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72)

마물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마물의 시체가 사라지는 시간보다 죽이는 속도가 더 빨랐던 탓이다.

“이곳은 아닌 것 같군.”

대공은 묵묵히 마물을 베어낸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벨,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

“아버지.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십니다. 이 많은 수의 마물을 다 정리하시고…….”

아벨은 이번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할 걸 보면요. 무력과 행운을 바꾸신 건가.”

“이게 운이 나쁜 건가?”

“대마법사가 직접 마법을 조정하고 있으니, 보통은 5번 이내로 찾습니다. 그런데…….”

벌써 20번째도 넘게 이상한 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조난이군.’

아벨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아버지, 뭐 이상한 저주라도 걸리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연산해도 1%의 우연으로 계속 이상한 곳에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거 없다.”

대공은 무심히 답했다.

“불평할 시간 있으면 다시 한번 넘어가라.”

“이게 불평으로 보이십니까?”

“그 말 몇 마디 하는 게 불평이지.”

아벨이 얼굴을 구기며 다시 마법을 발동했다.

‘왜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왔는지 기억나는군.’

도무지 아버지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됐습니다.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하겠습니까.”

아벨이 짜증스럽게 마법진을 그리며 나나가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섰다.

그때 마법진을 그리는 아벨의 길쭉한 검지가 멈칫했다.

‘왜 나나의 기운이 안 느껴지지?’

하지만 마법은 이미 발동한 뒤였다. 두 사람은 다시 예상하지 못한 장소로 이동했다.

‘나나가 밖으로 빠져나간 건가?’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하고, 축제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이곳은 어디지?’

아무튼 마력이 떨어져 가니 이동해야 했다.

그들은 정식 손님이 아니라 이동한 시간대에서 변화를 일으킬수록 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아버지, 아무래도 나나가 탈출한 것 같으니 로스칼 호수 너머로 가겠-”

“조용.”

대공이 손을 들어 아벨의 입을 막았다.

“왜 갑자기-”

아벨은 멈칫하고 대공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꽃비를 뿌리고 있는 축제의 현장이다.

모두의 칭송을 받는 그 중심.

정결한 성녀복을 입고 결 좋은 흑발을 늘어뜨린 리미에가 수줍게 손 키스를 날리고 있었다.

“모두 감사해요. 여러분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대공의 목근육이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버지?”

아벨은 이토록 분노한 아버지를 본 적 없었다. 대공의 날 선 원한과 분노가 보는 것만으로도 생생히 느껴졌다.

“저것이 나나를 죽였다.”

“여기서 없애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벨, 너는 보이지 않느냐?”

대공이 울컥한 듯 목울대를 일렁이며 살기 어린 눈으로 리미에를 노려봤다.

“저것의 안에 나나가.”

아벨은 리미에가 자랑처럼 군중들에게 뿌리는 신성력을 한눈에 알아봤다.

‘나나의 신성력.’

그녀 안에 나나의 신성력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무엇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벨이 침음을 삼키며 대공에게 물었다.

“어차피 이곳은 현실과 상관없는 시공간의 틈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해봐야 아버지만 고생하고, 나나를 돕지 못할 뿐입니다.”

“아니.”

대공의 붉은 눈동자가 맹수처럼 빛났다.

“잠결의 나나에게 들은 적 있다.”

그 순간 아벨은 대공이 초월적인 직감을 가진 사람이란 걸 자각했다.

‘이 시기가 언제인지 알고 있으신가 보군.’

대공이 적의 가득한 시선으로 리미에를 노려보며 검을 쥐었다. 손등에 푸른 피가 솟았다.

흉흉해진 분위기에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아벨은 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대책을 세우고 행동하시겠지.’

특히 대공이 알고 있는 시기라면,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하니까.

하지만 아벨은 몰랐다.

딸에 미친 아버지에게 상식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콰아아앙!

대공은 먼 거리를 한 번에 뛰어올라 단번에 리미에의 앞에 도착했다.

주위에 얼마나 두터운 호위가 있었는지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잠-”

일대가 대공의 등장에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전이었다.

리미에의 노란 눈이 대공의 얼굴을 보기도 전, 대공의 검이 리미에를 향했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꺄아아아악!”

“성녀님! 성녀니이임-!”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가 막을 새도 없었다.

‘저 미친 딸바보!’

여동생 바보 아벨이 입을 떡 벌렸다.

슬라데이체의 마기와 리미에의 신성력이 교차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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