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72)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아벨 오빠, 농담하는 거 아니지?”

“나나.”

“미안. 너무 생각지도 못해서…….”

아벨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아벨 오빠가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그 말을 숨겼는지 알겠어.”

혹시나 잘못 알려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얘기다.

“하지만 좀 걸리는 게 있어.”

“뭔데?”

“대공비님은 살아계신 걸까?”

잔잔히 나를 보고 있던 아벨의 깊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대공비님이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더 알지 않는 한 사실, 증거 같은 건 안 돼.”

몇 번이고 꿈꾼 적 있다.

마리엘 대공비님이 실은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는 이상한 기대감이 생기곤 했다.

‘사실 내가 그 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슬라데이체의 특징인 마기도 없으면서 나는 종종 그런 생각에 빠졌다.

지금도 진짜 가족이지만, 그러면 더 좋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최대한 그 기대를 누르려 했다. 나만 상처받고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벨 오빠가 용기 내서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잘 모르겠어.”

“도토리!”

벨리알이 갑자기 나를 번쩍 던졌다가 잡았다.

나는 왕방울만 하게 눈을 떠 벨리알을 보았다.

“벨리알!”

그러자 벨리알이 날 보며 씩 웃었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너 설마 우리 엄마 친딸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

“……그렇진 않아.”

“그럼 됐네! 친딸인 것으로 밝혀지면 행운인 거고, 아니어도 지금이랑 똑같은데, 뭐.”

벨리알의 말을 듣다 보면 모든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기분이다.

“그런가?”

“당연하지! 잘못되면 다 아벨 형 잘못이잖아! 이럴 땐 그냥 웃고 넘기면 되는 거야.”

“벨리알, 그러다 나나 떨어뜨리겠다. 이리 놓거라.”

아빠가 벨리알의 손에서 나를 번쩍 데려갔다.

“나나.”

그리고 아빠가 휙 내 몸을 돌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한순간 자라 걱정했는데, 나나 네가 아직 덜 자란 것 같아 좋구나.”

“네?”

“아빠가 전에 뭐라고 했느냐?”

아빠는 자신의 이마로 내 이마를 꽁 부딪쳤다.

“아빠가 전에 무어라 했느냐?”

“……무슨 있어도 나는 슬라데이체 공녀이자, 아빠의 딸이라고요…….”

“그래, 네가 내 친딸이라면 무척 기쁠 거다. 하지만 그게 네가 내 핏줄이어서는 아니다.”

“그러면…….”

“마리엘이 지키려 했던 아이를, 보살필 기회가 나한테 왔기에 무척 기쁠 뿐이다. 너는 그 자체로 내 딸이고, 내 마음엔 변함없다.”

“전 괜찮아요. 하지만 아빠.”

나는 한없이 다정한 아빠에게 물었다.

“전 아빠가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요.”

“어째서 그러지?”

“저야 친딸이 아니어도 그대로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때 아빠가 나를 내려놓고 벨리알에게 물었다.

“벨리알, 저번에 연무장에서 날 마주쳤을 때 기억나느냐?”

“아, 새벽에 연무장에서 했을 때 말하십니까?”

“그래.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던 날.”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다시 잠을 잘 못 주무시게 된 거예요?”

어릴 적 내가 자주 함께 잔 이후 아빠의 불면증은 많이 나아졌다.

그래서 내가 없어도 아빠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게 되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시겠지?’

그러자 아빠가 내 머리를 토닥였다.

“아니. 그날 이상한 악몽을 꿔서였다.”

“무슨 꿈을 꾸셨는데요?”

“나나 네 친아빠가 나타나 너를 데려가겠다며 나타나는 꿈이었다.”

“네?!”

“네 친아빠라는 놈을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그냥 살려는 뒀다. 그런데 꿈속의 나나 네가…….”

아빠가 살짝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날 봤다.

“너는 친부모가 좋다며 따라가더구나.”

왠지 짓지도 않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제 아빠는 아빠뿐이에요.”

“안다, 내 딸. 하지만 이 아빠도 너처럼 늘 불안하단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족이란 건 변치 않아.”

“나도 그래.”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쥬테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 들어왔을 때, 내가 많이 못되게 굴었잖아. 그래서 네가 내가 싫다면서 떠나는 꿈을 꾸곤 해.”

“……쥬페. 그건 너무 망상이야.”

“시끄러.”

쥬테페가 투덜거리며 아빠 품속에 있는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 불안한걸. 그건 당연한 거야.”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을 둘러봤다.

‘난 너무 운이 좋아.’

항상 나를 사랑해 주는 내 가족들.

‘그래, 어느 쪽이든 나는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좋은 가족도 있고, 로자리오도 있으니까.

“로자리오 너도 잘 부탁해.”

나는 로자리오를 꼭 잡고 쪽 뽀뽀했다.

그러자 로자리오가 부끄럽다는 듯 반짝이며 부르르 떨었다.

“……?”

하지만 그 반응을 본 건 나만이 아니었다. 벨리알이 내 로자리오를 채갔다.

“야, 로자리오 줘 봐.”

벨리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로자리오를 노려봤다.

“이 로자리오 새끼, 사실 남자 아니냐?”

로자리오는 시치미를 떼듯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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