.”

“......네?”

“밥 차릴 테니까, 일단 씻으라고요.”

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꼬질꼬질해가지구.”

"!"

*

꾹 눌러담은 보리밥에선 모락모락 새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농어회 몇 점을 집어 올려주었다.

“이게 그, 농어라는 생선인데. 주나라 황제가 이거보고 끗빨 개꿀 천하통일 각이라는 말을 했어요.”

“......네?”

“그래서 그런가 밥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더라고.”

마! 이거 함 무바라! 디진다 아이가!

냠. 나는 여러 가지 밑반찬을 꺼내 피채원의 접시 위에 퍼부었다. 녀석은 당황스러운 눈치로 어색하게 내가 건넨 반찬들을 다급히 집어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보다. 하기야 맨몸으로 국토대장정을 한 마당에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을 수는 없었겠지.

피채원은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 모습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미래시未來視가 밥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까 말이다. 아이구 복덩이야.

“야, 씨, 애 체하겠다.”

심심했는지 여도연이 토끼모양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와 식탁에 자리했다. 그녀는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한 입만.”

심심한 게 아니라 야식이 땡겼던 모양이다. 나는 여도연의 입에 와사비 듬뿍 바른 농어회 몇 점을 쑤셔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도와달라는 거에요?”

“......”

역시 알려주지 않는군. 나는 떠보기를 그만하고 헤헤 웃었다.

“아, 물어보지 말라고 했나?”

피채원이 강북에서 연락도 없이 직접 여기까지 온 거라면, 뭔가 예사롭지 않은 사건일 것임이 분명했다.

특히, 직접 왔다는 게 수상하다.

설마 핸드폰이 없어서 연락을 못했다는 헛소리는 아닐 터이고, 그렇다면 전산망에 기록이 남으면 안 될 용건이라는 뜻인데.

고등학생이 전산망이랑 기록까지 고려하게 될 상황이라면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혹은 불법적이고 은밀한 일이거나.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녀석이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괴수, 에 관한 일이에요.”

“뭐요?”

“의원님이, 믿을만한 헌터들을 데리고서, 저랑 같이 강북으로 가주실 수 있나요...?”

말은 살짝 어색했지만, 용건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하지만 아직까지 썩 내키지는 않는다.

피채원이 미래를 본다 한들 완전히 신뢰하기 힘든 것도 있고. 전후사정을 알지도 못하는데 이 녀석의 판단을 믿을 수는-

“......철이 아저씨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철이 아저씨.

감 철.

감기자.

......그러니까. 감기자랑 얘가 뭔가 사건에 휘말렸고, 그 와중에 내 은밀한 조력을 필요로 한다. 이건가.

감기자의 판단이라면 썩 믿을 만하다. 일단 이 문제는 넘어가자.

“믿을만한 헌터들을 데리고 가달라는 건, 무력을 쓸 상황이 나온다는 건가?”

“......아마도요.”

“그러면 굳이 여럿을 데려갈 필요가 있나.”

나는 밥그릇을 입에 대고 즉석 회덮밥을 퍼먹고 있던 여도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까칠한 반응이 돌아왔다.

“......뭘 봐?”

“좋아서.”

“아, 진짜...”

내게는 이미 좌청룡 우백호가 있지 않은가.

*

“그러고 보면 청룡이 아니라 주작인가?”

“응?”

“아녀, 아녀.”

나는 차를 몰고 방송국 인근 도로를 빙빙 돌았다. 뒷자리에 여도연과 피채원을 태운 상태였다. 여도연이 문득 말했다.

“야, 의원이 비서 태우고 운전하는 거 좀 이상하지 않냐?”

“지가 비서라는 자각은 있나보지?”

여도연이 뜨끔한 표정으로 눈을 깔았다. 어제 7급 비서 월급을 받은 참이다.

“글쎄, 내가 운전한다니까......”

“면허가 있긴 있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같이 땄잖아. 멍청아.”

“아니, 장롱 속에 꼭꼭 숨겨두니까 있는지도 몰랐지.”

“......”

