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6화 (16/296)

EP 4 - 큰 그림에는 큰 붓이 필요하다 (4)

미칠 듯한 갑질을 일삼은지, 3일이 지났다

“......괜찮군요.”

“감사합니다.”

“의외로 법조계에도 조예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별 말씀을요.”

차재균이 내가 내민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나저나 왜 이름을 이렇게 지으셨습니까?”

‘괴수피해복구재단’

솔직히 살짝 이상한 이름이다.

“제가 작명센스가 별로 없어서......”

한승문이 만든 재단에 한승문 재단이라고 이름 붙여놓으면 너무 속보이잖아요.

“아, 그렇습니까?”

“그래서 가장 직관적으로 정했습니다.”

이름 복잡하게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한승문 재단이라고 불러주지 않을까요?

*

“부산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후우. 나 혼자만 이리 오니 마음이 무겁군.

“지금 웃고 계신 것 같은데요.”

-방금 손녀 만났네.

“축하드립니다.”

양판석 의원이 강원도 쪽 육로를 통해 부산에 도착했다. 강북에서 구조된 정치권 인사들과 함께였다.

-일단 부산 시장이랑 쇼부를 쳤어. 현재 공화당 대권주자 1순위인데, 대충 우리랑 코드가 맞아.

“어떤 사람입니까?”

-머리가 굳었는데 귓구멍은 뜷렸어.

“대충 알겠습니다.”

-나중에 좋은 자리 만들어주겠네. 그건 그렇고.

양판석의 기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단 건은 어떻게, 차차관이 컨펌을 냈나?

“성공했습니다.”

- 잘됐군!

전화기 너머 양판석이 쾌재를 불렀다.

-자잘한 건 신경쓰지 말게. 이 동네는 물가 오른 거에만 관심이 있지, 자네가 뭘 하든 썩 개의치 않을 거야.

“그렇습니까?”

-기름값 폭등한 게 더 문제야. 아랍에서 석유를 끊었어.

바닷길이 막혔다.

-다행히 정부청사가 세종시에 있어서 중앙정부가 망하지는 않을 것 같아. 실국장들이 어리버리 타면서 버티고 있긴 하더군.

“불행 중 다행이군요. 일단 여기도 변호사랑 야매 노무사가 있어서 와꾸는 대충 기워붙였습니다. 계엄사령관 권한으로 일단 뭉개봐야죠.”

-당장 입법을 돌릴 수가 없으니 원...... 일단 내 쪽에서 공화당에 접촉하겠네. 쓸데없이 물어뜯으면 재미없을 줄 알라고.

“의원님 덕분에 든든합니다.”

-참, 내. 자식새끼들보다 자네랑 통화를 더 많이 하는군. 육시럴 놈들이 이미 유산 분배까지 정해놨더만. 내가 살아오니까 오히려 심드렁해.

뭐어. 너구리같은 양반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내가 이 할아버지를 걱정할 짬은 아니었다.

*

차재균은 그 날 이후로 나를 종종 호출했다.

“재단에서 운영할 사업체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도로망이 마비됐는데......”

“참치캔 하나가 7만원......”

그는 나를 무슨 아이디어 뱅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원은 협의 중이고, 근시일 내로 사업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서울 북부에 연구소 하나만 징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군대가 사용할 도로만 지정해서 출입 통제하시죠. 탱크랑 소나타가 도로 같이쓰는 거 보고 기겁했습니다.”

“대형마트에서 생필품들 징발해서 무료로 풀어버리면, 누가 참치캔을 7만원에 사겠습니까? 어차피 훔쳐갈텐데 그냥 뿌리시죠.”

나는 종종 군사 외적인 것들에 도움을 주며 그와 친해졌다. 정확히는 신임을 받았다.

땅 못 준다는 동두천 시장을 찾아가 정치논리로 그를 설득한다던가. 이따금 찾아오는 기자들에게 대신 봉투를 뿌린다던가.

“......2기갑여단 98전차대대의 오폭으로 민간인 여섯이 죽었습니다.”

“국군 현황에 대해 긴급 기자회견 한 번 하겠습니다. 관심은 확실히 끌리겠죠.”

“......보상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심지어 검은 일도 종종 맡았다. 어차피 양판석 의원 보좌관 할 때도 검은 돈 종종 날랐으니, 딱히 꺼림칙하지도 않았다.

단 하나 문제는,

“......즉시 전력으로 삼을 수 있는 헌터들이 없군요.”

