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성녀가 악당을 구원한다는데요 159화 (159/172)

온통 새카만 공간 속에서 에스테반은 나른한 기분에 젖어 두 눈을 꼭 감았다.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인생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평생 황태자라는 자리에 옥죄어 살아왔는데, 그는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는 결과를 받게 됐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황실 감옥으로 보내지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 되었다.

황실의 혈통을 사칭한 자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어머니가 부정을 벌이실 분은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쩌면 세라피나 황후의 말대로 마도구에 오류가 생겨서 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스테반 황태자는 세상이 그리 정의롭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이미 나를 버렸다.’

황제가 에스테반 황자를 구명하고자 했다면, 꺼낼 수 있는 방법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 에스테반 황자를 초라한 감옥에 방치해 두는 것만 봐도 그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래서 에스테반은 황제가 그를 비밀리에 감옥에서 꺼냈을 때도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부름을 받아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나한테 어울리는 마지막이군.’

평생 어머니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버지의 사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니.

‘걱정 마라. 고통이 그리 길지는 않을 거다.’

에스테반은 강제로 마도구에 끌려가 목숨이 바쳐지던 그 순간, 새삼스럽게도 나나를 떠올렸다.

‘나나를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우연히 어머니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던 나나. 그 애는 에스테반의 기적이었다.

그 애를 향한 마음을 자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나가 있으면, 지옥 같은 일이 있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나의 마음속에는 먼저 자리 잡은 소년이 있었다.

그것도 그 소년은 에스테반이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폐황자 칼릭스였다.

‘다시 한번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어차피 그 둘 사이에 에스테반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

아직 그는 나나에게 제대로 고백하지도 못했다.

‘나나는 앞으로도 날 쭉,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겠지.’

이제까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고백이라도 한 번 하는 건데.’

상황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 때문에 나나가 곤란할 것을 알아서. 너무 많은 것을 염려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예 가출이라도 해볼걸.’

편안히 잠들려던 에스테반의 가슴에 미련이 덕지덕지 묻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어.’

이럴 거였다면, 굳이 황태자로서 최선을 다 해 살 필요도 없었다.

‘나는 왜 태어나서-’

“에스테반.”

그때 울먹거리는 그의 귓가에 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테반, 무엇 하느냐?”

검은 공간 속에서 한 여자가 우아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하, 여기에 왜 당신이…….”

에스테반은 기가 찼다.

‘죽기 직전까지 환각으로 어머니를 봐야 하나?’

솔직히 그의 소망은 나나를 보고 죽는 거였다. 그런데 또 여기서 세라피나 황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억울한 마음만 들었다.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

“설마 황태자 위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제물로 희생된 저를 질책하러 오셨습니까? 어리석고 모자란다고.”

세라피나가 몸을 움찔했다.

“…….”

“왜 말이 없으십니까. 평소에는 그리도 말이 많으시던 분이.”

지금 세라피나는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말랐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살았건만, 어머니도 저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에스테반의 눈에 그런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 결과를 보니 만족스러우십니까?”

“에스테반, 이 어미가 원망스러우냐?”

세라피나 황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스테반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우냐고요?”

“아니, 우스운 걸 물었구나. 이 어미가 원망스럽지 않을 리 없지.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보다 더 악독한 어미도 없을 게다.”

에스테반은 세라피나 황후의 무뚝뚝한 얼굴에서, 묘한 슬픔을 읽어냈다.

“그러게요, 어머니. 정말 너무 지독하셨습니다. 왜 그리 지독한 길을 선택하셨던 겁니까. 뭐가 남는다고.”

“내게는 그 길밖에 없었다.”

“아니요, 다른 길이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가 다른 길을 보려 하지 않은 것이지요.”

세라피나 황후는 우두커니 서서 에스테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죽었는데.’

막 원망을 쏟아내려던 에스테반은 자기도 모르게 세라피나 황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너.”

“그래도 고생하셨습니다.”

“…….”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하진 않았지만, 어머니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요. 어쩌면 제가 잘못 생각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때부터 제가 어머니를 막았어야 했을지도요.”

품 안의 세라피나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에스테반은 어쩐지 이 세라피나가 자신의 환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니. 다음 생에는 꼭 행복하기를…….”

“…….”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그런 아들을 낳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품 안에 안겨 있던 세라피나가 에스테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너를 사랑한 적 없다.”

세라피나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찡그리려던 에스테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 지금.”

세라피나가,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울지 않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나에게 내 권력을 위해 꼭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다. 네가 있어야 내가 그 황제를 밀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스테반은 지금 세라피나의 얼굴을 보려 애썼다. 하지만 세라피나는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버텼다.

“너 이외의 다른 아들을 생각해 본 적 없다.”

“……..”

“네가 이렇게 사라진 이후 나는 이상하게 전처럼 살 수가 없어졌다. 이 모진 어미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다.”

“잠깐만요, 어머니. 설마 지금 제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날 원망해라. 지독한 어미라 증오하고, 절대 용서하지 마.”

에스테반은 겨우 세라피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20대로 보일 정도로 곱고 아름다운 얼굴, 높은 자존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화려한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라피나가 두 손으로 에스테반의 얼굴을 소중히 감싸며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렸다.

“자책하지도 말고, 뻔뻔하게 너만 생각하며 살아.”

그게 마지막이었다.

“넌 그래도 돼.”

에스테반은 갑자기 이상한 곳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내가 죽지 않았어?”

몸이 굳었는지 움직이기가 어려웠지만 죽은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 내가 만난 어머니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몸에 기운이 없어 한참 움직이지 못했지만,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니 걸어 다닐 만했다.

‘몸에 새겨진 이 문양은 뭐지? 제물로 바쳐지다가 생겨난 건가?’

에스테반은 억지로 골방 같은 곳에서 나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장소가 익숙해졌다.

‘여기는 황궁인가?’

그때 멀리서 많은 사람이 움직이며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에스테반 황자 전하? 왜 전하께서 거기서 나오시는…….”

“잠깐 황자 전하의 몸에 있는 저거, 흑마법 제물의 흔적이 아닌가? 정말 황제 폐하께서 에스테반 전하를 제물로 사용하셔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