“아무튼 어디가서 그런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누나 면허는 소주 살 때나 내미는 거야. 알아?”

백미러로 본 그녀의 표정은 흉악한 마귀가 따로 없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사람 하나 담구기 직전의 깡패라고나 할까.

아무튼 정신건강에 해롭다.

운전대 놓는 순간 맞아 죽을 게 분명하니, 나는 주차를 안 하고 일부러 방송국 주변을 빙빙 돌았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인상.

아메리카노.

베이지 색 롱코트.

머리카락 끝자락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마력.

무표정의 홍선아는 싸늘한 시선을 주변에 던지며 도심 속을 헤매이고 있었다.

나는 그 차가운 도시여자 옆에 붙어 짧게 경적을 울렸다.

- 빵 !

“히양!”

나는 차 창문을 내리며 그녀를 불렀다.

“오랜만입니다 홍선아 씨.”

“아! 놀랐잖아요!”

“타시죠.”

그녀는 심통난 표정으로 조수석에 올랐다. 그리고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어머! 도연이 언니! 오랜만이야앙...!”

넉살도 좋다. 홍선아는 부러 목소리를 반쯤 울먹이며 여도연의 손에 깍지를 끼고 흔들었다.

“......어어. 오랜만.”

여도연은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았지만 나는 저게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저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홍선아는 옆에 있던 피채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어라! 친구도 안녕? 언니는 홍선아! 선아 언니라고 불러!”

“아, 아아, 네......”

찐따 두 명 사이에 인싸 하나가 끼니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나름 인싸였던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왠 코트입니까? 늦여름이긴 해도 아직 더운데....”

“저 더위 안 타요!”

홍선아는 내 뒷목을 덥썩 붙잡았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뭔가, 덥긴 더운데 더운게 덥지가 않다.

더위가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오묘한 기분이다. 홍선아가 손을 떼자 다시금 더운 게 덥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홍선아 씨.”

“녜?”

“여름에는 저랑 손잡고 다니실래요?”

“한의원님이랑 손잡으면 트라우마 생각나서 안 잡을래요!”

홍선아는 실실 웃으며 반농담을 내뱉고 안전벨트를 매기 시작했으나, 나는 그 반농담을 골똘히 되내었다.

어둡고, 숨막히고, 순식간에 다가와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는 붉은 안광들.

신분당선.

홍선아와 손잡고 빠져나온 길이기는 해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이었다. 특히 하수도 뚜껑에서 튀어나온 게 내 발목을 붙잡았을-

“그나저나 어쩐 일로 부르신 거에요?”

“......아.”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홍선아에게 용건을 말했다.

“입 무겁고, 믿을만한 헌터가 하나 필요해서요.”

“아, 저네요!”

홍선아의 즉답이 튀어나왔지만, 백미러로 본 뒷좌석 두 녀석의 표정은 그리 미덥지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홍선아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은밀하고 무력을 요하는 일이라면, 소수 정예로 가는 게 딱이다.

큰 놈 하나 잡을거면 여도연으로 충분하고.

작은 놈 여럿 잡을거면 홍선아가 최고다.

물론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칠 거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확인을 받기로 했다.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채원 양은 홍선아 씨 알아요?”

홍선아는 나름 유명인사였다. 얼마나 강한 지는 대충 알겠지. 피채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정도로 충분한가?”

마찬가지로 피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강북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

“아이고, 고생하십니다.”

“충성! 허가증 확인 도와드리겠, 아, 의원님!”

“길드 관련으로다가 괴수 때려잡으러 가는데. 군사도로 좀 써도 됩니까?”

“아, 넵!”

병사가 손짓하자 차단봉이 올라갔고, 우리는 무난히 군사용 도로로 진입했다.

일반도로를 이용했다면 고속도로에서 어기적거리며 하루는 꼬박 잡아먹었겠지만, 군사도로는 가끔 탱크랑 트럭 지나가는 것만 빼면 차가 막힐 일이 없었다.

어디보자. 여기서부터 경기도 북부까지 안 막히면.

“대충 여섯 시간정도 걸려요.”

“음악 틀어도 되나요!”

“안 됩니다.”