“국정원이랑 보안사에서 아직도 못 찾았습니까?”

“의외로 초능력자들의 수가 적은 모양입니다.”

차재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 쉬었다.

고아원 설립은 순조롭게 준비 중이나, 미성년자들에게 마석을 먹인 다음에 즉시 전쟁터로 보내는 건, 정말 막장 짓거리였다.

공사판이면 몰라도. 아무튼.

“차관님, 아무래도 우리 예상보다 초능력자가 희귀한 것 같습니다.”

“......감지윤 양, 여도연 양, 천화란 씨, 그리고 한 의원님. 한 일행에서 초능력자가 4명이나 나왔는데도 말입니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저희는 게이트 열릴 때, 바로 아래에 있었습니다.”

“......허면,”

“기이한 현상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기이한 힘을 가지게 된다. 썩 괜찮은 추측 아닙니까?”

우리는 한참동안 초능력자 수급방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내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미 고아원이라는 공급책을 내가 장악한 만큼, 다른 루트가 뜷리면 내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정치든 사업이든 독점이라는 게 참 중요하다.

*

생활관 침대에 누워 따듯한 모포를 덮고 천장을 꿈뻑꿈뻑 쳐다보고 있었으나, 사실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문 뒤에서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그 시퍼런 원숭이 새끼의 시뻘건 눈동자가 기억나기도 하고.

살짝 무서울 때가 있다.

나는 생활관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천화란은 오늘 연구소로 쓸만한 장소 알아보러 나갔고, 대신 감기자가 자식들을 둥기둥기하고 있었다.

물론 감지윤은 허공에서 아빠를 피해 날아다니고 있다. 이제는 감기자가 못 잡아챌 정도로 빠르게 날아다닌다. 솔직히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조만간 언론에 초능력 썰 풀어야 하는데 그것도 참 걱정이다. 이미 각종 동영상들 때문에 떡밥은 많다.

이호정은 살짝 마르고 체력도 약한 타입이라서, 3일 밤샘 야근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양일호는 내가 맨날 이렇게 부려먹은 적이 많아서 그나마 좀 나은 모양이다. 녀석은 TV 앞에서 리모콘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모콘이 먹통인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꾹꾹 누른다. 자세히 보니 리모콘을 거꾸로 쥐고 있다. 미친놈인가.

아무튼 다들 정상은 아니다.

쪼옥. 나는 여유롭게 야쿠르트에 꽂은 빨대에 입을 대었다. 몸에 설탕이 들어가니까 이제 좀 살겠다.

“살만 하냐?”

여도연이 작게 혀를 차며 침대맡에 앉았다.

“누나.”

“뭐.”

“야쿠르트 하나 더 갖다달라고 하면 때릴거야?”

여도연이 깍지 낀 두 손으로 명치를 때렸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툭 친 수준이었다.

“......앞으로 어떡하지.”

그녀가 문득 시무룩하게 읊조렸다. TV에서는 서초구에서 대규모 가스폭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사실 나도 이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짐짓 심드렁하게 허세를 부렸다.

“저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정치인은 권력을 잡으려 최선을 다하고.

사실 이 와중에 권력 잡으려고 이 지랄을 하는 게 살짝 찔리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세상 멀쩡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아프리카랑 어디 내전지역에서 수십 수백명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나는 멀쩡하게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았었는가.

죽음이 눈앞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문득 감기자와 천화란이 조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대 나와서 종군기자로 내전지역까지 가지 않았는가. 천화란도 의료봉사하러 갔고.

어쩌면 그들이 나보다 세상에 더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정작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나라는 건, 살짝 골계적인 아이러니였다.

나는 여도연을 툭툭 쳤다.

“뉴스 말고 예능이나 틀자.”

“그게 이 와중에 하겠냐?”

“케이블 재방송.”

“너는 이 와중에 그게 보고 싶냐?”

“아, 좀, 머리 복잡해. 예능 보고싶어......”

나는 심심한 나머지 이빨을 까기 시작했다. 오랜 습관이었다.

“수사물, 정치물 좋아하는 애들이 부모님이 이상하고 수준 낮은 막장드라마 본다고 욕하잖아.”

“어.”

“근데 그건 어른들이 현실에서 정치물을 찍고 있어서 그런 거거든. 그러니까 지쳐서 드라마에서까지 복잡해지고 싶지는 않은 거지.”

