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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1화 (1/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 ⓒ 피아조아

국회의원으로서의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린 세상.

불타오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좌충우돌 우당탕탕 매운맛 정치액션 헌터레이드 모험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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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나는 내가 운이 좋은 줄 알았다.

27세에 국회의원이라. 심지어 지역구다. 동년배들 중에는 손꼽힐 정도로 성공한 게 아닐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며......"

국회의사당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선서를 읊는 와중에도 희열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다.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동창회에서도 친구들과 난리를 쳤고, 사촌누나에게도 7급 공무원 수행비서 자리 하나 나눠줬다. 우리동네 시장이랑 밥까지 먹었다.

4년짜리 계약직 공무원이자, 걸어다니는 헌법기관. 삼권분립의 축, 입법부. 진짜 좋아 죽을 것 같다.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

-쾅!

천장이 무너지고 무언가 운석처럼 떨어졌다.

"...니다."

EP 1 - 직장을 잃었습니다 (1)

"뭐요? 허, 참. 그 친구 그렇게 안봤는데......"

뒷좌석에 앉은 양판석 의원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레 핸들을 돌렸다.

"아아, 알겠어요. 일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괜히 흠집 생겨."

뚝. 노인네가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옆에 툭 내팽개쳤다.

나는 이 양반의 수행비서다. 말이 비서지 운전기사에 가깝다.

따라서 양판석이라는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민주당 3선 의원.

탈모 이야기하면 때린다.

커피에 설탕 안 넣어먹음.

손해를 보더라도 적을 만들기 싫어하는 사람.

이제 슬슬 당 중진으로 취급받는 중.

물론 마지막이 제일 중요했다. 공천관리위원장이라는 자리가 그를 증명했다.

공천관리위원장은 선거에 누굴 내보낼지 결정하는 막중한 자리다. 물론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권한이 매우 강력한 위치다. 지원사격만 있으면 계파 하나를 박살낼 수 있을 정도로.

또, 삐쩍 마른 60대라서 건강 걱정이 많다. 대놓고 걱정하는 건 싫어하는데 은근히 챙겨주는 건 또 좋아한다.

그리고 자기 기분 나쁠때 옆에서 물어봐줘야 기분이 풀리는 타입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통영시-고성군에 출마시키기로 했던 양반이 경찰에 잡혀갔어. 공화당도 슬슬 냄새를 맡았는지 물어뜯을 준비를 하는 거 같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공천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양판석 공관위원장이 독박을 쓴다.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한숨을 푸욱푸욱 내쉬었다.

"하이고오. 후보등록 전날에 이지랄이 나는 걸 보니 누가 작전을 쓴 게야. 공화당이든, 아니면 나 싫어하는 민주당 쁘락치 새끼들이든."

"너무 상심하지 마시죠, 의원님. 어차피 통영-고성은 공화당 텃밭 아닙니까? 경남에 있는 항구도시에서 민주당이 당선될 리는 없겠죠."

"......썩 위로가 안 되는데."

"헤헤, 못 먹는 떡 바닥에 흘렸다고 생각하시죠?"

양판석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게 만들면 작아지고 크게 만들면 커지는 게 이 바닥이야. 행여 공화당 쪽 후보가 무투표 당선이라도 된다면 내가 뭐가 되겠나?"

"그렇습니까?"

"질 싸움에 사람 안보냈다고 민심 까먹고, 후보공천 거지같이 했다고 물어뜯을 게 분명해. 내가 당대표 되는 꼴이 그렇게 보기가 싫나?"

"양심적으로 정치하는 사람은 적이 많으니까요."

"자네는 아부 좀 그만해."

"아부 아닌데요."

"새끼......"

까칠하긴 해도 성격이 꼬인 할아버지는 아니라 나름 직장생활 편하게 하고 있다. 잔정이 많은 양반이기도 하고.

"아, 그러고보니 자네 고향이 통영이었나?"

"예. 물고기 먹으면서 자랐습니다."

이거 봐라. 비서 고향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뒷조사를 한 게 분명했지만, 아무튼 잘 챙겨주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자네, 꽤 좋은 대학 나왔지?"

"헤헤..."

"초중고는 어디에서 나왔나?"

"토, 통영입니다."

"로컬이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양판석 의원은 공관위원장이다. 민주당 후보가 경찰에 잡혀간 마당에 공화당이 무투표 당선이 된다면 욕을 먹을 게 분명했다.

"한승문이."

"예?"

"출마해볼 생각 없나?"

나는 잽싸게 짱구를 굴렸다. 양판석 의원은 나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쪽에 후보를 안 냈다가 상대방이 무투표 당선이라도 되면 욕을 먹기 때문이다.

물론 경상남도의 항구도시 통영-고성은 공화당의 텃밭. 미쳤다고 민주당이 당선될 리는 없다.

즉, 그는 나를 못 이길 싸움에 내보내려는 것이다.

공관위원장으로서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내가 얻을 피해에 대해 생각해보자.