나는 블루투스로 차량에 김광석 2집을 틀었다.

“제가 좋아하는 거 틀을 겁니다.”

‘사랑했지만’의 울적한 전자피아노 전주가 들리기 시작했다.

크으...! 나는 분위기에 취해 걸쭉한 탄성을 내질렀다.

여도연이 저 새끼 또 시작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고, 피채원은 이게 누구 노랜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달픈 후렴구의 비브라토가 들려올 무렵, 홍선아가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승문 씨, 이런 사람이었구나...?”

“뭐요.”

“아니에요. 그냥......”

홍선아는 찝찝하게 말을 끊었다. 나는 텅 빈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왜 방송국으로  태우러 오라 한 겁니까?”

“아! 맞다! 저 TV 나옴!”

“예?”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화장이 잘 먹었다 싶었는데. 전문가의 손을 거쳤던 모양이다.

“섹션티비 연예통신!”

“......아니, 거기를 왜?”

“뭐요! 저는 그런 데 나가면 안돼요?”

“홍선아 씨가 탤런트는 아니지 않습니까.”

홍선아가 나를 징그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 탤런트요?”

“예?”

“아, 아뇨. 단어선택이 되게 성숙하시다 싶어서...”

“지금 저보고 노티난다는 겁니까?”

“안 그랬는댕.”

“원래 부산 사람들은 다 탤런트라고 그럽니다!”

눈을 감고 있던 여도연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런다.”

“누나 자는 거 아니었어?”

“누나 안 잔다.”

홍선아가 깔깔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괜찮아요! 스물 여덟이면 충분히 늙었으니까!”

“저 스물 일곱인데요.”

“그거나 그거나!”

백미러로 들여다 본 여도연(28세, 비서)이 순간 움찔했지만, 나는 그 처량한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홍선아 씨는 요새 뭐하고 지내셨습니까?”

“으음, 괴수도 잡고, 맛집도 돌고, 괴수도 잡고, 춘식이 아저씨 술상무도 하고, 괴수도 잡고, 예능도 나가고...”

“예능도 나갔습니까?”

홍선아가 불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헌터는 방송 나가면 안돼요?”

“연예인은 아니시잖습니까.”

“외모는 연예인인데?”

“언제부터요?”

“태어날때부터?”

강적이군.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운전을 계속했다.

홍선아가 문득 별 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정치인이 방송 나가는 거랑 비슷한 이치 아닐까요?”

자기도 언론플레이로 재미 봐놓고 나는 안 되냐는 소리였다.

날카롭게 찌르는군. 실제로 홍선아는 워낙 화려한 능력과 외모, 그리고 말빨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긴 했다.

내가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게 그것이었고 말이다.

괜히 헌터들을 탐내는 아귀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이 바닥에 대한 영향력은 오롯이 내 손아귀에 있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홍선아라는 사람은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쉬운 캐릭터였다. 자연스레 내가 그녀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으음. 헌터들이 수행하는 직무가 사실상 공무에 가까우니까요. 홍선아 씨야 딱히 걱정할 거리는 없지만, 다른 헌터들은......”

“흐음...”

“뭐어, 기자들 혓바닥이 워낙 교묘해야죠. 괜히 헌터들한테 프레임 씌우고 지네 이득 차릴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셨으면 좋겠고, 걱정이 된다. 이 말입니다.”

홍선아는 게슴츠레 뜬 눈을 내게 흘겼다.

“우리 의원님, 의외로 소유욕이 조금 있으시네요?”

젠장. 눈치도 빠르긴.

그녀는 내 팔뚝을 꼬집는 시늉을 하며 방긋 미소지었다.

“라디오 틀어주면 방송 줄일게요!”

“틀으세요.”

“아싸!”

달칵.

- .....헌정질서를 수호하고자 결의하는 바이며, 즉각적으로 이를 국회에 통고하는 바입니다.

나오라는 노래는 안 나오고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 이에 헌법 제 77조에 의거하여, 본 시간부로 경기도 일대에 대한 경비계엄을 선포합니다.

대통령 권한대행 원옥분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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