“어.”

“지금이 딱 그래. 개같은 상황인 거 누가 몰라? 그러니까 TV에서까지 ‘우리 좆됐습니다’ 소리 듣기는 싫은 거라고.”

“어.”

“그러니까 예능 좀 틀어.”

“니가 직접 틀으세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이건 좀 노린 멘튼데.

그때,

“의, 의원님...!”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피채원이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어, 학생. 무슨 일이야?”

피채원은 생활관 내부의 암묵적인 취급주의였다. 매일 구석에 쪼그려앉아 스마트폰으로 멍하게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다.

심지어 배터리가 다 닳아 폰이 꺼졌는데도, 멍하게 텅 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가족을 잃은 게 확실했다.

안 그랬다면 지금쯤 파주와 양주 길거리를 헤매이며 피난민들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 나섰을 테니 말이다.

사실 몰래 마석을 대본 적이 있다. 흡수할 수 있으면 케어해주려고 말이다. 그런데 딱히 그렇지도 않아서 그냥 놔뒀는데.

피채원이 처음으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심지어 떨리는 동공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치, 침대 아래. 침대 아래로 숨으세요...!”

“으, 으응?”

“다들 창문에서 비켜요!”

“하, 학생? 괜찮은-”

“ 빨리-! ”

얘가 미쳤나. 분노조절 장애처럼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우리한테 악을 지른다. 다들 살짝 질린 표정으로 창가에서 멀어졌다.

문제는 난데. 내가 창가 쪽 침대를 쓰고 있어서 바로 비킬 수가 없다. 그래도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으악!”

피채원이가 다급히 나를 끌어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프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땅을 짚었다.

“아니! 학생! 지금 이게-”

“숙이세요!”

이 녀석이 나를 덮쳤다. 키도 작고 어깨도 좁고 근육량도 적은 장애인은, 고작 여고생 하나의 근력을 이기지 못하고 밑에 깔려버렸다.

아이고 내 신세야.

- 펑 !

굉음과 함께

창문이 깨지고 화염이 밀려들었다.

온갖 파편이 빗발친다.

뜨겁다. 진짜 영화에서나 보던 불덩이다.

다행히도 폭발은 금세 가라앉았다. 다행히도 우리 방은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피채원이는 혼절한 모양이다. 등쪽 옷이 전부 불타고 심한 화상을 입었다.

여도연이 잽싸게 불붙은 옷가지를 찢어버리고서, 조심스럽게 추욱 늘어진 녀석을 들고 멀쩡한 침대에 거꾸로 눕혔다.

나는 멍하니 누워있다가 감기자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있던 침대를 힐긋 보았다.

침대는 바싹 녹아내린 상태였고, 커다란 쇳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나는 상처입고 기절해버린 피채원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얘 아니었으면 지금 죽었다.

*

“......98 전차대대 오폭사고로 죽은 사람들 중에, 헬기 조종사 딸이 있었다고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뇨. 사과받으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차관님 방식이야 저도 지지하고 있으니까요.”

이 양반. 터프하게 일처리하더니 벌써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완전히 차관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기도 한데.

아, 모르겠다.

헬기 조종사가 계엄 사령부에 들이박았다. 홀애비였던 사람이 딸이 죽으니까 눈이 뒤집혔단다.

다행히도 우리 방이 폭심지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서 망정이었지, 잘못하면 떼죽음이었다.

피채원이 날 대피시키지 않았어도 즉사였고 말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저어, 의원님?”

차관실에서 나오자 앞에서 기다리던 감기자가 쭈뼛거리며 말을 붙였다.

“아, 애들은 괜찮습니까? 다치지는...”

“네, 다행히도 괜찮습니다. 지윤이가 불을 막아줘서......”

“벌써 염력으로 방어막까지 만든 겁니까?”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감기자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으, 제 직업상, 제가 사소한 기억력이 조금 좋습니다. 살짝 걸리는 게 있긴 했습니다만, 제가 잘못들은 것 같아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시길래......”

“그 피채원 학생 말입니다. 옥상에서 구조되고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의원님께 감사를 전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랬지요.”

“잡아줘서 고맙다고 안 그러고

열어줘서 고맙다고 그랬습니다.”

“......”

“그 학생이 어떻게 의원님이 문을 연 걸 압니까?”

......쓸만한 도구가 하나 들어왔다.

EP 4

큰 그림에는 큰 붓이 필요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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