후보등록을 위해 나는 기탁금 1500만원을 내야 한다. 득표율 15%를 못 넘으면 그 돈을 못 돌려받는다.

그러면 난 좆되는거다.

또, 국회 공무원으로 20년을 근속하면 공무원 연금을 받는다. 나는 후보등록을 위해 7급 공무원을 때려쳐야 하고 4년간 쌓아온 근속일자를 잃어버린다. 선거 끝나고 양판석 의원이 나를 다시 받아줄지는 의문이다.

나는 양판석 의원을 위해 일자리와 1500만원을 베팅할 수 있는가.

결론 : 빨리 대답할수록 좋다

이 모든 판단이 1초도 되지 않아 진행되었다. 나는 최대한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하겠습니다."

어차피 심기 거스르면 짤리는 건 똑같다. 오히려 질문한 양판석 의원이 더 당황스러운지, 아이러니한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은 하고 대답하는 건가?"

"아뇨."

"그럼 왜 하겠다고 그래?"

"어어, 시켜서요?"

차라리 충성심을 증명하는 게 낫다.

"......"

차 안에 침묵이 감돌고,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양판석 의원의 표정은 모르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게 백미러도 쳐다보지 않았다.

"허어. 이래 약은 구석도 있는 줄은 몰랐네."

의미심장한 대사가 들려왔고, 나는 기겁해서 백미러로 양판석 의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손주 재롱을 보듯 웃고 있었다.

"한승문이."

"네, 넷?"

"요즘 젊은놈들 같지 않게 귀여운 구석이 있어."

"아, 아하하......"

*

"니 미쳤냐?"

"아! 뭐!"

"1500만원? 1500만원? 이, 개또라이 새끼가...!"

여도연이 내게 베개를 집어던졌다. 안그래도 험악하게 생긴 기지배가 제대로 뿔이 난 모양이다.

"누나!"

"아, 몰라. 니 내 동생 아니야."

"500만원만 빌려줘!"

"꺼져. 제발."

나는 한 살 차이나는 사촌누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둘 다 고향이 경상남도라서 서울에서 같이 동거하는 중이다.

"돈 많잖아아..."

"내 28년 인생에서 니가 돈을 갚은 건 8살때 병아리 산다고 빌려간 500원 이후로 없었어."

"지난번에 대회 준우승했잖아아..."

그녀는 이종격투기 선수였다. 생긴거랑 비슷하게 놀았다.

"상금 다 어머니한테 갖다드렸다."

"그럼 이모한테 좀만 꿔달라고 말 좀..."

"우리 엄마가 니 학비도 대준 거 모르냐?"

"응 장학금으로 다녔어."

"그건...! ......잘했네."

나는 15살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내 왼쪽 발목에 의족도 달고,

유일한 친척이었던 이모 집에 얹혀 살았다.

이모부나 이모나 원래 친하게 지냈고 사람도 좋았다. 이모는 심지어 변호사였던지라 흔쾌히 내 대학 등록금까지 내주셨다.

왼쪽 발목부터 의족이라 장애인 전형으로 명문대 들어갔고, 이모랑 이모부한테 미안해서 장학금 받고 대학다녔다. 그래서 여도연이랑은 친남매에 가깝다.

"그러니까 500만원만."

그녀는 말없이 중지를 치켜세웠다.

"어차피 깝죽대다가 돈 줄거 다 알아. 못 받는 돈도 아니잖아!"

"득표율 15% 넘는다는 보장은 있고?"

"경남이라도 민주당 너무 호구로 보는 거 아니야?"

"상대방이 지역구 거물이라며!"

그랬다. 내 상대방인 공화당 의원은 무려 4선짜리 거물이었다. 심지어 지역구 붙박이. 내가 이길 확률은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이기려고 하는 싸움이 아니야."

"뭐?"

"남자에게는 질 걸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찰싹!

그녀는 내 얼굴을 발등으로 툭 찼다. 볼을 너무 찰지게 맞았다. 모멸감이 들지만 돈과 권력 앞에 숙이지 못할 이유도 없다.

"킥이 찰지네."

"꺼져."

"7급 수행비서, 아니. 운전셔틀이 3선짜리 거물 공관위원장한테 신세를 입힐 기회가 얼마나 귀중한 지 알아?"

이건 선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양판석 의원을 위해 1500만원과 7급 공무원직 따위는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였다.

"눈에 들면 수행비서가 아니라 5급 비서관까지 갈 수 있어. 조금만 더 버티면 4급 보좌관까지 간다고. 어차피 일자리야 양의원 손가락질에 잘리는 거고, 1500이야 돌려받는 게 거의 확실한데, 이거 천재일우의 기회 아니냐?"

여도연은 무표정으로 나를 잠시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 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툭 내뱉었다.

"......언제까지 주면 되는데?"

"제가 도연씨 많이 사랑하는 거-"

"닥쳐."

"응."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여도연에게 맥콜을 따라주었다. 그녀는 내가 공손하게 건넨 컵을 시건방지게 받아들며 되물었다.

