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미에가 나나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파지직-!
그때 방문 근처에 설치해 둔 신성석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며 리미에의 진입을 막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걸 또 설치해 두셨네요.”
리미에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한번 제 발을 방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키이이잉-!
신성석에서 뿜어져 나오던 나나의 신성력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리미에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우아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수작은 저한테 안 통해요.”
치직, 근처를 막고 있던 신성석에 과도한 열이 오르며 터졌다.
“더 준비해 두신 건 없나요?”
리미에는 나나를 조롱하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나는 리미에의 시비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신성력으로 만든 화살비가 리미에에게 쏟아졌다.
칼릭스는 눈부시게 빛나는 나나의 신성력을 보며 놀랐다.
‘나나의 신성력이 원래 이렇게 강했나?’
단순히 많은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절묘한 조절 능력까지 돋보였다.
“이게 전부라면 조금 실망스러운데요.”
리미에의 발밑 근처에서부터 어두운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어두운 힘이 나나의 신성력 화살을 모두 집어삼켰다.
“마왕님께서도 보고 있으신데, 성녀로서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리미에의 뒤쪽에서 검은 구 형태로 떠 있던 마왕.
검은 형체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불쑥 커졌다.
크하하하하-
나나가 방에 꼼꼼히 설치해 둔 신성석들에 쩌적 금이 갔다. 하지만 나나는 숨을 참으며 그 공격을 버텨냈다.
“아직이야.”
나나는 등을 꼿꼿하게 편 채 리미에를 바라보며 신성력을 흩뿌렸다. 오로라색 신성력이 마왕의 마기에 저항하듯 더 강해졌다.
“이래서 멍청한 걸 상대하고 있으면 피곤하다니까요.”
리미에의 어두컴컴한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포기해야 할 때를 모르고.”
신성석을 감싼 어둠이 점점 거세어졌다. 신성석들은 막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칼릭스가 나나에게 말했다.
“나나, 일단 도망쳐.”
“안 돼요.”
칼릭스는 억지로라도 나나를 도망시키려고 했다. 일어나려던 칼릭스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내 힘이, 움직이지 않아?’
나나의 신성력에 정화되기 시작하면서 칼릭스의 마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정화를 받지 않는 건데.’
마기가 정화되는 부작용인지, 점점 칼릭스의 두 눈이 감겨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나나가-’
지금 나나는 마왕을 부활시킨 리미에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심지어 그의 마기를 정화하고 있으니, 더욱 불리한 상황이다. 칼릭스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너무 위험해. 나를 버리고…….”
당장 도망쳐.
하지만 칼릭스의 말은 끝까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칼릭스가 풀썩 앞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리미에가 쓰러진 칼릭스를 보며 나나에게 물었다.
“폐태자를 인간으로 되돌릴 생각이었구나?”
오랫동안 마법에 통달한 리미에는 결계의 모양만 봐도 대강 어떤 마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폐태자를 인간으로 바꾸고 나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줄 알았니?”
“…….”
“바보 같기도 하지. 이미 너를 가짜로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폐태자 하나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널 믿어줄 리 없잖아.”
처음으로 나나의 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많이 기대했던 모양인가 보네.’
리미에가 칼릭스의 진짜 정체를 까발리기 전이었다면, 충분히 효과적이었을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이미 다 늦었어.’
오로라색 신성력이 나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그녀를 감쌌다.
오로라색 빛에 휩싸인 나나는 명화 속의 진짜 성녀처럼 눈부셨다. 곧 추락할 모습이지만, 리미에는 그 모습이 아주 거슬렸다.
“나나.”
그래서 리미에는 그 빛을 당장 절망으로 더럽히기로 했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잖아. 너는 나한테 안 된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다 맡기는 게 최선이라고.”
“리미에, 당신…….”
나나의 두 눈이 커졌다. 주먹 쥐고 있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아아, 설마 아직도 너만 회귀했을 거라 생각한 거야?”
