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72)

“이번에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네 마지막 연구 분야가 생기와 생명에 관련된 거였는데. 맞지?”

“……맞아. 그런데 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대공비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가 소중한 듯 납작한 배를 쓸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좀 약한 것 같아.”

“슬라데이체의 아이인데?”

보통 슬라데이체의 자식들은 마기를 타고나는 만큼 굉장히 건강한 것으로 유명했다.

“단순한 건강 문제면 좋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느껴져.”

“임신한 건 확실한 거야?”

“확실해. 마탑에서 검진을 통해 딸인 것도 확인했어.”

가만히 침묵하던 샤를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많이 소중하니?”

“소중하냐고?”

대공비님은 꿈을 꾸는 듯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당연하지. 알렉과 나 사이에서 생긴 아이인걸.”

“……대공님께선 아이의 존재를 알고 계셔?”

“아니. 아직은 말 못 했어. 아이에 대해 알아본 뒤 말하려고.”

샤를린이 걱정스럽다는 듯 대공비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다 네 몸이 상할까 봐 걱정된다. 안 그래도 쥬테페를 낳고 난 뒤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면서.”

“그것도 알고 있었어? 그동안 연구하느라 바빠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네 소식이야 다 듣고 있지. 난 네 마탑 동기잖아.”

대공비님은 샤를린의 걱정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사람들은 다 똑같은 걱정을 하는 걸까? 알렉도 쥬페 다음으론 걱정되니까 더 아이를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거든.”

가족들의 이름을 말하는 대공비님의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기적처럼 생겨난 이 아이와 벌써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대공비님이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이 아이를 아주 사랑해 줄 것 같아.”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자 특유의 빛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널 도와주려면 너도 날 도와줘야 할 부분이 있어.”

“어떤 건데? 내가 어디 네 도움을 거절한 적 있었니? 마도구에 남은 마력을 이용하는 연구도 도와줬는걸. 그러고 보니 그때 연구는 어떻게 됐어?”

“맞아, 그랬지. 이번엔 그때보다 더 큰 도움이 필요해.”

대공비님의 손을 마주 잡은 샤를린의 손에 힘이 더 세졌다.

“조금 더 아플 거거든.”

“샤리?”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처음부터 네가 너무 싫었어. 가족 하나 안 남은 몰락 남작 영애 주제에 대단한 마력과 천재성이라니.”

“그거 진심이니?”

“아직도 멍청하게 사람을 믿니?”

대공비님은 샤를린을 밀어냈다.

“샤를린 엘리샤라.”

대공비님의 강력한 마력이 샤를린의 마력을 거칠게 튕겨냈다.

‘어라?’

몰입해서 화면을 보고 있던 내가 크게 놀랐다.

‘대공비님은 샤를린한테 당한 게 아니셨나?’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벨리알을 멀쩡히 만났댔지!’

대공비님의 녹금안이 매섭게 타올랐다. 샤를린의 수작에 당했을 거라 생각한 대공비님은 바로 샤를린의 마력을 몽땅 제압했다.

손발이 묶인 채 바닥에 누운 샤를린이 카리스마 넘치는 대공비님을 올려다봤다.

강대한 마력의 흐름을 따라 긴 분홍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샤를린이 막대한 마력을 보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약을 먹었는데!”

“미안. 내가 임신 중이라 마시는 척만 했어. 그 꽃차, 안 예뻐서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넌 방금 나한테 마력을 빼앗겼어. 그렇다면-”

“내 마력을 빼앗았다고 네가 바로 쓸 수 있을 줄 알았어?”

대공비님이 투덜거리며 마력으로 샤를린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한동안 안 만났다고 너무 나를 무시한 거 아냐?”

“…….”

“샤를린 엘리샤라, 그래서 사주한 범인이 누구야?”

“사, 사주하다니? 그런 건 없어!”

“내가 아는 너는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없어. 열등감이 있기는 해도, 정도를 아는 애잖아?”

샤를린이 정곡을 찔린 듯 어깨를 떨었다.