"언제까지 줘야 하는데?"

"어어, 후보등록이 내일까지니까......"

나는 방긋 웃었다.

"오늘?"

그날, 여도연이 링에서 쓰는 기술들을 전부 알 수 있었다.

*

내가 1500만원이 부족해서 돈을 꾼 건 아니었다.

발목 덕분에 군대도 안 간지라 2년을 아낀 덕에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고, 학벌과 인맥빨로 양판석 의원의 운전비서 노릇을 하며 돈을 꽤 모았다.

문제는 선거운동이다. 양판석 의원에게 잘보이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못 이길 싸움이라도 대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나는 당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선거차량 대여,

운동원 식대,

선거송 저작권, 등.

1억은 가뿐히 깨진다.

내가 선거운동 '흉내'를 내는 거라 망정이지, '진짜' 선거운동을 했다면···

대의원, 권리당원 뽀찌,

문자발송,

선거현수막,

개소식,

명함,

전화홍보,

선거사무소 임차료.

차량대여.

5억은 깨졌다. 1억이라 다행이다.

그래도 내 전재산을 갖다 박았다. 양판석 의원이 비자금 3천만원을 용돈삼아 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썩 괜찮은 후보였다. 양판석 의원도 와꾸가 꽤 괜찮게 짜였다며 좋아했다.

통영에서 초중고 졸업, 명문대, 장애인, 청년.

민주당에서 딱 좋아하는 캐릭터다.

나도 눈치없게 1500만원으로 이름만 올려놓은 게 아니라, 진짜 전재산 박으면서 선거운동 하니까 위에서도 신났는지 몇 명 보내서 응원까지 해줬다.

나는 통영시 죽림리 교육지원청 앞에서 청년 장애인 교육(민주당이 좋아하는)으로 이빨 한 번 털어주고, 땀 뻘뻘 흘리며 분수대 언저리에 앉아 헥헥대고 있었다.

골수 공화당 지지자들의 도시라 그런가, 이따금 어르신들이 욕하고 지나가긴 했지만, 나는 당선되려고 뛰는 게 아니라 민주당에게 잘보이려고 뛰는 것이었다.

"마, 개안나?"

"아! 이모부!"

"이 좀 무라. 니 조아하는 참치주먹밥이다 안카나."

"저만 먹기는 좀......"

"운동원 분들 다 드맀따. 니가 시마이야."

마음 따뜻한 테디베어 부산남자 여도식이 내게 참치주먹밥을 건넸다. 기센 마누라랑 딸에게 잡혀사는 험상궂은 부산남자이기도 하다.

"저 여기있는 건 어찌 알고 오셨으요?"

"느그 사무실 직원한테 물어바따."

"사무실까지 갔다가 여기로 오신 거에요?"

"에이, 전화로 물어보고 온 기지."

주먹밥이 반쯤 박살이 난 걸 보니 사무실까지 갔다가 여기로 온 게 분명했다. 사랑과 정성이 넘치는 주먹밥이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근데 이모는 왜 안와요?"

"쓰벌놈아. 변호사가 여길 왜 오노."

"거, 조카가 운동을 뛰는데 이정도도 못옵니까!”

“지랄하고 앉았네···”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 변호사! Fee 빨아먹는 모기! 민주당에서 싫어하는 사람!”

이모는 대형 로펌 소속이었다. 대기업 뒤 닦아주는 일의 프로페셔널이다.

사실 양판석을 음해하려는 세력(아마도 지금 이 사단을 낸)이 그걸 살짝 언급하긴 했지만, 너무너무 사소한 일이라 양의원님이 지랄하지 말라고 엿을 먹였다고 했다.

이모부는 씨익 웃으며 내게 봉투를 슬쩍 건넸다.

"그래. 피도 눈물도 없는 느그 이모가 보낸 검은 돈이다."

"아! 씨! 여기서 그걸 꺼내면 제가 뭐가 됩니까!"

"받어, 새끼야. 손 뒤로 빼지 말고."

"아! 이! 정치자금법 위반!"

"닥치라. 애비애미가 주는 용돈인데, 그기 와 불법이고."

부산남자 여도식은 가볍게 내 명치에 훅을 갈기고서는 안주머니에 돈을 쑤셔넣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내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열심히 산다."

"......고맙습니다."

"처형이랑 형님이 봤으면 좋아했을 기다."

그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미소지었다.

문득,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이리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게 살짝 비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할 새 없이 바빴다. 사는 게 그랬다.

"...아! 으, 으원님! 으원님!"

민주당에서 보내준 사무팀장이 허겁지겁 내게 뛰어왔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내 어깨를 잡고 땀을 뻘뻘 흘리며 헐떡였다.

"흐으! 아으! 허어! 으, 으원님!"

"저, 후보잡니다. 말씀 조금만..."

"아니! 아! 그, 그, 뭐시기."

인생 최고의 날이 찾아왔다.

"공화당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잡혀갔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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