리미에는 나나의 불안과 초조가 매우 기꺼웠다.
“하긴. 나도 나중에서야 눈치챘으니 네가 아직도 눈치채지 못할 법도 해.”
나나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떠올랐다.
“이제야 좀 내가 아는 나나 같네. 오랜만에 보니까 더욱 반가운걸.”
역시 그때와 달리 예쁘게 잘 자랐다 해도, 멍청하게 이용당하는 그 모자란 본질만큼은 숨길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처럼 누리고 사니까 즐거웠니?”
“나, 나는.”
“그래, 욕심날 수도 있어. 특히 내 곁에서 나를 계속 선망했던 너라면.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리미에가 입꼬리만 들어 올린 채 나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감히 이렇게 나를 배신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과호흡이 온 것처럼 허덕이던 나나가 이를 꽉 깨물며 물었다.
“애초부터 나를 이용하다가 버릴 생각이었으면서, 배신이라니. 오히려 날 배신한 건 너잖아.”
“그러면 네 행동이 올바른 게 되니? 내 사람을 다 훔쳐갔잖아.”
솔직히 리미에라고 처음부터 나나의 회귀를 의심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노리던 것들이 모두 나나의 편으로 돌아서는 걸 보며 점점 의심스러워졌다.
바이칼로스의 태도도 바뀌었고, 과거와 달리 모든 게 불리하게 변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네가 나를 방해한 덕분에 마왕님을 완전히 부활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리미에는 나나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마왕의 힘으로 막아둔 탓에 나나는 도망치지도 못했다.
나나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맺혔다.
“이제야 좀 네 과거가 후회되니?”
리미에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만 아니었다면 슬라데이체가 마족으로 몰려 멸망하는 일도, 칼릭스 황자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나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게.”
리미에의 검은색 눈이 레몬색으로 변했다. 나나가 알던 신성한 눈동자였다.
“너 하나만 희생하면 모두가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
“……어째서?”
“이제 와서 좀 그렇지만, 너와 함께 보낸 정이 있으니 최대한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래.”
“나보고 네 말을 믿으라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할 이 기회를 놓쳐도 되겠어?”
리미에는 나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걸려들었네.’
여타 다른 성녀가 그렇듯 나나 역시 리미에가 설계한 덫에 걸려들었다.
‘이래서 나 말고 다른 성녀는 안 된다는 거였는데.’
신을 모신다는 빌미로 자기를 희생할 줄만 아는 어리석은 것들. 그런 것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내가 계속 성녀였다면, 이렇게 마왕이 부활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리미에가 나나의 두 손을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얼른 선택해. 그래야 착한 아이지, 나나.”
“……내가 어떻게 희생하면 되는데.”
“방법은 간단해. 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알았어, 리미에.”
나나와 리미에의 두 눈이 마주쳤다.
‘……뭐지?’
어쩐지 리미에는 나나의 반짝이는 금안이, 방금 전 실의에 빠졌던 그 눈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고 느꼈다.
“난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거야.”
“잘 선택했, 뭐?”
“죽지 않을 거라고.”
리미에가 고장 난 것처럼 되물었다.
“너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 일을 두고, 다른 사람 모두를 희생시키겠다고?”
“응. 그래야 마왕이 다 부활하지 않을 테니까.”
리미에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나는 그런 리미에를 보며 씩 웃었다.
“마왕 부활이 완벽하게 성공했다면, 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와 설득 같은 걸 할 리 없잖아.”
리미에는 놀란 마음을 누르고 태연하게 웃었다.
“안타까워서 어쩌나. 난 그저 너한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러면 지금 당장 날 죽여봐. 죽일 수 있겠어?”
평온을 가장하던 리미에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리미에가 섬뜩한 눈으로 나나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는 네가 하겠지.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던 내가 안 속아 넘어갔으니까.”
나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리미에는 갑자기 과거에서부터 축적해 오던 자신의 신성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제물을 바쳐 억지로 마기를 채워 넣기는 했지만.’