“그런 건 없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분명 대공비님은 햄스터가 떠오르는 무척 귀엽고 예쁜 인상이었다.

“어차피 넌 마탑의 감옥으로 끌려가 죄질대로 처벌받을 거야. 나뿐만 아니라 내 아이도 건드리려 했으니까.”

그런데 샤를린과 눈을 마주 보고 있는 대공비님에게선 숨길 수 없는 강인함이 흘러나왔다.

“조금이라도 자비롭게 처벌받고 싶다면 실토하는 게 좋아. 너도 알지, 난 두 번 기회 안 줘?”

그때 대공비님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방금 전 샤를린과 싸우다 다친 팔에 미세한 상처가 나 있었다.

‘왜 이상한 느낌이 들지?’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대공님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슬픈 모습이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 벨리알과 쥬테페.

그리고-

‘아벨?’

아벨은 평소 같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벨의 목 부근에 새겨진 문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점점 새빨개졌다.

“아벨, 괜찮아?”

“아아, 레이디.”

아벨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마에서 식은땀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순간 영상에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치면서 종료되었다.

아벨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대공님이 아벨에게 물었다.

“괜찮으냐?”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하지만 이걸론 더 확실하게-”

“아니다. 이걸로 많은 게 확인됐다. 내가 틀리고, 네가 옳았다.”

대공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공님의 잘생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멜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

아벨이 대공님을 불렀다.

“……아버지.”

대공님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듯 공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네게 숨겼던 게 있다, 아벨.”

“무엇입니까?”

“마지막에 멜이 사라지기 전, 나는 멜과 크게 다투었다. ……멜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놀라서 끼어들었다.

“네?! 설마 다른 남자와 바람이요?”

“나 역시 믿지 않았다. 그래서 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멜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대공님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슬프게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웃어넘겼을 멜인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모두 이 사실은 처음 듣는지 충격에 빠져 고요해졌다.

“그렇게 나는 멜과 크게 싸우고, 그다음 날.”

대공님이 절규하듯 한 단어씩 토해냈다. 핏줄이 튀어나올 것같이 주먹 쥔 손이 그의 괴로운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멜이 사라졌다.”

“…….”

“처음엔 별일 아닐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질투는 괴물이 되어 나를 잡아먹었다.”

“……아빠.”

나는 조심스럽게 대공님을 꼭 안아줬다.

“힘들면 조금 있다가 말씀해 주셔도 돼요.”

“그런데 멜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구나. 저렇게,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그녀는 그대로였어.”

그토록 강해 보이던 대공님께서 어쩐지 금방 쓰러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더 그녀를 믿었어야 했는데.”

“…….”

“모두 고맙다. 특히 아벨과 나나. 아벨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진실을 모르고 고통받았을 것이다.”

아벨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나, 네가 아니었다면 다시 이렇게 일어설 용기가 없었을 거다. 네가 아니었다면, 진실을 알고도 마주할 힘이 없었을 거다.”

대공님이 소중하게 나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오늘부터 나는 다시 움직일 거다. 멜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아버지.”

벨리알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공님의 앞에 섰다.

“저 역시 돕겠습니다.”

쥬테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형보단 제가 더 나을 겁니다.”

어느새 체력을 회복한 듯한 아벨이 빙긋 웃었다.

“이제 온 가족이 하나가 된 것 같네. 우리 레이디 덕분에.”

전시처럼 비장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나는 슬라데이체가 똘똘 뭉쳐 한 가족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고맙다.”

전장의 악마,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했다던 대공님이 고독한 얼굴로 선언했다.

“당연히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온 가족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 때가 대공비님이 떠나시기 전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벨리알이 만난 대공비님은 멀쩡한 상태셨어. 그런데 오른팔에 상처를 입으셨잖아.’

대공비님이 바람을 부정하지 않은 것도 이상했지만, 다른 이상한 부분도 많았다.

‘저런 일을 겪고 아무 말도 안 하실 분 같진 않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벨리알이 봤던 멀쩡한 대공비님은 뭐지?’

* * *
2