신성력과 마기로 균형을 맞춰 사용하던 과거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마왕님의 힘을 받아 더 강한 마기로 완벽하게 위장했는데.’
리미에의 주위에 감돌던 마기가 점점 강렬해졌다.
“그렇게 착각하고 싶다면야 어쩔 수 없지.”
리미에가 마기로 겨우 버티고 있던 신성석을 모두 부수었다.
쩌적, 쩌저적-
“죽음을 선물해 주는 수밖에.”
그렇게 신성석이 모두 깨지며 움직이던 결계가 멈췄을 때였다.
‘사용하던 마법이 중간에 정지되었으니 큰 타격이 왔을 터.’
반작용이 온 칼릭스를 협박하든 해서 나나를 끝내려고 할 때쯤이었다.
“리미에, 왜 내가 시간을 끌면서 너와 대화했을 것 같아?”
분명 절망해야 했을 나나가 무척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태자가 정화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얌전히 있던 것 아니었나?’
불현듯 리미에는 등골이 싸하게 식었다.
‘따로 노리고 있던 수가 있었다고?’
리미에는 이상하게도, 항상 깔보던 나나가 처음으로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커다랗게 보였다.
“디트리히, 지금이야.”
디트리히가 리미에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 움찔했던 리미에가 디트리히를 향해 소리쳤다.
“마족! 나는 마왕의 계약자이자, 마왕을 부활시킬 존재다. 그런 나를 해하려는 건가?”
마족들은 모두 마왕의 지배 아래 존재한다.
인간에서 마족이 된 칼릭스의 경우 지배에서 어느 정도 자유도가 있으나, 대부분의 마족은 그런 것이 없었다.
리미에가 디트리히를 무시한 채 나나에게 수작 부렸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누가 마왕님의 부활을 방해한다고 했나?”
디트리히의 붉은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난 그저 주인 없는 마기를 흡수할 뿐이야.”
리미에가 부순 신성석 사이에 박혀있던 마정석이 떼굴떼굴 바닥에 굴러왔다.
‘저건…… 블레스 다이아?’
블레스 다이아 안에서 마기와 신성력이 동시에 떠오르며 새로운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 마법진이 리미에의 온몸을 빠르게 실처럼 동여맸다. 마법진이 옭아맨 곳마다 리미에의 마기가 모래처럼 흘러넘쳤다.
디트리히가 씩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디트리히는 리미에가 흘린 마기를 빠르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리미에가 말도 안 되는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네 마법은…… 칼릭스 황자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마법이 아니었어?”
“그 마법도 맞아.”
실제로 칼릭스의 마기는 나나의 신성력으로 정화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너를 대비해서 다른 마법도 깔아놨을 뿐이야. 네가 올 걸 당연히 대비해야 했으니까.”
“크윽, 이대로는-”
리미에는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자신의 마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새어 나가기 시작한 마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앞에서 바로 먹어치우는 마족까지 있어 다시 찾아올 수도 없었다.
‘발소리가 들려.’
주위의 소리를 눈치챈 리미에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 움직임은, 성기사단이야.’
신성력을 감지해 낸 리미에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지금이라도 당장 저 마녀를 막아야 해요!”
기사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
마법진에 묶여 무릎을 꿇은 채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리미에.
마족 디트리히와 칼릭스를 옆에 두고 멀쩡히 서 있는 나나.
‘저들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빈틈을 만드는 거다.’
리미에가 성기사단을 보며 반갑다는 얼굴로 가련하게 외쳤다.
“여러분, 저를 도와주세요!”
그때 성기사들 사이로 한 청년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삐죽삐죽 거친 은발에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 불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벨리알이었다.
벨리알이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리미에를 보며 말했다.
“쇼하네.”
그 말처럼, 성기사 그 누구도 리미에를 돕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왜 슬라데이체와 성기사들이 싸우지 않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